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파팟!
공간을 접어서 육체를 이동시키는 신기(神技), 축지를 발동했다.
“오, 좋아요! 너무 좋아요! 이 수치 좀 보세요!”
희열감 섞인 음색.
아멜리아 테슬라는 홍조를 띄운 채, 눈을 반짝이며 ‘축지’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웬 데이터 분석이냐고?
아멜리아는 플라자 호텔에서 축지를 보는 순간, 연구소로 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뉴욕 외곽에 위치한 레이언사의 연구소.
정확히는 연구소 겸 회사 건물로 이동, 여러 장비를 착용한 채로 축지를 펼쳤다.
패널 위에 떠오르는 여러 수치.
레이언사의 연구 기기들은 축지를 사용할 때 발생되는 이상 현상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투자자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비웃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여신님.”
-호오, 여는 진실 된 말을 한 것뿐이다만.
“입 가리고 그런 말 해 봐야 설득력 하나 없거든?”
닉스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어째 말투가 나를 닮아 가는 느낌인데.
착각이겠지.
반복해서 축지를 사용하니, 아멜리아가 손을 휘저었다.
“이제 됐습니다!”
지이잉-!
실험실 문이 열리자마자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맨 앞에 선 아멜리아 테슬라는 패기로운 목소리로 연구소 인원들을 진두지휘했다.
“마력 패턴 분석을 서둘러 주세요. 그리고 공간 이동 때…….”
전문적인 용어가 쉬지 않고 쏟아진다.
탑의 여파로 해석이 다 될 텐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멜리아는 쉬지 않고 몇 분 동안 말을 쏟아 내다가 뒤늦게 이쪽을 바라봤다.
“미스터 유!”
“아, 예.”
“정말 감사드려요! 그 축지라는 기술, 연구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내 손을 와락 잡더니 연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멜리아, 실례가 안 된다면 축지를 분석하는 것이 공간 이동 연구와 얼마나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공간 이동은 마법의 영역.
선법에 가까운 축지하고는 가동 메커니즘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보여 주신 능력, 축지는 공간 그 자체를 규명해 주니까요.”
바벨탑에서 제공되는 스킬.
그중에는 [블링크]나 [워프]처럼 단 · 장거리 이동 기술들이 있다.
공간에 간섭하여 발동되는 여러 능력.
레이언사에서는 ‘존재’하지만 느낄 수 없는 공간을 증명하는 데 많은 것을 투자했다.
“그렇다면 워프를 분석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강대한 마력으로 공간의 틈새를 비틀어서 이동한다, 그 이상으로는 다가갈 수 없더라고요.”
아멜리아 테슬라의 목표는 광대했다.
전 세계에 공간 이동 망을 설치, 현대의 물류 이동 체계를 바꾸겠다!
“미스터 유가 보여 준 스킬. 공간 사이의 간격을 접어서 이동하는 개념이잖아요?”
“그야…….”
융합기공으로 빚어낸 스킬.
나도 그 원리를 이론적으로만 알 뿐.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원리에 대해 감을 잡아 가는 중이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할 만큼 또렷한 개념은 잡지 못했다.
기계장치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아멜리아 테슬라는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내가 이해한 축지의 기원 및 원리를 대부분 파악했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공간 자체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멜리아의 입에서 다시 한번 이론의 폭포가 쏟아지려고 할 때.
나는 황급히 말을 꺼냈다.
“투자는 받으실 겁니까?”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투자자님.”
은근히 호칭을 바꾸는 아멜리아.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둔황 사막의 혈전.
그리고 엘렌을 포함한 골든 서클 팀과의 대련.
두 사건의 진상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만신전에서 필멸자들을 관조하는 이들.
성좌들은 달랐다.
차원의 벽을 넘어서 [후원]을 한 이들을 관조할 수 있는 존재.
시니스터 소속 성좌.
혈마.
헤파이스토스.
손오공.
아테나.
그 외에도 여러 성좌들이 진호의 활약상을 두 눈에 새겨 넣었다.
신왕 급 성좌가 넷이나 관심을 가진 이레귤러.
그뿐이랴.
플레이어의 능력을 획득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종의 한계를 초월해 버렸다.
『인간. 그저 약하다고만 여겼던 필멸자들이었을 터인데.』
『유진호 말고도 잠재 능력을 지닌 이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 우리가 모르는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유망주들을 미리 후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성좌들은 기현상의 중심지인 지구를 주목했다.
진호의 파격적인 행보와 힘.
그 외에도 숨겨진 원석들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가장 빠르게 나선 것은 올림포스였다.
올림포스 신화의 기반.
그리스 인근 국가 소속 플레이어들 중 잠재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모조리 엮어 낸 것이다.
“위대하신 하늘의 신께서 계시를 주셨다!”
알렉시스 파판드레우.
과거 진호에게 볼썽사납게 패배했던 제우스의 계약자다.
등급은 골드에 불과하지만.
그는 올림포스 소속 성좌들과 계약할 기회를 주겠다고 여러 플레이어들을 섭외했다.
길드의 이름도 그에 맞춰서 [올림포스]로 정했으니.
올림포스는 성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빠르게 세를 불려 나갔다.
『태양의 계시를 받을지어다.』
엔네아드의 수장.
호루스도 올림포스의 행보에 자극을 받아 적극적으로 인류 플레이어들에게 후원을 날렸다.
성좌의 원천이나 마찬가지인 영성, 혹은 영기.
뭇 필멸자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별에 이름을 새긴 성좌(星座)이기에 소모되는 영성의 양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성좌들이 전생과 달리 지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
그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가파르게 상승한다는 것이다.
『제2의 유진호를 내 손으로 발굴할 것이다.』
누군가는 훌륭한 재목을 발견하기 위해.
『이렇게 경쟁을 해 보는 게 얼마 만인가?』
『지난 액재전 이후 이렇게나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군!』
권태감에 몸부림치던 성좌들은 만신전을 뒤흔드는 열풍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그중에는 울상을 짓고 있는 성좌들도 있었으니.
『유진호, 그자는 내가 발굴한 보석이라고!』
아레스는 과열된 성좌들의 후원 경쟁을 보면서 분노를 터트렸다.
튜토리얼에서 발견했을 때 바로 배후성 계약을 맺었어야 했다.
진호는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찬란한 별.
가능성을 지켜본답시고 뜸을 들이다가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낭패를 본 건 아레스만이 아니었다.
압둘 하마드에게 영성을 소모하면서까지 수많은 힘을 부여해 준 시니스터 소속 성좌들.
그들은 쏟아부은 힘을 회수할 틈도 없이, 꼭두각시들을 허무하게 잃어버렸다.
『오히려 좋잖아?』
시니스터의 핵심 축.
트릭스터 로키는 우스꽝스러운 가면 너머로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우리가 원하는 건 재미다.』
시니스터 소속 성좌들은 손익보다 혼란 속에서 찾아오는 새로운 변화를 반겼다.
일부는 진호에게 앙심을 품기도 했지만.
시니스터의 수완가인 로키의 제지에 더 나서지 않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성좌들의 후원.
시시각각 달라지는 미래의 흐름 속에서 많은 이들의 생각이 얽혀 갔다.
* * *
아멜리아 테슬라와 만남을 가진 지 한 달 가량이 흘러갔다.
원계획은 레이언사에 투자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레이언사의 연구 시설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짧은 기간 동안 축지를 완전히 그대의 힘으로 바꾸어 낼 줄이야.
“분석 팀 덕분이지.”
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융합기공으로 빚어낸 스킬.
축지는 급박한 전장에서 치명적인 한 수로 사용할 만큼 유용한 기술이다.
그렇기에.
늘 [융합기공]의 슬롯 하나를 잠궈 두고 축지를 사용했었지.
한 달간의 연구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아멜리아의 연구를 돕는 과정에서 공간 이동 규칙을 완벽하게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지정한 위치와의 거리가 0으로 바뀐다.
축지(縮地).
마법도, 체술도, 무공도 아닌 신묘한 기예를 오롯이 내 능력만으로 발휘한 것이다.
『화과산의 미후왕이 감탄합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은 당신을 채근합니다.』
여태 지켜보기만 하더니.
축지를 마스터하자 손오공의 반응이 격해졌다.
바쁜 일정 속에서 미뤄 두었던 선법 수련.
축지도 마스터했겠다, 오랜 시간 동안 욕망의 주머니에 잠들어 있던 [원숭이도 배울 수 있는 선법의 기초]를 꺼냈다.
「네놈이 언제쯤에나 이 몸을 찾나 기다리던 차였다.」
백지 위로 떠오르는 글자.
말이 좋아야 선법의 기초지.
이 책을 차원의 억제력을 피해서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용도로 써먹는단 말이지.
역시 선법의 달인인 손오공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떠들 거면 이만합시다.”
「성미 참 급하기는. 그래도 내가 알려 준 선법 잘 써먹었잖아?」
뇌신(雷身).
그리고 뇌망(雷網).
반응 속도를 올려 주는 기초 선법, 그리고 타격 겸 움직임을 봉쇄하는 공격 선법.
선법은 습득 난이도가 높지만,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전개할 수 있고 위력도 대단했다.
“다음으로 알려 줄 선법은 뭐지?”
「토둔(土遁)이다.」
“흙을 다루는 선법은 나랑 안 맞을 것 같은데.”
「널 관찰하면서 가장 필요한 속성이 토둔이라고 판단한 거다.」
“근거를 알고 싶군.”
「치유 쪽에 반쯤 걸쳐 있는 수둔이야 네놈의 비정상적인 회복력을 생각하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음, 나는 짧게 신음을 흘리며 무언의 긍정을 했다.
「화둔에는 강한 선법이 많지만 네 마법과 겹치니까. 풍둔은 네놈이 선호하지 않을 것 같고.」
“후순위라고 해 주지? 풍둔도 배울 생각이니까.”
「큭, 부정은 안 하잖나. 그러니 흔들림 없는 우위를 유지하게 해 줄 토둔을 추천하는 거다.」
일리가…… 있어!
손오공 녀석.
선법 수련을 도울 때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은근히 내 전투 스타일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네 의견을 따르지.”
「이렇게나 성좌에게 건방진 녀석은 오래간만에 보는군. 거참.」
“옥황상제 앞에서 깽판을 친 게 누구시더라?”
「큭. 이제부터 선법을 전수해 줄 테니 두 눈 뜨고 집중해라.」
흑역사를 지적당한 손오공이 화제를 돌렸다.
백지 위에 다시 나타나는 선법 구결.
오호라.
이 선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