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구릿빛 피부에 레게 머리를 한 사내가 지하로 내려왔다.
작은 피라미드처럼 세워진 제단.
사내는 그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압둘 하마드.
오아시스의 주인, 세트와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다.
“나의 주인이시여, 당신께서 바라신 뜻대로 되었나이다.”
압둘 하마드는 양손을 위로 올렸다.
극진한 예를 다하는 모습.
약 1시간 전.
[대결 지목 주문서]로 이지영을 지목, 굴욕을 선사한 이야기였다.
『오아시스의 주인이 흡족해합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공적을 더 올리기를 바랍니다.』
역천 길드 저격 사건.
그 배후에는 세트가 있었다.
압둘 하마드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주인이시여, 곧 반응이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이지영을 저격한 건 더 큰 대어를 낚기 위함이었다.
유진호.
압둘에게 힘을 준 배후성이자 위대한 성좌가 직접 지목한 대적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대결 상대로 지목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면 바벨탑에서 100% 확률로 매칭됩니다.]
“보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압둘 하마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호의 저격을 대비해서 사용한 [긴급 알람 주문서].
누군가가 탑 내 정보를 검색하거나 지목했을 때 알려 주는 주문서다.
개인정보 보호 주문서처럼 지목을 원천 봉쇄 하진 못하지만 가격도 저렴하고 활용도가 더 높았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준비는 철저히 했습니다.”
자신 있게 웃는 압둘.
S급 성좌인 세트를 배후성으로 둔 후, 그는 등급을 넘어선 힘을 지니게 되었다.
[오아시스의 가호 – Lv 5]
단계별로 나누어지는 성좌의 가호.
5레벨은 해당 성좌가 부여할 수 있는 권능을 최대치까지 내린 것이다.
성좌의 가호를 받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1레벨은 해당 성좌가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내려 줄 수 있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계약자와 성좌의 파장이 맞아야 더 큰 힘을 부여할 수 있다.
압둘 하마드와 세트의 상성은 그야말로 최상.
세트는 지구에서 분란을 일으킬 겸, 최상의 상성을 지닌 계약자에게 영성을 소모하여 가호를 모두 내려 주었다.
그뿐이랴.
“위대한 분께서 소개해 주신 덕에 길드원들도 충분한 힘을 갖추었습니다.”
강의 신 이켈로오스.
엔네아드의 일원인 감추어진 자, 아문.
그 외에도 시니스터 소속 성좌들과 계약을 알선해 주었다.
수준 미달인 길드원들조차 A급이나 B급 성좌를 배후성으로 두면서 훨씬 더 강해졌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당신을 위한 안배가 있다고 귀띔합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실망시키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한마디 경고를 남기고는 시선을 뗀 세트.
“유진호, 날 위한 주춧돌이 되어라.”
압둘 하마드는 낮은 웃음을 흘리면서 굽혔던 무릎을 폈다.
“길드장님.”
“어허, 누가 위대한 주인과 교감하는 장소에 함부로 발을 들이밀어도 된다 했느냐!”
“죄, 죄송합니다. 급히 길드장님께 말씀드릴 것이…….”
압둘은 진노를 누그러트렸다.
“말해 보아라.”
“중국의 구룡방 길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턱을 만지작거리는 압둘.
구룡방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플레이어 길드, 그도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군. 주인께서 말씀하신 안배가 이거였다.”
“예?”
“앞서가라.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압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하에서 벗어났다.
* * *
상대를 지정해서 같은 미션에 매칭하는 [대결 지목 주문서].
당연하게도, 만능은 아니다.
우선 주문서를 사용할 대상과 등급이 같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지목한 상대가 진입한 층계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이 좀 어려운데, 쉽게 풀면 압둘 하마드가 43층을 들어가면 매칭이 안 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우선 42층부터 돌파해야겠구나.
“마음 같아서는 빨리 손봐 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압둘 하마드가 골드 등급에 있는 한, 내 저격을 피해 가진 못할 것이다.
바벨탑 어플로 42층 매칭 버튼을 누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대결 지목 주문서로 지정한 상대가 바벨탑 어플에 접속했습니다.]
[매칭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지목한 상대와 같은 채널로 접속합니다.]
탑 어플이 메시지를 띄웠다.
“큭, 크크크크.”
어이가 없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건 무슨 일이더냐?
“압둘 하마드, 그 녀석도 나를 지목한 거다.”
제정신이 아니군.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
지영이와 카를라, 그리고 영수 형님을 꺾어서 기고만장해 있다.
아까 42층을 클리어해 놓고 반복해서 도전할 리는 없으니.
날 노린 게 분명했다.
“스승님, 그 사람이에요?”
“오냐. 복수할 때가 생각보다 빨리 왔네.”
지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파이팅!!! 꼭 이기세요!!!”
두 주먹을 앙증맞게 말아 쥐면서 크게 소리쳤다.
[42층 미션을 매칭 중입니다.]
[매칭 범위 - 글로벌 서버]
[20/20]
[매칭이 완료되었습니다. 60초 후에 42층 미션을 시작합니다.]
대기 시간이 0초가 되는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탑 내부로 이동해 있었다.
[바벨탑 - 42층]
[생존지대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서바이벌(Ⅲ)]
플레이어 20인은 무작위로 정해지는 필드에서 생존해야 합니다.
각 플레이어는 힘을 모으거나 경쟁자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를 쓰러트릴수록 보상도 커집니다.
▶ 목표: 30분 동안 생존.
혹은 최후의 1인이 되는 것.
▶ 필드: 잃어버린 사원.
2층, 그리고 12층에 이어 세 번째로 마주하는 서바이벌 미션.
이 층계는 최대 3명까지 스쿼드를 맺어서 진행이 가능하다.
지영이와 카를라, 그리고 영수 형님도 한 팀으로 미션에 도전했을 터.
-상대도 마찬가지겠구나.
“그러겠지.”
-후훗, 3 대 2라.
“여신님도 나서게?”
-다른 이도 아니고, 여가 아끼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느니라.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 나야 천군만마지.”
난 지면을 박차면서 공중으로 도약했다.
서바이벌에서 금기에 가까운 노출 행위.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이 있으면 존재감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수십 미터 위로 뛰어오르자, 잃어버린 사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에 위치한 고위 사제의 동상을 기준점 삼아 동서남북에 배치된 허름한 사원들.
두 눈을 빠르게 돌리면서 플레이어의 흔적을 찾았다.
그때.
“거기 있었구먼, 압둘 하마드.”
스산한 미소와 함께 바람길을 발동했다.
잃어버린 사원 북쪽.
모래로 된 소용돌이가 반쯤 부서진 건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숨을 생각은 없다 그거지?
정면으로 내달리자, 하늘 위로 솟구친 소용돌이에서 사람의 얼굴 같은 게 나타났다.
입을 쩍 벌린 얼굴이 수십, 아니 백 미터 넘게 커졌다.
-전진하면 저 입에 삼켜지겠구나.
“바라는 바다.”
사막과 모래바람을 주관하는 신, 세트.
저 모래 폭풍 속은 세트의 계약자인 압둘 하마드의 영역이다.
원래는 모래 폭풍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게 주위를 돌면서 놈의 힘을 소모시켜야겠지.
그렇지만.
“지금 난 조금 화가 났거든.”
내 부하를 건들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감히, 네놈 따위가 손을 대?
[신의 모래 폭풍의 영역에 진입했습니다.]
[날카로운 모래가 당신의 몸을 찢어발깁니다.]
[모래 폭풍의 영향으로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모래 폭풍이 시야에 간섭합니다.]
…….
모래 폭풍에 삼켜지는 순간, 온갖 디버프가 휘몰아쳤다.
정신이나 몸을 금제하는 게 아니기에 저항조차 불가능한 절대판정.
풍속 60㎧ 이상.
태풍의 수배 속도로 휘몰아치는 바람 앞에선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작디작은 모래알갱이들을 흉기로 변모시키는 엄청난 폭풍.
메탈 반사 장갑으로 전신을 감쌌음에도, 티티팅- 요란한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나의 주인께서 당신의 패배를 원한다.”
모래 폭풍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
“압둘 하마드냐?”
“그렇다. 날 찾으려고 애쓴 것 같은데 어떤가.”
자신만만한 목소리.
모래 폭풍 안이라고, 이미 다 이긴 기세다.
“일 덜게 해 줘서 고맙다.”
“일이라니?”
“네놈이 작정하고 도망쳤으면 곤란했거든.”
“위대하신 사막의 주인의 영역에 들어와 놓고 자신만만하군!”
“누가 자신만만한지는 두고 봐야지.”
“흐흐흐흐, 가만히 있어도 모래에 파묻혀서 죽을 놈이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방향감각조차 잡을 수 없는 모래 폭풍 속에서 죽음을…….”
새끼.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말 많은 건 여전하네.
저 개소리를 들어 주는 것도 지겨우니, 곧바로 압둘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전진했다.
“단번에 내 위치를 간파했다고?!”
압둘 하마드가 양손을 휘저었다.
바람에 휘날리던 모래 일부가 뭉쳐지더니 사람의 손처럼 변형.
내 팔과 다리를 붙들었다.
사방에 넘치는 게 모래다 보니 육감으로 감지했어도 회피가 불가능했다.
“흐하하하! 이대로 몸뚱이를 몇 조각으로 찢어발겨…….”
푸하학-.
힘을 주자 모래로 만든 손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왜. 뭐가 잘 안 돼?”
“이이익! 사막의 주인께서 하사하신 힘을 얕보지 마라!”
푹 잠기는 발목.
이번에는 딛고 있던 땅이 모래로 변하면서 날 빨아들였다.
튜토리얼에서 마주했던 괴물, 앤트 라이온의 모래 소용돌이와 흡사한 기술.
발에 내공을 실어서 세게 내리치자, 근방이 요동치면서 발을 감싼 압력도 사라졌다.
모래에 실린 마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지만.
무지개의 휘광석으로 완성의 영역에 한 발 걸친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 더 해 보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전력 질주도 운류보도 사용하지 않은 채.
폭풍 사이에 몸을 숨긴 압둘 하마드를 바라보면서.
-왜 시간을 끄느냐?
“너무 자비롭잖아.”
마음만 먹었으면 이미 급소를 가격, 압둘을 쓰러트릴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일부러 세트의 가호가 휘몰아치는 전장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자, 네가 지닌 모든 힘을 쥐어짜 봐라.
항거할 수 없는 벽이 무엇인지, 직접 알려 주마.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압둘 하마드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불과 5미터 정도로 좁혀진 거리.
“하밀, 라시드!”
압둘의 입에서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휘이이잉-!
폭풍마저도 뚫는 강한 바람이 몰아치면서 나를 옭아맸다.
어쩐지.
왜 모습을 안 드러내나 했다.
바람을 다룬 건 압둘과 스쿼드를 맺은 팀원들.
“좋아. 한 번에 덤벼라.”
격의 차이라는 것을 알려 주지.
난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