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회귀(回歸).
시간을 되돌리는 일.
난 담담한 투로 시간을 되돌리기 직전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멸망의 시대.
성좌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대다수의 인간이 고신족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지구라는 차원의 근간, 다른 말로 에테르가 바벨탑에 흡수되었다.
한 폭의 지옥도가 강림한 차원의 말로.
-그래서 시간을 되돌렸구나.
“성공 확률이 엄청 낮은 도박이었지.”
쓴웃음이 입가를 물들인다.
인류 최강의 플레이어.
성좌와도 겨룰 수 있으며, 실제로 고신족 중 몇을 척살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포식 능력으로 시간과 관련된 성좌들의 정수를 모으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죽을 뻔했다.
흡수한 정수들이 시시각각 폭주를 일으켰으니까.
“강한 정수는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흡수했어야 했는데 그럴 여유가 있어야지.”
멸망해 가는 세계를 전전하며 성유물들을 하나씩 모았다.
그 정도로도 모자라서 인류 최후의 결사대가 바벨탑을 공략, 만신전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고신족들의 추격.
다른 차원 주민들과의 충돌 등.
첩첩산중의 위기를 넘어서면서 고신들의 성유물을 보관한 장소, [황혼의 제단]에 도달했으니.
당시, 우리한테 남은 시간 따위는 없었다.
-회귀라는 이적. 참으로 놀라운 비밀이로구나.
“일찍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닉스와 파트너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회귀의 결과물.
원 역사에서는 브라질의 하이 랭커인 안토니오가 [그림자 보주]의 주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갈 기회를 낚아채고 닉스를 만나게 된 거니까.
“실망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여신님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
닉스는 대꾸하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을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참 외로웠겠구나.
닉스가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앙증맞은 손.
뭔가를 얹었다, 라는 감각이 겨우 느껴질 정도였지만 나한테는 그 무게감이 유독 컸다.
-계약자의 어깨에 얹어진 짐이 이렇게나 무거운 줄 알았더라면 여가 더 힘이 되어 줬을 터인데.
“섭섭하지는 않아?”
-후훗, 무엇이 말이더냐?
“따지고 보면 여신님을 속인 거잖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꾸나. 그대가 미래에서 본 여의 모습은 어떠했느냐.
“여신님은 없었지.”
-그대가 여의 잠을 깨웠다는 건, 회귀 전에도 동일한 일이 있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만.
“원 역사에서 성유물의 주인은 극야가 아니라 그림자의 힘을 다뤘거든.”
그림자 보주.
밤 그 자체인 닉스의 힘보다 한 단계 아래인 그림자를 다루게 해 준 아티팩트다.
안토니오는 극야의 마이너 카피나 마찬가지인 그림자의 힘으로 브라질의 하이랭커가 되었다.
-하면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편한 식으로 받아들이는 거잖아.”
-둔한 사내로고. 이럴 때만 배려심이 넘치는구나.
“왜 갑자기 둔하다는 건데?”
-그대와 여를 이어 준 계기가 회귀라면 싫어할 리가 없지 않느냐.
난 입을 뻥끗거렸다.
말문이 막혀서 어떤 단어든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안 나왔다.
훅, 후욱.
연달아 숨을 쉰 후에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아, 아니, 그게 말이지.”
-호오, 당황하였느냐? 여는 진심이다만.
“누구라도 그런 이야기를 갑자기 들으면 당황할 거다.”
프로토게노이, 개념신의 영역에 다다른 신이 이렇게 말하다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시시한 남자로고.
“또 왜.”
-여의 마음을 듣고 할 말은 그게 전부더냐?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한 줄 알겠다.
닉스는 위대한 밤의 여신.
한낱 필멸자인 날 두고 그런 생각을 가질 리는 없다.
그럼에도.
닉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 만한 말이다.
그 진심에 대답해야겠지.
“나도 여신님을 알게 된 건 기뻐. 회귀 후에 겪은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
-후, 후후훗, 진심이느냐?
“그러니까 내 비밀도 공유했지.”
-참으로 기쁘구나.
닉스가 활짝 웃었다.
미소 하나로 방 안이 환해지는 느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 * *
장 우페이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엘렌 테일러와 함께 플레이어 중 최강으로 손꼽혔던 인물.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장 우페이가 사망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역천 길드에서 피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게 추가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거세졌다.
“스승님, 이거 보세요. 장 우페이가 스승님한테 패배했다는데요?”
“기자 양반이 통찰력 하나는 엄청나네.”
나는 짧게 웃었다.
지영이가 보여 준 기사 아래에는 온갖 욕설이 달려 있었다.
└ 다이아몬드 플레이어가 골드한테 졌다고? 에라이.
└ 소설도 적당히 써라.
└ 이게 소설이면 개연성 없다고 욕먹겠네.
점잖은(?) 댓글이 이 정도이니 말 다 했지 뭐.
중국 랭킹 1위의 사망.
현지에서도 그 반향으로 길드들끼리 세력다툼이 거세졌다고 한다.
주인을 잃은 구룡방은 빈집이나 마찬가지.
유력 플레이어 중 일부는 이미 다른 길드에 접선하는 중이라나.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핑 레이.”
“흥! 내가 대형의 곁에 있었으면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면 시험해 볼래?”
오른손을 까딱이자 핑 레이가 질색하면서 물러났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핏빛 도취를 사용합니다.]
손가락에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
뒤로 물러나던 핑 레이가 자석처럼 홱 당겨졌다.
“예고도 없이 공격하는 건 너무하지 않소?!”
기를 휘감은 봉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시험하자고 했잖아.”
극야의 힘을 전개.
봉의 궤도에 간섭해서 흘려 내고는 활짝 열린 핑 레이의 복부를 가볍게 찔렀다.
퍼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핑 레이. 훈련장에 설치해 둔 방어 마법이 발동하면서 큰 부상을 면했다.
“우웩!”
“심하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 피우긴.”
길드원들은 둔황 사막의 혈투 이후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데 괜찮겠느냐? 그대가 알고 있는 미래와 달라졌을 터인데.
“응. 그 녀석은 원래 멸망의 시대까지도 살아남거든.”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 장 우페이.
자국과 구룡방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 때문에 모든 인류가 힘을 모으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었다.
그뿐이랴.
핑 레이를 후원, 녀석이 블랙 네트워크 상당 부분을 장악하는 데 힘을 실어 주기도 했고.
“놈은 갱생도 불가능했어. 기회가 될 때 죽이는 게 나았지.”
-미래가 바뀐다고 해서 반드시 나아지리라는 법은 없단다. 운명이란 이름의 아이러니하지.
“아니. 더 나아질 거다.”
난 확신을 담아 말했다.
회귀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원 역사에서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 암흑가를 주름잡는 거물, 핑 레이는 갱생해서 정통 무인으로 거듭나고 있고.
군주이자 인류의 적이었던 엔리케도 잘못된 길을 벗어났다.
“모든 사람을 바꿀 순 없어. 그래도 지금까지는 더 나아졌잖아.”
-후후훗, 자신만만하구나. 과연 여의 계약자다운 패기다.
“난 원래 이랬어.”
-보기 좋도다. 앞으로도 그 모습, 변치 말거라.
시시각각 변해 가는 미래.
닉스의 지적대로 회귀 전의 정보로 이득을 취하는데도 한계가 올 것이다.
장 우페이의 죽음과 구룡방의 몰락이 가져올 여파.
원래의 역사를 아는 나조차도 쉽게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큰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꼭 모든 정보를 쓸 수 없는 건 아니다.”
-생각해 둔 것이 또 있느냐?
“투자할 곳이 있어.”
레이언사.
회귀 전, 공간 도약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다.
원래는 10년 뒤에나 상용화되어서 전 세계에 워프 망을 설치하겠지만.
이번 생에서는 좀 다를 거다.
난 곧바로 엘렌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기음이 끊어지는 순간.
-장 우페이를 죽인 거, 미스터 유 맞죠?
격앙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엘렌 상무님, 진정하시죠.”
-잠깐만요. 내가 지금 릴랙스하게 생겼나요!?
“여기나 그쪽이나 듣는 귀가 많을 건데요.”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흥분하면 앞뒤 안 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먼.
-죄송해요. 마음이 앞서서 실례를 저질렀네요.
“사과받으려고 전화한 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죠.”
-좋아요. 그 대답은 승부를 내는 걸로 듣고 싶군요.
엘렌의 목소리가 호승심으로 달아올랐다.
두 달 전. 서로의 전력을 다한 대련에서 승부를 내지 못했었다.
그녀가 장 우페이 사망의 배후에 내가 있다고 짐작하는 것도 대련 때문이겠지.
나랑 주먹을 맞댈 생각으로 흥분하다니. 참 한결같아.
“안 그래도 상무님을 조만간 뵈어야 할 것 같은데 잘됐군요.”
-저를요? 미스터 유가?
“미국 기업, 레이언사에 투자를 하고 싶어서 말이죠.”
-흐으응, 전 골드 문의 상무랍니다. 투자 건이면 펀드매니저한테 문의를 해야 하지 않겠나요?
“단순하게 투자만 하는 거라면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금쯤 엘렌은 내가 말한 기업의 정보를 찾아보고 있을 터.
30초 정도 텀을 둔 뒤, 다시 입술을 떼었다.
“제 전 재산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레이언사 CEO와 만나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는 회사인지 모르겠는데요.
역시, 벌써 조사를 다 마쳤군.
이러면 대화하기가 편해지지.
“제가 감이 좋아서. 어렵겠습니까?”
-호호호, 골드 문의 저력으로는 어려울 것도 없죠. 오히려 레이언 사에 말해 주면 두 팔 벌려서 미스터 유를 환영하겠네요.
“그럼 대리인으로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곧 뉴욕에서 뵙겠네요. 미스터 유와의 재회, 기대하고 있을게요.
뚜, 뚜.
바로 끊어진 통화.
나랑 다시 겨룰 때를 기다리며 훈련이라도 하러 갔나 보다.
바뀌어 가는 미래.
그 흐름을 내 쪽으로 당기기 위한 첫 행보는, 레이언사 투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