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세계의 정상요?”
“그렇다네. 이 손을 잡으면 내가 그 자리 위로 자네를 올려 주지.”
“사양하겠습니다.”
윌리엄 록펠러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왜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올라가면 의미가 없잖아요.”
“자신감이 넘치는군. 꼭 젊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이 아저씨, 2020년대에도 꼰대 기질이 다분했네.
“길드장님, 미스터 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으시면서.”
엘렌이 샐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묻지. 정말 그 이유만으로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가?”
“전 누군가한테 묶이는 걸 싫어해서요.”
“나는 그저 자네에게 투자를 하겠다는 말이라네.”
“적당한 투자는 몰라도, 록펠러 길드장님이 세계 정상의 자리를 약속하면서 어설프게 손을 쓰실 것 같진 않군요.”
윌리엄 록펠러에게는 야망이 있다.
골드 문을 세계 1위 길드로 우뚝 세우는 것.
나한테 세계 정상을 운운하면서 거래를 제안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역천을 골드 문 산하로 거두겠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다.
-저자의 속내를 예측할 수 있다면 경계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윌리엄 록펠러의 투자 감각과 운영능력은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내가 회귀자이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 봤다지만, 투자와 운영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회귀자라고 모든 걸 다 잘하는 건 아니라고.
어떤 식으로든, 윌리엄 록펠러가 깔아 놓은 판에 앉으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야망이 작은 건가?”
“신중하다고 해 주시죠.”
“큭, 어느 쪽이든 현명하군.”
윌리엄 록펠러의 표정에서 의구심의 기색이 사라졌다.
내 말에 담긴 의미를 모두 읽은 모양이군.
이래서 머리 좋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건 편하면서도 불편하다니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윌리엄의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아른거렸다.
“자네가 이 자리를 나서면 골드 문과 역천이 경쟁 상대가 된다는 것, 숙지하고 있겠지?”
윌리엄 록펠러는 내 가치를 꽤 높이 평가했다.
그렇기에.
제 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철저하게 박살 낼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거다.
회귀 전에는 시기가 늦어졌을 뿐, 골드 문과 수시로 부딪쳤으니까.
그래서는 곤란했다.
윌리엄 록펠러는 까다로운 적이다.
역천 길드, 그리고 내 행보에 사사건건 끼어들면 귀찮아진다.
다가올 미래.
그러니까 멸망의 시대를 대비해서도 좋은 현상은 아니지.
난 윌리엄 록펠러를 만나기 전,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는 협상 카드를 준비해 왔다.
“실례가 안 되면 길드장님의 목표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골드 문의 이름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는 것이지.”
“그렇다면 저희는 경쟁자가 아니군요.”
윌리엄 록펠러가 등을 의자에 파묻으면서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 대답을 요구하는 은은한 제스처.
“저는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 골드 문은 최고의 길드. 둘을 나눠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윌리엄 록펠러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
회귀 후, 이따금 고민하던 답을 꺼냈다.
* * *
윌리엄 록펠러는 남다른 투자 감각을 지닌 사내다.
‘플레이어의 힘은 조만간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바벨탑, 그리고 플레이어가 나타난 직후.
상속받을 유산까지 미리 당겨서 투자, 골드 문을 설립해서 길드원들을 섭외했다.
미국 랭킹 1위 플레이어인 엘렌 테일러도 윌리엄 록펠러의 과감한 투자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으니.
윌리엄의 수완과 투자 감각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빛을 발했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수많은 길드 중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언급될 만큼 성장한 골드 문.
윌리엄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은 오직 하나, 최고가 되는 것.
‘난 최고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이끄는 길드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릴 순 있지.’
윌리엄의 고유 능력은 [골드러시].
돈을 소모해서 아이템 및 스킬을 강화하는 희귀한 능력이다.
자본이야 넘쳐나는 록펠러 가문이기에, 플래티넘 등급까지 금방 올라섰지만 재능의 한계가 분명했다.
윌리엄 록펠러는 그 사실을 빠르게 깨닫곤 유망주 양성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엘렌에게 돈을 아끼지 않은 것도 그 까닭.
진호가 튜토리얼을 마치고 나왔을 때 몸값으로 1억 달러를 제시했다고 했을 때도 기꺼워한 이유다.
그렇지만.
‘최고 길드라고 해서 반드시 랭킹 1위 플레이어를 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진호의 대답은 윌리엄 록펠러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다.
윌리엄은 미리 준비해 놓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쓴 향이 혀를 휘감자, 복잡했던 생각이 하나씩 정리된다.
“오늘 개안을 한 기분이야. 고맙네.”
“과찬입니다.”
“자네 말에 일리가 있지만, 한 가지를 빼놓았더군.”
“약속한 대로 제가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요?”
“그래. 난 자네를 품으면, 골드 문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다네.”
윌리엄 록펠러는 다시금 차가운 눈빛으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성장세로 기존의 랭킹 시스템을 휘젓는 커다란 미꾸라지.
하지만.
진호의 성장 속도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가파를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내 손을 잡는 게 확실하지 않겠나?”
가장 합리적인 방안.
윌리엄 록펠러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다.
진호의 제안은 굉장히 대담하지만, 그만큼 불안 요소가 가득했다.
‘미스터 유, 자네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 왔나?’
윌리엄은 오래간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투자의 귀재인 그조차도 고려하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
언뜻 보기에는 망상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그걸 말한 당사자가 진호인 만큼 허무맹랑하게만 들리지 않았다.
진호는 싱긋 웃더니.
“엘렌 상무의 팀과 겨루게 해 주시죠.”
맞은편에 있는 엘렌을 바라보았다.
미국 1위 랭커.
엘렌 테일러의 팀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최고로 손꼽힌다.
다이아몬드 승급전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각국 정상급 플레이어들보다 큰 활약상을 보이면서 정상급이라는 평가가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윌리엄 록펠러마저도 놀랄 만한 제안.
“호호, 재미있겠네요. 아주 깜찍한 생각을 하셨네.”
엘렌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 * *
숙소로 돌아가는 길.
골드 문에서 마련해 준 리무진을 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타임스퀘어.
뉴욕에서 손에 꼽히는 번화가답게, 많은 사람들이 길가를 오간다.
“괜찮겠느냐?”
“어. 해볼 만하잖아.”
“엘렌이라는 자, 그대에게 소중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엘렌과 나는 전우다.
회귀 전,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몇 없는 동료.
실력과 믿음을 모두 갖춘 녀석이지.
하지만.
“윌리엄 록펠러를 흔들어 놓으려면 이 정도는 했어야 해.”
엘렌의 팀, 골든 서클과의 대결.
1년 차 플레이어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윌리엄 록펠러의 표정에서 한순간 균열을 일으킬 만큼의 엄청난 제안!
“그대에게 패배하면 곤혹을 치를 터.”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엘렌이라면 이해할 거야.”
엘렌은 순수한 녀석이다.
신준석처럼 힘을 추구하고, 강자에게 경외감을 품는 무인 스타일이지.
저번에 대련을 먼저 신청한 것도 엘렌이었고.
다만, 팀 단위로 달려들라고 하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아서 그게 미안했다.
다음 날.
윌리엄 록펠러는 골드 문 트레이닝 센터로 초대했다.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돔구장.
내부는 마나 스톤으로 몇 겹으로 된 결계를 상시 유지했다.
“엄청나군요. 결계 유지에만 얼마가 들어가는 겁니까?”
“큭, 알아봐 줘서 고맙군. 하루에 100만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네.”
건물 유지비만 하루 10억 원이 넘어가다니.
돈지랄이 따로 없네.
“그만큼 마스터가 길드 운영에 진심이라는 말이죠.”
“엘렌 상무님.”
“호호호, 인사하세요. 저랑 같이 호흡을 맞춘 팀원들이랍니다.”
골든 서클.
멸망의 시대에도 큰 활약을 했던 팀이다.
엘렌 뒤에 선 팀원들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치들의 눈빛이 꽤나 뜨겁구나.”
“욕하는 거야.”
“후훗, 여가 그런 감정도 못 읽는 것 같으냐?”
닉스는 입을 가리면서 슬쩍 웃었다.
“미스터 유, 기세가 좋군요.”
엘렌의 눈가가 어제처럼 파르르 떨렸다.
얘, 화났는데?
골든 서클 팀원들도 분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다지만 자존심이 상하겠지.
미안하지만 너희 마음을 고려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야.
윌리엄 록펠러.
이 녀석을 아군으로 만들어 두면 미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사고방식을 바꾸려면 그만큼 충격을 줘야 하거든.
“큭,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분위기가 꽤 달아올랐군.”
윌리엄 록펠러가 훈련장에서 멀어졌다.
축구장 크기의 훈련장 위에 서 있는 건 골든 서클 팀원들과 나 뿐.
“시작하실까요?”
“미스터 유에게 선공은 양보하죠.”
두두둑-!
엘렌의 육신이 부풀어 오른다.
회귀 전에는 지겹도록 본 그녀의 고유 능력, [인크레더블].
착용 중인 방어구가 탄력적으로 늘어난다.
다른 팀원들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여신님.”
“철저하게 할 생각이구나.”
영체로 돌아온 닉스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밤의 여신의 축복.
그 외에도 온갖 버프를 사용했다.
전투 준비도 끝났겠다.
“그러면 사양 않고…….”
살짝 하체를 숙였다가 바로 지면을 박찼다.
허벅지 근육이 수축되었다가 이완하면서 태산 같은 힘을 뿜어내고.
그 힘을 그대로 바닥에 쏟아 내면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경신법 대신 전력 질주를 전개.
팀의 선두를 맡은 엘렌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자,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 위로 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정면이라. 오만하군요.”
허스키해진 엘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집채만 한 주먹이 쇄도한다.
오러를 방출하는 대신 신체에 스며들어서 근력과 내구력을 강화하는 마력 운용 방법.
저 주먹에 오러 블레이드 혹은 강기에 버금가는 위력이 담겨 있다니.
[인크레더블].
참 과격한 능력이란 말이야.
“오만한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근데 말이야.
과격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포식으로 늘어난 스텟.
그리고 초월의 경지에 한 발자국 디디면서 강화시킨 정수들.
[괴력을 사용합니다.]
600%로 강화된 힘으로 엘렌의 주먹을 맞받아친 순간.
쩌엉!
수배로 부풀어 오른 엘렌의 몸뚱이가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