234화
“허접이라.”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천천히.
아주 맛있는 별식을 몇 번이나 씹듯이 반복적으로.
5초가 지나고, 10초가 지났을 때.
지영이가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스, 스승님, 뭐 하세요?”
“오래간만에 듣는 표현이라, 낯설어서 그래.”
“에이, 우리는 플래티넘인데 스승님만 골드라서 장난친 거죠.”
“우리라고 하지 마라. 그 의견에 동조한 적 없다.”
“핑 레이! 너 혼자 발 빼기야?”
“무서운 누님, 우리는 그런 이야기 나누지 않았으니까 걸고넘어지지 마십쇼.”
“엔리케야, 너도 스승님이랑 한번 진심으로…….”
“으아악!”
앳된 소년의 비명 소리가 지영이의 말을 잘라 냈다.
“그러니까 다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구나.”
“오해 마시오, 사부. 난 그저 승급전 승리 후 회식에서 농담 삼아…….”
“그러니까 했다는 거네?”
“아차.”
역시 파조동 1과 2.
성능은 확실했다.
“분석관님.”
“음, 회식 때 모두가 동조하긴 했었죠.”
“발언 감사드립니다.”
원망 섞인 눈빛이 토마스 분석관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플래티넘에 오른 선배님들의 기량, 한 명씩 확인해 볼까?”
-누구 하나는 죽일 것 같은 미소로구나.
닉스의 아련한 목소리에 길드원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 * *
길드 하우스로 돌아온 일행.
“환영회는 어쩌고 대련을 하게 되었는지…….”
토마스 밀러가 난감한 듯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허접이라는 도발에 진호가 응수한 방법은 늘 그랬듯 대련이었다.
합법(?)적인 폭력.
그 첫 상대는 당연하게도 지영이었다.
꿀꺽.
지영은 침을 삼켰다.
두근- 두근- 두방망이질치는 심장.
너무 긴장한 탓일까,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스스로 터져 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왜, 허접이랑 붙어 보려니까 좀 그래?”
“시시해서 죽고 싶네요.”
“곧 죽을 것 같다는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스산한 웃음이 진호의 입가를 잔잔하게 물들였다.
넘실거리는 살기.
튜토리얼 때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의 진심 어린 분노는 이 근방을 근방의 기온을 떨어뜨릴 만큼 강렬했다.
초월의 영역에 한 발자국 내디뎠기에 발생한 일.
진호는 ‘감정’만으로 세계의 섭리에 간섭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 분노를 마주해야 하는 지영의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스승님을 도발한 건 아니라고요.’
지영은 각오를 다졌다.
툭 튀어나온 허접(?) 도발.
스승인 진호를 약 올릴 합법적인 명분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새 능력을 보여 드리고 싶어.’
진호가 미국에서 머물고 있을 때 얻은 깨달음.
타인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지영의 ‘필살기’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약 하나 걸지.”
“제약요?”
“날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나게 하면 네 승리다.”
“헤헤, 거시는 김에 하나만 더 어때요?”
“말해 봐라.”
“주력 기술은 쓰시지 않기요. 그 무공 있잖아요.”
“백수제왕무를 말하는 건가?”
“네. 그거랑 어둠을 다루는 힘, 그리고 변신요.”
그녀가 언급한 변신은 [공허의 거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는 진호.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의 눈동자 너머로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허접(?)에 이은 두 번째 도발.
지영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두 눈을 번뜩이더니.
“그 정도는 허용하지.”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야호.”
들뜬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내니 어깨 위에 걸린 중압감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넘실거리는 살기가 영혼을 옥죄어왔지만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그럼 갑니다, 스승님.”
육각형 결계가 지영의 양손에 생성된다.
[진동 결계 10중첩]
[이지스]
철컥! 철컥!
맞닿은 결계가 반발하는 대신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본래 진동 계수가 증폭되면서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지닌 결계가 매끄럽게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지영은 땅을 박차면서 진동 결계를 전개했다.
등 뒤에 펼쳐진 결계를 중첩.
증폭된 진동을 추진력 삼아서 진호에게 달려든다.
“이건 대체 뭔데?”
진호의 입에서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영의 새로운 전투 스타일.
서브 탱커&딜러 포지션이던 지영이 스스로 정면을 고수하는 건 전생에서도 없는 일이었다.
당황한 기색과 달리, 진호는 차분하게 지영의 돌진에 대응했다.
팔에 생성된 가시가 정면으로 쇄도한다.
탐욕의 가호를 둘러서 한층 강화된 쏜즈 미사일.
하나하나가 2성급 마법인 파이어볼에 필적하는 위력을 지녔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가시 미사일은 여유 능력치를 모두 마력에 투자한 지영의 반응 속도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이지스 – 절대 수호]
지영의 양팔이 물 흐르듯이 움직인다.
투쾅! 빗발치는 가시 미사일들이 양손에 맺힌 방패에 막혀서 소멸한다.
다각도로 쏟아지는 공격.
눈으로 좇기 어려운 속도와 범위인데도, 지영은 일일이 반응했다.
“와, 저게 되네.”
진호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넋 놓고 있을 때더냐.
“아니, 이해가 안 가서.”
신체 능력 중에는 ‘민첩’이 있다.
단순히 육체의 속도만 늘려 주는 게 아닌,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속도와 동체 시력을 늘려 준다.
방금 전에 지영이 보여 준 움직임은 민첩 스텟이 최소 200대가 되어야 가능했다.
의구심을 품는 건 잠시뿐.
곧바로 지영의 공세가 들이닥쳤다.
“이건 어떠신가요?”
둘 사이의 간격을 3미터 정도 둔 상태에서, 그녀가 양손을 세게 부딪쳤다.
열 겹을 중첩시킨 결계의 방패가 마주치는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파가 진호를 덮쳤다.
20겹으로 중첩시킨 진동 결계의 파동.
육감이 경고음을 울릴 만큼 강력한 공격이다.
까득.
온몸을 짓누르는 충격에 진호가 이를 갈았다.
금속 장갑이 우그러지고 암흑 투기조차 증폭된 힘에 짓눌린다.
압착기에 눌린 것 같은 큰 압박감.
‘스승님한테도 효과가 있어!’
지영은 끓어오르는 웅심에 몸을 떨었다.
진동 결계를 양손에 결합, 중첩으로 형태를 유지하는 개념.
그녀가 이 기예를 떠올리게 된 건 진호의 능력 활용 방법이었다.
성좌 바알이 내려준 [탐욕의 가호].
진호는 그 능력을 정수, 혹은 사물에 덧씌워서 형태를 바꾸거나 강화했다.
‘나도 방패라는 개념을 능동적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지영은 늘 자신의 포지션에 만족하지 못했다.
서브 탱커 겸 딜러.
결계의 방어력은 어지간한 탱커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막상 어그로 관리 스킬이나 반응 속도 문제 때문에 메인 탱커가 될 수 없었다.
딜러로서도 마찬가지.
진동 결계를 겹쳐서 증폭시키면 강력한 공격기가 된다.
어디까지나 상대가 가만히 당해 준다면.
결계를 여러 겹 포개기 전에 위치를 벗어나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영은 스승인 진호를 모델 삼아 가호와 능력의 결합을 연구했다.
아이기스, 혹은 이지스.
신화에 따르면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절대적인 수호 방패다.
지영은 이지스의 개념을 진동 결계에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처음에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결계 자체가 강화되긴 했지만, 역동적으로 반응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때, 지영이 주목한 건 ‘방패’라는 형태였다.
진동 결계를 포개어 양손에 방패 형태로 고정하면?
‘방패의 성질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전생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힘의 연구.
그녀가 진호의 등 뒤를 쫓으면서 찾은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방금 전에 선보인 기술은 지난 몇 달간 홀로 수련해 온 결과물이다.
‘성공했어!’
한 번 증폭된 결계 안에 묶이면 벗어나기 어려웠다.
주력기를 봉인했다지만, 진호가 힘겨워하는 모습만 봐도 성공적이었다.
“뭐야, 어떻게 사부를 상대로 선전할 수 있는 거지?”
경악이 섞인 핑 레이의 음성.
길드 하우스 훈련장에 있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말이었다.
토마스조차 지영이 숨긴 비장의 수를 알아채지 못했으니.
지영은 승리를 자신했다.
이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아니면 두 스킬을 사용하거나.
지난 수련의 성과를 스승인 진호에게 직접 인정받고 싶었다.
“대단하다. 역시 내 첫 번째 제자야.”
그때.
담담한 진호의 목소리가 지영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렇지만 아직 부족하다.”
콰지직!
거듭 증폭되던 결계의 힘이 좌우로 찢어졌다.
* * *
우우우우웅!!
고막을 흔드는 이명.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을 토할 것 같다.
뼈와 근육, 세포 하나하나를 쥐어짜는 것 같은 압박.
지영이의 새 능력 운용 방법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왜 그리 놀라느냐?
-진동 결계를 이런 식으로 응용하는 건 처음 보니까.
-그대가 겪은 미래에서도?
-어.
나는 전음으로 닉스와 대화했다.
통곡의 벽.
그 단어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의미다.
하이 랭커 이지영은 전위에 나서는 것보다 결계 자체를 전략적으로 운용, 전투의 흐름을 좌지우지했다.
미래에서 보지 못한 능력 운용 방법.
지영이가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했을지 쉽게 짐작이 갔다.
동시에 한 가지 희망을 얻었다.
르네 데이비스처럼 바뀌어 가는 미래에서 안 좋은 방향으로 적응하는 녀석도 있지만.
지영이처럼 새로운 역사를 쓰는 사람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수는 없지.
정말 나를 이기고 싶었으면 제약을 더 걸었어야 했다.
괴력과 암흑 투기를 동시에 전개.
증폭되는 진동의 교차점을 찾아내서 양손으로 막았다.
통곡의 벽, 하이 랭커 이지영과 등을 맞대고 싸운 게 얼마인데.
진동 결계의 증폭 포인트를 집어서 상쇄시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 어떻게?!”
“그런 자신감, 앞으로도 자주 보여 줘라.”
오른발로 지면을 밟으며 끌어올린 선기를 방출했다.
[토둔 - 토룡출수를 사용합니다.]
땅 위로 솟구친 토룡이 아가리를 포악하게 벌린다.
지영이는 두 방패를 덧대면서 방어력을 강화시켰지만.
쾅! 바위로 된 용의 돌진력을 막아 내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튕겨 났다.
“커흑!”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지영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훈련장에 펼쳐진 결계가 충격 대부분을 흡수했지만, 토룡출수에 실린 힘 일부만으로도 기절했다.
“다음.”
나머지 길드원들을 훑어보자, 일제히 내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