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뉴욕.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전 세계 경제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공항으로 나서는 순간.
“미스터 유!”
“향신료 제도의 영웅이다!”
찰칵! 찰칵!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UNN의 도니 버밀리온입니다. 이번 둔황 사막에서도 큰 활약을 보여 주셨는데요.”
“중국 1위 랭커 장 우페이가 브레이크 사태 때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부산한 분위기.
회귀 전, 후를 통틀어서 이런 경우를 원체 많이 겪어 본 터라 익숙해졌다.
“여의 계약자라면 응당 이래야지.”
현신한 닉스가 만족스러운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쏟아지는 질문들.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 우페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단 말이지.
중국 정부와의 은원도 있고.
침묵을 고수한 지 1분 정도 지났을 때.
“미스터 유는 골드 문의 손님입니다. 관련 질문은 저희를 통해 해주시죠.”
중후한 목소리가 기자들의 질문을 가볍게 눌렀다.
노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사내가 천천히 공항 출구로 다가온다.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쫙 갈라진 취재진.
한마디 말로 기자들의 기를 누른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윌리엄 록펠러.”
“저 사내의 이름이더냐?”
“어. 골드 문의 수장이다. 후원자라고 해야겠지.”
“과연. 감사를 표해야겠구나.”
“농담이 많이 느셨습니다, 여신님?”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을 때, 윌리엄 록펠러가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내 키도 작은 편이 아니지만 윌리엄의 키는 190센티가 넘어가기에, 올려다봐야 했다.
빤히 내려다보던 윌리엄 록펠러는 이내.
“반갑습니다, 미스터 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난 거부하지 않고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골드 문의 길드 마스터께서 직접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세계를 움직인 거물.
윌리엄 록펠러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마천루.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길드, 골드 문 본사다.
“저번에 본 블랙마켓보다 더 커다랗구나.”
“쉿. 그 이야기는 둘이 있을 때만 해 줘.”
어휴.
블랙마켓은 공개된 장소에서 떠들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닉스가 지구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아직 배워야 할 게 너무 많네.
“흐응. 이번에는 그대의 장단에 맞춰 주겠노라.”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합니다.”
가끔 닉스가 분위기에 안 맞는 말을 내뱉으면 수명이 쭉쭉 줄어드는 느낌이라니까.
닉스가 곁에 붙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윌리엄이라는 자, 꽤 거물인 모양이구나.
-왜 그렇게 생각해?
텔레파시를 익히지 않았으니 전음으로 답했다.
내공이야 [진(眞)여의주] 덕분에 마나를 치환할 수 있어서 부담도 적었다.
-그대의 감정이 느껴지니라.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녀석이야.
-호오, 장 우페이와 다르게 회색 같은 남자로구나.
-그놈은 갱생이 불가능하지만 윌리엄 록펠러는 다르지.
갱생? 윌리엄에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멸망의 시대 이전에는 전 세계 랭킹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었지만.
막상 탑이 지구를 삼키기 시작했을 땐 그렇게나 아끼던 재화를 풀어서 저항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렇다면 아군이로구나.
-좋게만 볼 수 없는 게, 골드 문을 세계 1위 길드로 만들려고 수단 방법을 안 가리거든.
윌리엄 록펠러는 엄청난 수완가다.
미국 재계에서 손에 꼽히는 록펠러 가문의 장자.
엄청난 재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법의 경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길드를 성장시켰다.
탑과 세계의 동기화가 100%에 도달하면서 손을 잡았을 뿐.
그 전에는 나를 포함하여 여러 플레이어들을 가로막은 대적이다.
-회색이라고 한 것이 그 때문이로구나.
윌리엄 록펠러를 완전한 아군으로 섭외할 수 있다면, 미래를 바꾸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쉽진 않겠지.
녀석의 관심사는 오직 ‘골드 문’을 세계 1위에 앉혀 놓는 거니까.
지금이야 나한테 투자를 한 입장이기에 화기애애하지만, 역천 길드가 성장해서 골드 문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면 대립각을 세울 게 분명했다.
“먼 걸음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스터 유.”
윌리엄 록펠러는 내 복잡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자리를 권유했다.
“다시 한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록펠러 대표님.”
“큭, 나는 대표보다는 길드장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미스터 유처럼 강하진 않지만요.”
윌리엄도 엄연히 플레이어다.
랭커에 속하진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전투 능력을 지녔다.
저 오만한 인간이 겸손을 떨 리는 없고, 은연중에 나를 경계하는 거겠지.
“록펠러 길드장님 덕분에 번거로운 일을 덜었군요.”
이번 만남은 미리 상의된 게 아니다.
윌리엄 록펠러가 나름대로 이쪽 편의를 봐줄 겸 대담을 하려고 만든 이벤트.
미국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예측했었다.
“혹시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연장자에게 존대를 받는 건 익숙치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편히 하지.”
윌리엄 록펠러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하대가 나왔다.
“딱히 놀라지는 않은 것 같군, 미스터 유.”
“설마요. 무려 골드 문의 길드장께서 직접 나오실 줄 몰랐는걸요.”
윌리엄 록펠러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속내가 훤히 읽히는 느낌.
독심술 같은 게 아니다.
눈, 코, 입의 미세한 변화를 읽어서 내 생각을 파악하려는 것.
윌리엄 록펠러는 사람의 속내를 잘 읽어 내기로 유명했다.
어디 한번 열심히 관찰해 봐라.
잠시간의 침묵.
윌리엄 록펠러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다시 말문을 떼었다.
“미스터 유, 레이언 사에 투자한다고 하였나?”
“예. 제가 공간 이동 쪽에 관심이 있거든요.”
“제대로 된 시제품도 나오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만.”
“원래 투자를 해야 결과물도 따르는 법이죠.”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자가 그대를 의심하고 있구나.
사념을 보내는 닉스.
필멸자들의 감정을 색으로 구분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괜히 닉스를 현신한 상태로 데려온 게 아니라는 말씀.
그나저나 역시 내 의중을 파악하려고 하는구나.
레이언 사는 현시점에서만 해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회사다.
원 역사대로라면 공간 이동 기술이 상용화되기까지 10년이나 남았으니, 지금은 가닥도 못 잡았겠지.
엘렌에게 레이언사 투자를 이야기한 후에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특별하게 나오는 게 없었다.
윌리엄 록펠러가 내 행동에서 돈 냄새를 맡았든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든 간에, 저 의혹을 떨쳐 내려면 패 하나는 까야겠지?
오른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리는 동시에.
[축지를 사용합니다.]
공간을 접어서 이동하는 신기를 펼쳤다.
“미스터 유, 그 기술은?!”
“제가 왜 공간 이동 기술에 관심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블링크나 위상 이동과는 조금 다르군.”
“예. 축지라고 선인 계열 성좌들이 사용하는 기예입니다.”
공간을 뛰어넘는 스킬은 현 시대에도 축지 말고 여럿 있다.
그중 제일 유명한 건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에게 사랑받는 블링크.
전개 시 사용자를 중심으로 반경 30미터 주위로 이동시켜 주는 유용한 공간 이동 마법이다.
“블링크라면 페널티로 중심을 가누지 못했을 텐데. 안 그런가?”
“록펠러 길드장님의 눈썰미는 못 당하겠군요.”
난 감탄한 척 혀를 내둘렀다.
“모종의 방법으로 축지를 입수했지만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요.”
“스킬 매커니즘 분석을 맡길 생각인가 보군. 레이먼 사에.”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난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축지 연구용으로 투자한다고 못을 박아 버리면 오히려 윌리엄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기게 될 거다.
“좋네. 그럼 우리도 레이먼 사에 투자를 좀 해야겠어.”
“골드 문에서요?”
“미스터 유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어럽쇼, 이 아저씨가.
나야 미래의 지식을 알고 투자하는 건데, 그걸 묻어 가려고 하네.
-후훗,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구나.
쩝.
호의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윌리엄 록펠러가 그것만으로 움직이진 않았을 거다.
레이먼사를 나름대로 조사했으니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겠지.
내 어깨 위로 나름의 빚을 지워 놓을 겸.
투자자의 감만 놓고 보면 저 인간을 이길 수가 없다.
뭐, 록펠러 가문의 투자를 받으면 공간 이동 기술 상용화가 더 빨라질 테니 손해는 아니겠군.
똑똑-.
“들어오게.”
양옆으로 열리는 문.
엘렌 테일러가 그 사이로 천천히 걸어왔다.
“오래간만이에요, 미스터 유.”
“직접 보는 건 그러네요. 목소리야 자주 들었지만.”
“호호호, 그렇게 말해 주니 꼭 연인 관계처럼 들리는걸요?”
꿈틀.
닉스의 그림자가 일순 일렁였다.
이 여신님은 갑자기 왜 흥분하는거야?
“에이, 농담도 잘하시네요.”
엘렌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는 윌리엄 록펠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엘렌 상무가 미스터 유에게 궁금한 게 있다고 하여 불렀지.”
윌리엄 록펠러의 입가 위로 미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반면 엘렌의 표정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서로의 분위기가 대조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미스터 유가 장 우페이를 죽였나요?”
“예.”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미국행을 결정한 순간부터.
엘렌이 장 우페이와의 은원을 물어볼 것이라고 짐작했다.
“바로 인정하실 줄은 몰랐어요.”
“예상은 했잖아요?”
엘렌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당황했을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
윌리엄 록펠러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난 반대로 생각했다만, 엘렌 상무의 예상이 맞아떨어졌군.”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놀란 기색이 전혀 없는데요.”
“경영을 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변수든 계산해야 하는 법이지.”
엘렌과의 대련 결과야 이미 알고 있을 터.
윌리엄 록펠러의 머릿속은 지금쯤 내 가치를 재평가하느라 복잡할 것이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제안 하나 하지.”
“말씀하시죠.”
“자네, 세계의 정상에 군림하고 싶은 마음 없는가?”
윌리엄 록펠러는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