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서걱!
피보라가 허공을 붉게 물들인다.
편법으로 결합한 검기 다발이 혈천수라공으로 빚어낸 강기를 베어낸 데서 그치지 않고, 장 우페이의 몸뚱이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커흑!”
한 줄기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 떨어지는 사내.
장 우페이가 낙화처럼 땅에 저문다.
“대형!”
“아, 아아!!”
구룡방 소속 플레이어들이 태산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뼈가 훤히 드러난 중상이니,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아직 부족해.”
난 지면을 박차면서 장 우페이가 떨어지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처음부터 정면을 고집해 준 덕에 생긴 절호의 기회.
여기서 장 우페이를 죽이면 구룡방 집단과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올 수 있다.
구룡방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면 불가능할 테니.
빨리 손을 써야지.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바람길을 사용합니다.]
잠깐 어둠의 육체를 해제하는 동시에 바람을 밟으면서 장 우페이의 근처로 이동, 다시 한번 암흑 칼날을 휘둘렀다.
미스릴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
편법으로 한데 묶은 기가 제자리를 이탈하려 하기에, 휘두르는 것조차 벅찼다.
푸아아아악!
허공에 흩뿌려진 피가 암흑 칼날에 들러붙는다.
끈적이는 피.
혈천수라공의 다른 활용 방법이다.
억지로 결합했다지만 칼날에 깃든 힘은 강기, 손목에 힘을 더 줄 것도 없이 피 그물이 베어진다.
“잔재주를 부리네.”
장 우페이가 번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놈의 몸뚱이를 베려는 순간.
[혈신(血身)]
[혈폭(血爆)]
핏덩이처럼 변한 장 우페이의 몸뚱이가 폭발을 일으켰다.
-저자가 터져 버렸느니라!
“안 죽었어.”
혈신은 피를 섞은 내공으로 육체를 만드는 동시에 위치를 바꾸는 비술.
순수 무공은 아니고 혈교의 사술을 섞은 기예다.
혈신을 사용한 직후, 장 우페이의 몸뚱이가 수십 미터 떨어진 구룡방 집단 한가운데로 이동되었다.
부적 같은 걸로 미리 술법을 준비해 놨겠지.
100명이나 이끌고 와서 저렇게 수작을 부리다니.
“사술이다!”
그래.
이 말, 꼭 한 번은 해 주고 싶었다.
매번 듣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당하는(?) 입장이 되니까 찰지잖아.
폭발 진원지에서 멀지 않은 거리.
극야의 힘으로 몸을 감쌌지만, 붉은 기운이 어둠을 찢어 내며 점점 가까워졌다.
제길.
여신님 수준으로 극야를 다루면 뚫리지 않을 것 같은데.
혈천수라공의 마기는 집요하다.
특히 저 혈폭은 강기를 몇 겹으로 덧댄 수준의 위력을 자랑했다.
암영추혼검으로 베어 버린다 한들, 피가 폭발하면서 나온 기운을 해소할 수는 없다.
-위험하도다!
뭘, 이 정도로.
그렇다면.
어둠의 육체를 해제하는 순간 1/5로 약해진 극야를 찢어발기면서 폭발하는 혈기가 눈앞에 엄습했다.
[뇌둔의 술 - 뇌망을 사용합니다.]
암암리에 끌어올린 선력을 넓게 흩뿌렸다.
마구 팽창하는 붉은 기운이 번개 그물에 걸려서 한순간 움찔거린다.
[축지를 사용합니다.]
[혈천수라공의 기가 당신을 속박합니다.]
[축지의 효능으로 속박을 무시합니다.]
공간 사이를 접는 신묘한 기예.
축지로 위치를 빠르게 접어서 공간을 이탈했다.
등 뒤에 아른거리는 붉은 잔광.
혈류 폭발은 반경 수십 미터를 휘감았다.
“크으, 으으으!!”
새하얗게 질린 장 우페이가 떨리는 손으로 날 가리킨다.
그래.
내가 축지로 이동한 장소는 혈신으로 몸을 뺀 장 우페이의 옆이자, 구룡방 집단 한가운데였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발에 힘을 주기만 하면 놈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는 상황.
육감의 번뜩임에 발을 휘두르지 못하고 한 치 물러났다.
“네놈! 감히 대형을 노리다니!”
“잘됐다. 우리 진 한가운데로 들어왔으니 그 목숨을 놓고 가야 할 것이다!”
당황한 틈을 노렸는데 쉽지가 않군.
-무리를 한 보람이 없구나.
“저래서는 어차피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해.”
혈신과 혈폭. 둘 다 내공과 사용자의 피를 대량으로 소모하는 기예다.
얼굴 하얘진 거 봐.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중국 최고 랭커인 장 우페이를 무력화시켰으니 싸게 먹힌 장사지.
채채챙!
구룡방 집단 일부가 칼을 추켜세웠다.
[창천검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진법 구성원 외 인원이 공격을 펼칠 경우, 최종적인 위력이 20% 감소합니다.]
[검 사용 시 위력이 추가로 20% 감소합니다.]
검으로 유명한 남궁세가의 진법.
푸른 테두리가 반경 50미터를 뒤덮었다.
창천검진의 구성원은 총 30명.
-기운이 범상치 않구나.
“개개인의 능력은 모자라도 진법으로 보완하니까.”
-필부들에게도 쓸 만한 재주가 있구나.
“뭐, 그렇지.”
여기까지는 계획대로군.
남은 건 길드의 두 랭커님들한테 맡겨 볼까.
* * *
신준석은 허, 하고 짧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후배님, 저번 대련에서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군.”
“준석, 길드장님이 펼친 거, 강기 맞나?”
“아니라네. 하나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신준석의 이마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저 검이 나한테로 향했다면 어땠을까.’
떠오르는 건 하나의 가정.
죽음뿐.
“후배님을 따르기로 한 건 역시 잘한 것 같아.”
“큭, 그러게 말이야.”
두 랭커는 비슷한 웃음을 입술 위에 띤 채, 김영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 의미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김영수 지휘관.”
김영수가 사색이 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후배님이 지휘를 맡긴 건 당신입니다.”
“우린 길드장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으니까요.”
둔황 사막에 열린 게이트를 공략하기 전.
진호는 상황에 맞는 대응책을 미리 길드원들에게 공유했다.
손가락을 하나만 펴면 대기.
두 개를 펴면 대규모 접전이 벌어질 예정이니 김영수를 중심으로 버틸 것.
세 개는 근처에 매복이 있으니 진호가 게이트에 입장한 직후, 근처를 뒤져서 습격자들을 처리할 것.
제일 위험한 건 두 번째였다.
“우리는 하던 대로 팀원들을 이끌 겁니다. 전황을 볼 수 있는 건 영수, 당신뿐이오.”
“길드장님이 사전에 이야기를 했다지만, 당신의 능력이 모자랐으면 안 받아들였을 겁니다.”
중국으로 가기 전.
진호는 김영수의 지휘 능력과 넓은 시야, 그리고 판단력을 길드원들에게 공유했다.
지휘 능력은 등급을 크게 타지 않는다.
버프의 효능이야 차이가 있겠지만, 김영수가 전장을 읽는 시야 자체는 퇴색되지 않았다.
“아저씨, 우린 다 아저씨를 믿는다니까요.”
“길드장의 안목은 틀린 적이 없지. 당신이라면 믿고 따를 만하다.”
쭉 팀을 맺어 온 지영이나 핑 레이, 카를라도 응원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제 말을 따라 주십시오.”
김영수가 망설임을 떨쳐 냈다.
[군단 지휘를 활성화합니다.]
[소속 부대원의 투지가 상승합니다.]
[소속 부대원에게 고통 내성이 부여됩니다.]
[백인장이 통솔 중입니다. 투지가 대폭 상승합니다.]
…….
각종 버프가 길드원들에게 적용되었다.
김영수의 고유 능력인 [군단지휘], 그리고 [백인장]의 효과.
서포터 계열의 버프보다는 한 단계 낮은 효과지만 중첩도 되고 유지에 소모되는 마나가 없어서 유용했다.
“그럼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무극은 우측, 옐로우 스톰은 좌측을 맡아 주십쇼.”
양익을 맡은 두 랭커의 팀.
중심부는 역천 길드의 원년 멤버들이 맡는다.
말이 좋아야 중심이지, 실제로는 진호가 구룡방 본진을 타격하는 동안 양쪽을 보조할 예비 병력인 셈.
김영수는 초조한 기색으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승부는 길드장님이 구룡방의 수뇌를 얼마나 빨리 무너트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망치와 모루.
고대 전쟁 때부터 쓰인 고전적인 전술이지만, 현 시대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진호가 적을 때리는 망치.
남은 길드원들은 공세를 버티는 모루의 역할이다.
한발 늦게 움직인 구룡방 집단.
김영수는 [백인장]의 능력으로 전장을 다각도로 보면서 전투를 지휘했다.
* * *
장 우페이가 중상을 입으면서 시작된 전투.
뒤를 힐끗 바라봤다.
양 날개를 펼쳐서 구룡방 집단과 겨루고 있는 역천 길드원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이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지만, 수적 열세에도 밀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믿고 움직일 수 있겠어.”
-한데 움직일 수 있겠느냐?
닉스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창천검진의 구성원은 30명.
검진을 이룬 플레이어들의 내공이 날 압박한다.
진 중심에 있는 장 우페이.
주먹 한 번만 내지르면 목숨을 끊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안 좋았지만, 다가갈 방법이 없다.
몇 번이나 진을 돌파하려고 했어도 허사.
검진에 다가갈 때마다 칼날 세례가 쏟아지는 탓에 장 우페이를 노리는 게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지.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난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흥. 중화민족의 얼이 서린 이 검진을 돌파하겠다?”
“여태 손 하나 까딱 못 해 놓고 허세 한번 잘 떠는구나.”
검진을 이룬 플레이어들이 조롱기 섞인 목소리로 크게 떠들었다.
창천검진.
구성원 모두가 [창천검법]을 익혀야 펼칠 수 있는 절정급 진법이다.
검진 구성원들의 내공 일부를 진법에 녹여 내서 어느 쪽과 충돌하든, 전체의 내공과 부딪치는 공방일체형의 진.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날카로운 검기에 전신이 난도질당할 것이다.
-그대라면 저 공세에도 버틸 수 있지 않겠느냐?
“팔이랑 다리 하나씩은 줘야 할걸.”
창천검진과 정면으로 부딪쳐서 버티는 게 문제가 아니다.
검진의 기세를 흩트린다 한들, 진법을 구성하는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다시 검진을 펼칠 수 있다.
“창천검진이면 15명이 최소 인원일 거야.”
-절반이라. 쉽지 않겠구나.
“시간만 충분하면 공략할 수 있어.”
그래.
앞에서 말한 건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받아쳤을 때의 이야기.
창천검진을 펼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전력 질주를 사용합니다.]
[블레이즈를 사용합니다.]
스킬을 사용하면서 있는 힘껏 달렸다.
단, 그 방향은 검진이 아니었다.
검진을 이루고 있는 플레이어 무리를 빙글빙글 돌자, 발끝에서 솟구친 불길이 검진을 감싸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멀뚱멀뚱 서 있을지 한번 시험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