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이글거리는 화염.
한껏 달구어진 공기가 차가운 기류와 만나면서 풍경이 일그러진다.
그 사이로 진땀을 흘리는 플레이어 무리.
“화염의 위력은 강하지 않다.”
“차근차근 놈의 숨통을 조여라!”
모래 위에 일렁이는 화염을 밟으면서 천천히 나아간다.
-그 화염으로는 조금 모자라 보이는구나.
“테스트야, 테스트.”
저벅, 저벅.
검수들이 한 걸음을 떼면, 모래 위를 뒤덮은 불길이 사그라진다.
걸음을 뗄 때마다 요동치는 진법의 기.
나는 차분하게 검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를 읽어 냈다.
창천검진의 성취를 가늠하려면 놈들을 움직이게 하는 게 최고거든.
“2성에서 3성 정도인가.”
-갓 배운 수준이구나.
“검진이라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
같은 무공, 그리고 심법을 익혀도 내공의 파장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개개인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습관이 조금씩 다르고, 호흡을 내뱉는 타이밍도 제각각이다.
그래서일까.
진법, 그것도 무인이 축이 되는 ‘검진’ 같은 진은 성취를 올리기가 매우 어렵다.
“봐, 걸음 떼는 것도 힘들어하잖아.”
검수들을 보며 손가락질했다.
“적당하게 거리만 두면 된다는 말씀.”
-참 편하게 말하는구나.
회귀 전의 경험.
창천검진의 허와 실을 알기에 보이는 틈이다.
말처럼 쉽진 않다.
검수들과 직접 충돌하는 걸 피해도 진 안에 감도는 무형의 기파가 끊임없이 나를 위협하고 있으니까.
카각!
메탈 반사 장갑을 온몸에 두르지 않았으면 지금쯤 피칠갑이 되었을걸?
블레이즈를 해제, 여전히 전력 질주를 유지하면서 극야의 힘을 실체화시켰다.
여러 갈래로 흩어지면서 검진을 파고드는 암흑 칼날.
검진에서 솟구친 기파가 암흑 칼날을 뭉개 버린다.
-쯧, 여의 어둠을 이리도 쉽게 지워 낼 줄이야.
“내가 부족한 거지.”
-힐난하는 것이 아니니라. 고작해야 필멸자들의 기예일진대, 약한 자들이 힘을 모아 강자를 핍박하는 것이 기이하여 그런 것이거늘.
암흑 칼날을 지워 낸 직후.
검수들이 일제히 종으로 검을 휘둘렀다.
[창천검법 - 1초식]
[창천]
“큭.”
무형의 압박이 전신을 짓누른다.
검진 축에서 거리를 20미터 이상 두고 있는데도 충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면으로 부딪쳤으면 팔 하나는 내놨을 만한 위력.
수북이 쌓인 모래가 퍼엉- 하는 충격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날린다.
-여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아직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피.
퉤, 하고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내면서 다리를 움직였다.
“놈은 검진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 압박해라!”
검수들의 목소리에 활기가 감돌았다.
30 대 1로 싸우면서 졸아 있기는.
그 덕분에 승리의 열쇠는 모두 모았다.
“잘 알았다, 너희들의 수준.”
나는 엄지를 치켜들고는 아래로 내렸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욕망의 주머니에서 [아르스 게티아]를 꺼내고 바르바토스의 철퇴 주문이 기록된 페이지를 펼쳤다.
검진 성취에 따른 이동속도는 일반인이 걷는 수준.
극야의 힘으로 견제하자 발동에 시간이 필요한 검격까지 사용했다.
즉.
“이 주문을 완성시킬 시간은 충분해.”
[데모닉 파워를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공허 비추기를 사용합니다.]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가 구현됩니다.]
기묘한 탈력감.
반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말끔했다.
“여신님.”
-그대는 참으로 무모한 사람이니라.
호문쿨루스의 육체로 현현한 닉스가 극야의 힘을 넓게 펼쳤다.
연신 허공에서 충돌하는 극야와 검진의 기파.
모든 능력치를 마력으로 치환했기에, 작은 충격도 위험하다.
“캬오오오!”
렉시도 이를 드러내면서 기파에 맞섰다.
이미 큰 공격 하나는 흘려보냈으니, 다음 검격까진 시간이 있다.
암흑 마나를 책에 부여하자, 새카만 철퇴가 허공에 생성되었다.
72마신의 힘을 빌린 주문.
손을 휘젓자 하늘에서 땅으로 낙하했다.
“막아라!”
“방어 검진!”
바르바토스의 철퇴가 푸른 기파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검진이 들썩거릴 정도의 커다란 충격.
“흐아아아아압!!!”
푸른 핏줄이 검수들의 이마 위에 솟구쳤다.
증폭되는 기파가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찢어발기기 시작한다.
산봉우리조차 두부처럼 으깰 수 있는 마신의 힘이 검진을 이겨 내지 못했다.
“이딴 사술로는 검진을 무너트리지 못한다.”
“하나로 합쳐진 우리의 힘을 얕보지 마라!”
응. 얕본 적 없어.
그러니까 두 번째 마법을 바로 준비했지.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시간차로 완성된 구체.
바르바토스의 철퇴는 아르스 게티아에 암흑 마나를 부여하기만 해도 완성되기에, 암암리에 마력을 재배열했다.
“이것도 받아 낼 수 있을까?”
검수들의 정수리 위에 떠오른 구체가 폭발을 일으켰다.
* * *
『핏빛 하늘의 주인이 당신을 질책합니다.』
『핏빛 하늘의 주인은 계약자를 잘못 골랐다며 한탄합니다.』
뇌리에 직접 꽂히는 음성.
장 우페이는 배후성인 ‘핏빛 하늘의 주인’의 한탄을 들으면서 분노를 삼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첫 교전인가.’
진호의 전투 스타일은 다재다능, 다른 각도로 보면 결정력이 모자랐다.
구룡방에서 분석한 결과다.
그렇기에.
장 우페이는 진호를 도발할 겸, 예봉을 꺾으려고 강기를 펼쳤다.
혈천수라공의 공능으로 한계 이상 끌어올린 힘.
61층 너머, 다른 차원 종족과 경쟁할 때에도 유용했던 강력한 공격수단이다.
그랬을진대.
‘내 강기를 베어 냈다.’
암영추혼검과 주먹을 맞대는 순간.
장 우페이는 진호의 검기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법으로 일으킨 강기.
그와 마찬가지로.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사도(邪道)의 길을 밟은 경지 이상의 힘!
만약 장 우페이가 신준석처럼 깨달음을 얻어서 강기를 펼쳤더라면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공에서 ‘경지’가 가져오는 차이는 그만큼 컸으니.
편법 대 편법이 부딪치는 순간, 붉은 강기가 잘려 나갔다.
허공을 수놓는 핏방울들.
칼날이 베고 지나간 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격통 속에서도, 장 우페이는 역공을 준비했다.
대부분의 내공과 혈류를 소모해서 펼칠 수 있는 사술.
혈신과 혈폭을 펼쳐서 위기를 벗어나는 동시에 진호에게 강력한 일격을 먹였다.
아니.
먹였어야 했다.
‘혈폭에는 공간 이동에 간섭하는 이능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공간 도약으로 유유히 혈폭의 범위에서 벗어난 진호.
도리어 혈신으로 위치를 이동한 자신을 노리려고 구룡방 집단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아니, 오히려 잘된 거다.’
창천검진.
60층대 공략을 하던 중에 얻은 무공 비급이다.
장 우페이는 플래티넘 등급 무인 중에서 정예 30명을 선출, 창천검진을 익히게 했다.
검진의 진가는 강자를 상대할 때!
원래 창천검진을 준비한 건 엘렌 테일러, 혹은 신준석과 홍윤수 같은 랭커들을 대비해서였다.
하지만.
진호의 무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스스로 거리를 좁혀 준 덕에 검진을 펼칠 조건까지 충족되었다.
[창천검진 - 개진]
검진이 성공적으로 펼쳐지면서 진호의 운신을 제한했다.
창천검진의 범위에서 벗어나려면 검수 전원과 내공을 겨루어야 한다.
아니면 진법 축이 되는 검수들의 자세를 무너트리거나.
‘창천검진은 나조차도 1분을 버틸 수 없다.’
장 우페이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비죽거리는 사내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왜일까.
그리고 구룡방에서 자랑하는 창천검진의 검수들이 반 이상 쓰러져 있는 건 또 무슨 이유일까.
장 우페이는 순간적인 환경 변화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씨X.”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욕설.
늘 냉소적이던 장 우페이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온 것이다.
바르바토스의 철퇴에 이어 솔라 익스플로전까지.
진호가 연거푸 사용한 두 광역 마법은 창천검진을 힘으로 짓눌러버렸다.
고유 능력인 포식으로 늘어난 비상식적인 스텟.
다이아몬드 등급 랭커조차 압도하는 능력치를 [데모닉 파워]로 모은 후, 상위 공격 마법을 퍼부으니 30명이 힘을 모은 검진조차 당해 내지 못했다.
“으으윽…….”
“대형, 대형!!!”
“파, 팔이 녹아내렸어.”
솔라 익스플로전의 폭발에 가루가 된 인원이 7명.
폭발의 여파에 전투 불능이 된 숫자가 9명.
창천검진 구성원 중 반 이상이 마법 두 번을 버티지 못했다.
근방을 뒤덮고 있던 푸른 기파가 사라진다.
‘창천검진이 깨어졌다.’
장 우페이는 윗니로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검진의 최소 구성 인원은 15명.
솔라 익스플로전의 폭발에 휘말려서 과반수가 당한 상황이니, 검진을 다시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이 괴물이!!!”
검수 한 명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지만.
“참으로 천박한 움직임이도다. 겁에 질려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몰골이란…….”
닉스의 손짓 한 번에 제압당했다.
“이야, 우리 대형, 헌혈이 좀 필요한가 봐?”
진호의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핏빛 하늘의 주인이 당신에게 분노합니다.』
『핏빛 하늘의 주인이…….』
장 우페이는 성좌와의 연결을 끊었다.
실망이고 뭐고, 이 위기를 벗어나야 다음이 있는 법.
검진을 이루던 검수들은 이미 전의를 잃은 채 두려움을 떨치려고 칼을 휘둘렀고.
바깥에 있는 길드원들은 진호를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
장 우페이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떼었다.
“……유진호.”
“목소리가 좀 작네. 우리 구룡방 길드장님이.”
양손을 오른쪽 귀에 갖다 대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진호.
장 우페이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렁였지만, 그걸 입으로 내뱉진 않았다.
“거래를 하자.”
“거래?”
“날 죽인다고 한들, 네 길드원들도 모두 이 자리에서 무사히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구룡방의 숫자는 100명.
진호 쪽에 절반, 나머지 반은 역천 길드원들 공격에 투입했다.
“너희 길드원들이 무사하길 바라면…….”
“아, 그쪽이라면 이미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진호는 느긋하게 뒤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무심코 바라본 장 우페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는 구룡방 길드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