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둔황 사막에 열린 골드 등급 게이트 폐쇄.
한수창은 중국 정부의 의뢰 내용을 모두 보여 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전에 팀장님 의견을 묻고 싶은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정부에서는 중국에 큰 빚을 지울 기회라고 판단, 협회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압박이라.”
나는 빙그레 웃었다.
협회와 정부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
“협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쇼.”
“그럼 역시 거절하는 걸로…….”
“진행하셔도 됩니다.”
“예?”
“이번 일. 구룡방이 배경으로 있을 겁니다.”
“핑 레이 영입 건 말이군요.”
한수창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진호 님, 이번 의뢰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일지도가 아니라 100% 함정입니다.”
“그걸 아시면서 왜 진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함정은 그 노림수를 아는 순간, 더 이상 함정이 아니니까요.”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껏 초대해 줬는데 안 가면 서운하잖아?
“대담하시군요.”
“협회장님한테는 조금 기다려 달라고 해 주십쇼.”
“역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신 겁니까?”
“고민은요, 무슨. 함정인 줄 알면 이쪽도 준비해야죠.”
나는 슬며시 웃었다.
한수창이 다녀간 후, 곧바로 길드원들을 소집했다.
길드에 이름을 올려놓은 옐로우 스톰과 무극 팀원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공간.
셋으로 나누어진 무리가 서로를 흘겨본다.
“와, 옐로우 스톰 분들이야! 카를라야, 같이 사인 받으러 가자.”
“흥미 없어.”
“그러지 말고. 혼자서는 부끄럽단 말이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흥분해 있는 지영이를 빼고는.
홍윤수와 신준석.
두 사람은 내기에서 진 후, 팀원들까지 길드에 가입하게 했다.
내기 결과라지만, 팀원 개개인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상황.
되도록 옐로우 스톰과 무극 팀원들을 부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물과 기름 같구나.
“이제부터는 달라져야지.”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길드원들의 이목이 쏠렸다.
“한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군요.”
“후배님, 우릴 전부 호출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선배님.”
나는 신준석의 말을 긍정하며 중국 정부의 의뢰 내용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옐로우 스톰과 무극.
두 팀원들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으로 물들었다.
설명을 마치자, 홍윤수가 손을 들었다.
“예, 말씀하시죠.”
“길드장님, 중국 정부의 의도가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럴 겁니다. 아마, 구룡방이 정부의 협조를 구해서 만든 함정이겠죠.”
웅성웅성.
길드 하우스 로비가 술렁인다.
구룡방의 위세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 3대 길드도 한 수 접어 줘야 할 만큼 커다란 길드.
길드 마스터인 장 우페이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로 명성이 드높았다.
“후배님,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건 중국의 제안을 받겠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선배님.”
“무모하군. 과연 후배님다워.”
신준석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노림수를 금방 알아채는군.
“여러분의 힘을 빌리고자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젓는 홍윤수.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구룡방에서 작정하고 만든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예.”
“상대는 구룡방, 그리고 장 우페이입니다.”
“길드 전원의 힘을 합치면 못 이겨낼 것도 없죠.”
홍윤수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저, 그리고 신준석. 두 랭커들의 합공을 버틴다면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팀장님. 역천 길드장님이 요새 명성을 떨친다지만 두 분이 합공하면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팀원 한 명이 홍윤수를 말렸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랭커와의 대련.
언뜻 보기에는 즉흥적이며, 무모해 보이는 제안이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두 랭커를 따로 불러내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이상한 부탁을 하나 했더니, 아주 터무니없는 일을 벌였어.”
“선배님이 운을 띄워 주신 덕분이죠.”
“바람 잡은 건 저입니다. 잊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홍윤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두 랭커하고는 사전에 이야기를 마친 상황.
놀랍게도, 신준석과 홍윤수는 팀 위주의 운영에서 역천 길드로 병합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희망했다.
“선배님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 걸 싫어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귀찮은 거지. 그렇지만 후배님 곁에 있으면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길드장님은 원석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 것 같더군요.”
홍윤수가 첨언했다.
그럴 만도 하지.
이지영, 핑 레이, 엔리케 같은 인물들은 모두 최상위 플레이어의 자질을 지닌 이들이다.
회귀 전의 역사로 인증된 사실.
저 두 사람의 시선에는 내 안목이 뛰어나 보이겠지.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 걸로 대신 답했다.
옐로우 스톰과 무극 팀원들의 의견을 하나로 묶는 대련.
대련 무대는 과거 엘렌과 전투를 펼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인도였다.
-호호호, 이런 식으로 도움을 드릴 줄은 몰랐네요.
엘렌 테일러의 웃음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10대 마경 중 하나가 된 세인트 헬렌스 화산 근처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한다.
“뭐, 건질 만한 건 있습니까?”
-잿더미, 그리고 괴물. 그것뿐이죠.
“마경 근처로 다가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미스터 유가 퉁구스카에 자리 잡은 마경에서 얻은 정보 말인가요?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그 말을 100% 신뢰하지 못해요.
10대 마경이 나타난 곳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다른 곳들이야, 인구가 밀집해 있지 않은 지역들이라서 큰 피해가 없었지만.
미국은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시애틀, 그리고 주 하나를 상실했다.
-탑 공략도 시원찮아서 힘든데 말이죠.
“시간이 되면 마경 공략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빈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엘렌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빈말 같은 게 아닌데.
세인트 헬렌스 화산에 생성된 마경.
일명 [종말의 화산]에서 얻을 수 있는 정수가 있거든.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정수를 얻기도 전에 불타 죽겠지만.
몇 가지 정수를 미리 포식해 두면 종말의 화산이 내뿜는 열기도 버틸 수 있다.
골드 문에서 파견된 결계 전문가들.
저번처럼 무인도를 통째로 대여, 수십 겹으로 결계를 발동시켰다.
대련 전.
신준석과 홍윤수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몸을 풀었다.
“정말 두 랭커를 상대한다고?”
“유진호 씨, 이제 골드 등급 아니던가.”
“승급전 영상을 보면 논외의 실력이긴 해.”
“그래도 그렇지. 난 우리 팀장님이 질 것 같지 않은걸?”
“반만 가도 대단하지.”
옐로우 스톰과 무극.
두 랭커와 호흡을 맞춰 온 팀원들은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선배님, 팀원들은 제가 질 것 같다고 하는데요?”
“그런 말로 내 마음이 느슨해질 것 같은가.”
신준석은 훗, 하고 짧게 웃었다.
정갈한 흰색 도복.
방어구의 역할을 거의 못 할 것 같은 형태이지만, 그의 내공에 반응하는 레전드 등급 아티팩트다.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미.
홍윤수도 양발에 각반을 착용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준비했던 대로 가세나, 윤수!”
“알겠어. 호흡은 이쪽에서 맞추지.”
두 사람은 비장한 표정과 함께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럽쇼.
이번 대련, 작정하고 준비한 모양이네.
-여의 도움은 필요 없느냐?
“축복은 다음에 걸어 줘.”
밤의 축복은 강력한 버프기.
하지만 이번 대련에서는 닉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신준석과 첫 대련을 벌였을 때하고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그때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성장했는지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포식한 정수들로 버프 스킬을 사용한 후, 두 랭커를 바라봤다.
“시작하죠.”
“선배 된 도리로 3초를 양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군!”
투콰아아!
신준석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면을 찼다.
와, 둘이 합공하면서 선공도 양보를 안 한다고?
* * *
솟구치는 흙먼지.
발끝에 모인 내공을 방출하는 순간, 신준석이 서 있던 곳에서 흙먼지가 솟구쳤다.
호랑이를 마주한 것 같은 강렬한 살의.
수 미터 위로 떠오른 신준석의 등 뒤로, 대호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유형화된 기가 맺히면서 만든 범의 얼굴.
폭호신권이다.
“정면 공격은 너무 뻔한 거 아닙니까?”
도약하면서 펼치는 공격.
강한 만큼 공격의 궤도가 훤히 읽혔다.
아무리 강력한 초식이라고 한들, 안 맞으면 그만.
그 순간.
커다란 바람 줄기가 내 운신을 방해했다.
순식간에 구현된 회오리.
마력의 움직임을 읽는 순간, 이미 바람의 감옥이 구현되면서 온몸을 조여들었다.
“피할 수는 없을 거요.”
홍윤수의 발을 휘감고 있는 바람.
폭풍의 지배자라는 이명이 어울리는 절묘한 바람 컨트롤 능력이다.
두 사람. 처음부터 진심이군.
몸을 풀면서 은근하게 기운을 끌어올린 후, 대련을 시작하자마자 해방했다.
내 감으로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마나 컨트롤 능력.
역시 미래의 하이 랭커들 다운 실력이다.
감탄은 여기까지.
[백수제왕무 - 10초식]
[백택군림각을 사용합니다.]
내공을 실어 낸 발길질에 지축이 흔들린다.
축이 무너지면서 흐트러지는 바람.
홍윤수가 바람의 축을 잡으려고 재차 발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 자리를 이탈하면서 정면으로 뛰쳐나갔다.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하얀 권기.
한 수 빠른 발출 타이밍에 초식의 위력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이다.
“받아 보게!”
도로 물러났다가는 홍윤수가 일으킨 바람에 붙잡힌다.
이 순간에 이지선다를 걸다니.
“제법이군요. 선배님!”
바람의 흐름을 읽어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신준석이 내뿜는 기가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읽어 냈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드는 권기.
검은 내공이 쭉 편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싼다.
만물을 뒤덮을 정도로 큰 대붕의 날개.
그 움직임을 형상화한 초식이 손끝에서 펼쳐졌다.
광포하게 회전하던 하얀 권기가 대붕의 날갯짓에 휘말려서 옆으로 새어 나간다.
콰아앙!
하얀 기의 소용돌이는 지면을 할퀴면서 커다란 고랑을 팠다.
“새카맣게 어린 후배 상대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나는 짐짓 화를 내는 척 목소리를 높였다.
“전력을 다한 공격을 그렇게 피해놓고 할 말은 아니군, 후배님.”
“길드장님. 우린 진심으로 갈 겁니다.”
장난기를 쏙 뺀 목소리.
첫수를 주고받은 후, 두 사람의 눈빛이 한층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