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42층 서바이벌 미션.
압둘 일당을 모두 박살 낸 후, 나머지 플레이어도 쓰러트려서 단독 우승을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대결 지목 주문서를 사용합니다.]
[대상은 압둘 하마드입니다.]
처음 구매한 5장에 이어, 추가로 5장 더 샀다.
“이야, 고객님 너무 cp를 펑펑 쓰시는 거 아닙니까?”
“입에서 웃음이나 지워라.”
“히히, 들켰군요.”
그렇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모르냐.
-그대가 동료들을 그렇게나 아끼는지는 몰랐구나.
“아니거든요. 그냥 짜증나서 그래.”
-솔직하지 못하긴.
압둘의 움직임을 놓칠까.
게이트에도 들어가지 않고 길드 하우스에서 훈련 일정만 소화했다.
“아니. 사부를 도발한 건 그 겁 없는 놈인데, 왜 우리가 고생해야 합니까!”
핑 레이가 두 눈덩이가 보라색으로 물든 채로 항의했다.
“너는 훈련을 고생으로 생각하는구나?”
“아, 아니, 사부님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으시니…….”
“카를라,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아닙니다. 더 혹독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진한 독기가 카를라의 눈동자에 감돌았다.
“핑 레이야, 너도 이런 건 좀 본받아라. 그러니까 발전이 없지.”
“그거야 압둘인가 둘리인가 하는 놈한테 당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츠캉!
낫이 핑 레이의 목덜미에 아른거렸다.
“대련해.”
역시 원조 파멸의 조동아리야.
성능은 확실하네.
“흥, 사부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다.”
둘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길드장님께서 계시니 모두 훈련에 더 열정을 가지는군요.”
허허로이 웃는 토마스.
글쎄요.
이건 그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길드원들과 훈련을 하다가도 탑의 메시지가 오면 바로 미션을 진입했다.
42층에서 다시 한번 함정을 판 압둘 하마드.
탑의 규칙을 우회하면서 길드원 다수를 동원했지만.
[괴력을 사용합니다.]
콰득!
600% 강화된 주먹이 압둘의 가슴팍을 강타하자, 원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억울한 듯이 눈을 부릅뜬 압둘이 날 올려다본다.
“준비한 건 이게 전부냐?”
왈칵- 압둘이 입을 벌려서 뭐라고 하려는 순간, 붉은 피가 솟구치면서 말문을 막았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녀석.
탑 특성상 저층에서 고통을 더 못 주는 게 아쉬웠다.
압둘을 세 번 쓰러트리자, 그 다음부터는 접속을 회피했다.
걱정하지 마라.
저격할 건 너만 있는 게 아니거든.
[대결 지목 주문서를 사용합니다.]
[대상은 라시드 샤비브입니다.]
…….
레드 데저트 9영신.
회귀 전에 악명을 떨쳤던 놈들이라, 몇몇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협회나 블랙 네트워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명단이 있다 보니, 다른 녀석을 저격했다.
CP가 물밀듯이 빠져나갔지만 아깝지 않았다.
또 며칠이 지나자, 이젠 43층 위쪽 미션을 수행하면서 날 피했다.
이미 43층 이상 공략해 놓고 길드원들을 저격했다 그거지?
더 질이 나쁜 놈들이군.
1주 넘게 미뤄 놓은 탑 등반을 재개.
[43층 미션을 통과했습니다.]
[보상으로 황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황의 열쇠]
등급: 레전드
분류: 무기
내구도: 5,000/5,000
어떤 무기로도 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사용자가 지정한 무기로 변합니다. 무기를 구현하는 동안에는 무기의 내구도가 조금씩 감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됩니다.
지정 가능한 무기의 개수는 5개입니다.
성좌들의 개입으로 올라간 난이도에 걸맞은 아티팩트를 획득했다.
42층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들끼리 경쟁하는 구도라서 정수 포식을 못 했지만, 보상이 두둑한 게 어디야?
로엔그린의 창과 마찬가지로 현시대에서는 아직 풀리지 않은 아티팩트.
블랙 네트워크의 대리자인 영만 신났다.
“마담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씰룩이는 입가.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내 눈을 피해 가진 못했다.
플레이어 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물건이 나온다?
블랙마켓의 이름값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다.
한국 지부로서 밥값 이상으로 일해 주는 것 같네.
연달아 45층을 공략하려는 찰나.
한수창이 오래간만에 길드 하우스에 방문했다.
“요즘 한가하세요?
“보자마자 타박이라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특무대 바쁘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까 좀 다른 것 같아서 그렇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후, 한수창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진호 님, 중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쪽에서 왜요?”
“공략이 어려운 게이트가 있다더군요. 향신료 제도의 영웅께서 나서 주십사……”
중국이 자국 플레이어들을 동원하지 않고 외국의 힘을 빌리려 한다?
이거 냄새가 나는걸.
난 입술 한쪽을 말아 올리면서 중국 대사관의 제안을 들었다.
* * *
둔황 사막.
먼 옛날에는 동양과 서양의 교두보인 실크로드로 불렸으며, 지금은 관광지로 사랑받는 지역이다.
뙤약볕 아래를 거니는 인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태양빛을 여과 없이 지면에 보냈고, 모래가 그 열기를 반사시켜서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훌륭합니다.”
압둘 하마드.
세트의 계약자는 양팔을 위로 추켜세웠다.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피부.
그는 사막의 열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면서 움츠러들지 않고 도리어 기뻐했다.
시커먼 터번으로 얼굴을 감싼 사내.
구룡방의 대형이자 중국에서 제일가는 플레이어, 장 우페이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번 계획을 수립하려고 많은 것을 지불했다.”
“이번 계획은 위대한 의지를 따르는 일. 성좌 분들께 생색을 내시는 겁니까?”
“대규모 계획은 두 번 이상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은연중에 솟구치는 기.
무형의 힘이 장 우페이의 꽁지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본국에서는 이번 일이 타국에 안 좋은 선례로 비쳐질 것을 신경 쓰고 있다.”
세계 제일의 인구를 자랑하는 국가, 중국.
인구가 많은 나라는 상대적으로 탑의 초대장이 덜 발송된다지만 숫자가 원체 많다 보니 플레이어 규모도 엄청났다.
민주주의 사회하고는 다르게 사회 통제도 훨씬 수월한 체계다.
그 덕분에 1차 대침식 때도 플레이어들을 수월하게 동원.
여러 국가가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에 흔들릴 때 위기를 금세 극복하기도 했다.
“구룡방의 대형께서는 고작 위정자들의 눈치가 두려운 겁니까?”
“대국을 얕보지 마라.”
장 우페이의 눈가 위로 스산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훗, 인간이 만든 시스템보다 위대한 성좌를 섬기시는 게 어떨는지.”
“헛소리를 더 지껄이면 그땐 성좌의 힘이고 뭐고 없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압둘 하마드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보다 더 이상적인 존재.
성좌가 실재하며,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시대인데도 구시대적인 국가관에 사로잡힌 장 우페이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주인의 뜻을 시행하는 것이 우선이다.’
시니스터 소속 성좌들의 총의.
진호를 쓰러트리려면 장 우페이와 손을 잡아야 한다.
그뿐이랴.
시니스터의 중심축을 이루는 성좌들이 장 우페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다.
‘주인께서 가진 큰 뜻에 반할 수는 없지.’
압둘은 장 우페이의 생각을 훤히 알고 있었다.
시니스터가 제시한 ‘혼란’이 가득한 세상 대신, 자신만의 질서로 군림하려는 존재.
그가 섬기는 성좌들이 바라는 것과 다른 방향성을 품었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주인이 장 우페이를 주시합니다.』
『트릭스터가 장 우페이를 주시합니다.』
『가마의 주인이…….』
탑 바깥에서도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들.
원래는 배후성 계약을 맺은 성좌 외에 소통할 수 없지만, 편법으로 세계의 규칙을 빗겨 간 시니스터에게는 가능했다.
‘나의 주인이시여,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압둘은 불신자를 향한 불쾌감을 접어 두고는 사막에 손을 얹었다.
[신의 모래 폭풍]
바람 한 점 없던 사막에 때아닌 모래 폭풍이 휘몰아쳤다.
회오리바람을 충만하게 채운 세트의 가호.
그 존재력은 압둘을 능가하는 강자, 장 우페이의 냉정한 표정에도 한 줄기 균열을 일으켰다.
‘이게 바로 시니스터라는 건가.’
장 우페이는 한 달 전을 떠올렸다.
계약조차 맺지 않은 성좌가 메시지를 보냈던 일.
압둘 하마드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 우페이는 곧바로 압둘에게 접근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서 관찰했다.
구룡방이라는 거대 길드를 운용하는 총수이자 중국 제일의 랭커.
성좌의 한마디 말로 움직일 만큼 가벼운 위치가 아니다.
그는 레드 데저트 구성원 대부분이 시니스터 소속 성좌들과 계약을 맺었으며, 원실력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잘 이용만 하면 구룡방의 전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시니스터의 힘을 이용할 생각으로 접근하니, 압둘 하마드는 예상외의 제안을 꺼냈다.
-인공 게이트를 만들어서 유진호를 함정에 빠트리자.
1차 대침식과 함께 나타난 기현상, 게이트.
인간의 기술과 힘으로는 게이트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게 정론이다.
압둘 하마드는 그 상식을 부정하고 시니스터의 힘으로 게이트를 열 수 있다고 말했다.
‘정말로 가능한 건가?’
장 우페이는 동요하는 감정을 꾹 누른 채, 압둘을 지켜보았다.
지면에 깔린 모래가 바람의 흐름에 맞춰 솟구친다.
소용돌이치는 모래사장.
그 중심부에서 차원 축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파지지직!
일그러지는 차원.
사막을 주관하는 성좌, 세트의 힘이 차원의 벽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트릭스터가 압둘 하마드에게 힘을 부여합니다.』
트릭스터 로키.
같은 이름을 지닌 고신족, 우트가르트 로키에게서 받은 탑 권한을 세트의 가호에 섞었다.
얕아진 차원의 벽을 틈타 생성된 커다란 균열.
“게이트다.”
장 우페이가 경악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니스터 소속 성좌.
그리고 히페리온의 사주가 곁들어져서 만들어진 커다란 함정.
인공 게이트를 보는 압둘 하마드의 눈빛이 열광으로 물들었다.
“주인께서 베푸신 이적을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건 인정해야겠군. 대단하다.”
“무대는 갖춰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유진호를 부르는 건 이미 끝났다. 이제 놈의 무덤을 장식해 줘야지.”
“잊지 마십시오. 출입 가능한 건 플래티넘 등급까지입니다.”
세트의 가호를 기반 삼아 로키의 힘으로 빚어낸 인공 게이트.
출입 제한은 [골드]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플래티넘 등급 플레이어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내 수하들이라면 놈을 충분히 끝낼 수 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유진호는 우리 9영신의 합공도 이겨 낸 적입니다.”
“나, 장 우페이는 사냥감을 두고 방심하지 않아.”
장 우페이가 입술을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