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바람길을 사용합니다.]
계곡은 바람이 강하다.
그 덕에 공기의 흐름을 밟기도 수월했다.
허공을 디디며 나아가니 계곡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걸 뒤집어 보면…….
“필멸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 낼 변혁을 방해하지 마라.”
“훼방꾼은 제거한다.”
적의 눈에도 잘 들어온다는 거지.
타락한 제단에서 소환된 타락 천사들이 편대를 이루어 날아올랐다.
-여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이 정도로?”
-지면을 밟지 않으면 무공의 위력도 약해지지 않느냐.
“되다 만 천사들 따위.”
그림자에서 솟구친 극야가 몸을 휘감는다.
피부로 스며든 진한 어둠.
뼈, 세포 할 거 없이 극야에 동기화되면서 밤과 하나가 된다.
일체화된 극야를 최대치로 전개.
밤의 장막이 하늘 일부를 검게 물들였다.
창.
칼.
철퇴.
갖가지 병기의 형태로 변한 극야가 타락 천사들에게 쇄도한다.
-호오, 왜 날붙이를 흉내 내었느냐?
“내 의념을 싣기 쉬워서.”
극야의 형태는 정해져 있지 않다.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천변만화의 모습을 띤 무형의 힘.
나는 닉스처럼 극야를 제 수족 마냥 자유롭게 다루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내 상상 속 ‘이미지’를 극야에 부여해서 파괴력을 상승시킬 수밖에.
완성의 경지에 한 발 내디디면서 가능해진 묘기다.
-과연. 번거로운 제약을 역으로 이용하는구나.
닉스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플래티넘 등급, 레벨 300대 플레이어의 전투력을 보유한 타락 천사들.
극야로 빚어낸 무기 세례 앞에서 허겁지겁 창을 휘둘렀다.
“일개 필멸자가 이런 힘을 다루다니!”
“당황하지 마라.”
편대 단위로 대응하는 타락 천사들.
뭐, 극야의 힘만 가지고 놈들을 쓰러트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바람길을 밟으면서 접근.
극야와 동화된 상대로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무공을 발출했다.
파츠츠츠!
암흑 칼날 위로 솟구치는 내공.
검기발현을 넘어서 그 위로 향하려는 듯이 강한 기운을 뿜어 대는 검을 휘둘렀다.
일합에 하나씩.
타락 천사는 이름에 붙어 있는 단어 그대로 ‘추락’했다.
[타락 천사에게 포식을 사용합니다.]
“감히, 필멸자가 천상의 존재의 사체를 능욕하다니!”
“천상의 존재는 개뿔.”
탑이 만든 가짜 주제에 자존심만 원본과 비슷했다.
타락 천사 편대를 쓰러트리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단으로 이동했다.
-반전 세계의 존재라. 신기하구나.
“여신님은 저 염색한 닭 날개들 몰랐어?”
-여가 눈을 뜨고 있던 시절에는 없던 존재들이로다.
“별거 아니야. 기생충 같은 놈들이지.”
클리포트의 나무.
질서를 상징하는 ‘세피로트의 나무’를 거꾸로 한 반전 세계의 상징이다.
원본, 그러니까 세계가 있어야 성립이 가능한 거울 같은 공간.
-과연. 이해하였도다.
“기생충이니 뭐니 해도 약한 적은 아니야.”
19층에서 마주했던 ‘가아그셰블라의 가지’도 층계의 난이도에서 벗어난 힘을 지녔듯.
그와 마찬가지로 클리포트의 나무를 구성하는 요소인 [골라캅의 가지]도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다.
성좌들의 개입으로 올라간 난이도.
나름 층계의 난이도나 설정에 걸맞은 조절이라고 봐야지.
-그대답지 않게 엄살을 부리느냐?
“무지개의 휘광석을 얻기 전이었다면 말이야.”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공중을 거닐다 보니 어둠으로 물든 제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날 보자마자 손가락질하는 악마 추종자들.
시커먼 방어막이 솟구치면서 제단을 감싸고, 대량의 암흑 마나가 결계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블랙 플레어]
[디스트로이 레이]
[다크 블렌더]
시커먼 화염과 파괴 광선, 그리고 온갖 삿된 기운을 섞은 기파가 하늘 위로 올라온다.
추종자 하나하나가 19층의 히든 보스와 동등한 계급인 ‘가지’였다.
얕볼 수 없는 위력.
“저렇게 의욕만 앞서서야.”
쯔쯧.
혀를 차면서 뒤로 물러났다.
마법의 사정거리는 화살이나 총처럼 길지 않다.
사용자가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재배열해서 만드는 이상 현상.
재배열 과정을 거친 마력은 사용자에게서 멀어질수록 구속력이 약해진다.
어둠으로 물든 제단에서 150미터 이상 거리를 두니, 매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암흑 마법의 위력이 1/3 이하로 줄어들었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극야의 힘으로 날아드는 마탄들을 소멸.
동시에 마나를 재배열했다.
이글거리는 구체.
솔라 익스플로전을 하나 완성했지만, 바로 해방하지 않고 탐욕의 가호로 침식했다.
주황색 표면 위를 뒤덮는 검붉은 마력.
구체 안에 응축된 막대한 에너지가 쉴 새 없이 꿈틀거렸지만 붙들어 놓았다.
-여의 힘을 다루면서 가호와 마력 재배열까지. 참으로 대단하구나.
말 시키지 마요.
거리를 벌려서 악마 추종자들의 마법 위력을 감소시켰지만, 여전히 얕볼 수는 없었다.
마법 공격에 닿아서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극야의 힘.
20초 만에 완성시킨 솔라 익스플로전 두 개를 동시에 투척했다.
제단 근처로 날아간 주황색 구체가 서로 공명하더니, 담아 둔 힘을 방출했다.
콰아아아앙-!
한계를 넘어선 열기에 절벽 일부가 녹아내렸다.
-최대 사거리를 감안하지 않는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솔라 익스플로전을 두 개나 때려 넣으면 제단이 퍽이나 무사하겠다.”
폭발의 범위에서 살짝 빗나간 제단.
그 충격만으로도 제단을 감싼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고, 안에 머무르던 악마 추종자들도 웰던으로 구워졌다.
“놈들이 애써 준 덕에 제단이 무사했네.”
-그대라는 사람은…….
“왜?”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 여신님이 사람 찝찝하게 하네.
숯이 된 악마 추종자, 그러니까 [골라캅의 가지]도 포식했지만 정수가 바로 차오르지 않았다.
19층에서 마주한 [가아그셰블라의 가지]는 보스 몬스터 취급이라 하나만 쓰러트려도 정수를 100% 채울 수 있었는데.
발품 좀 팔아야지 뭐.
시커멓게 물든 제단에 손을 얹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타락한 제단을 원래대로 되돌렸습니다.]
원래 파티원 여럿이 있어야 겨우 가능한 정화 작업.
난 [혼원룡의 심장] 덕에 마나가 넘쳐나서 홀로 감당할 수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41층 미션도 금방 끝나겠구나.
“그러게. 난이도를 올린 보람이 없어.”
맞장구를 치자, 닉스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왜?”
-흐응, 이상하구나.
“사람 얼굴 보고 이상하다는 건 실례잖아.”
-그 말투.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니라.
예리하긴.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41층의 미션.
이렇게나 빨리 끝내면 곤란하거든.
그러니 좀 더 분발해 줘라, 타락 천사들아.
* * *
41층의 무대인 잊힌 계곡.
본래 5인 파티를 권장하는 미션이지만, 나한테는 의미가 없었다.
성좌들이 강화한 보람이 없게도 악마 추종자들에게 빼앗긴 제단을 모조리 정화하는 데 성공.
그 후에는 렉시를 소환해서 방어전선을 꾸렸다.
“여신님도 놀지 말고 일해.”
“꼭 이럴 때만 여를 찾는구나.”
투덜거리면서 현신한 닉스.
말과 달리 적극적으로 악마 추종자들을 쓰러트리며 제단 보호를 도왔다.
조금씩 잦아드는 악마 추종자들의 공격.
[골라캅의 가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고대]
[스킬 - 블랙 플레어가 추가됩니다.]
[블랙 플레어]
등급: ★★★
분류: 액티브
저주받은 불꽃을 투척한다.
한번 불이 붙으면 원거리에서 암흑 마나를 주입, 블랙 플레어를 유지할 수 있다.
[타락 천사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고대]
[스킬 - 위계 추락이 추가됩니다.]
[위계 추락]
등급: ★★★
분류: 액티브
지목한 대상의 위계를 한 단계 떨어트린다.
격 차이가 심할 경우에는 자동으로 무효화된다.
암흑 마나 기반으로 펼치는 쓸 만한 공격 마법.
거기에, ‘신살’에 필요한 디버프 마법도 하나 얻었다.
디어사이드와 같이 사용하면 고신족 사냥에 큰 도움이 되겠어.
회귀 전에도 고신족들을 상대로 유용하게 사용한 스킬이다.
이쯤인가.
나는 제단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여신님, 방어 좀 맡아 줄래?”
“역시 노리는 바가 따로 있었구나. 여에게 맡기어라.”
닉스와 렉시.
둘이라면 계곡 여기저기에 배치된 제단들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 거다.
난 계곡 아래로 향했다.
▶히든 미션 - 주인 잃은 제단
이 세계를 떠난 성좌를 기리는 제단을 발견했습니다.
주인이 없는 제단에 공물을 바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보상 - 무작위
역시.
난이도를 올렸다고 해도 미션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지진 않는군.
주인 잃은 제단은 현시대에도 제법 알려진 숨겨진 요소다.
그래서 최초 발견이라든지, 다른 보상이나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
주인 잃은 제단의 사용방법은 간단하다.
무엇이든 제단에 바치면, 무작위로 보상을 주는 것.
“설명상으로는 말이야.”
주인 잃은 제단은 나름대로 사용 공식이 있다.
A를 바치면 B가 나온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
회귀 전, 플레이어들은 41층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기적의 연금술 공방.
조합식만 알면 큰 이득을 거둘 수 있다.
현시점에서는 주인 잃은 제단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만.
“이제야 이걸 써먹네.”
오랜 시간 동안 욕망의 주머니에 잠들어 있던 물건.
[괴조의 알]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아르헨티나에서 게이트 공략 후에 얻은 보상.
원래는 테이밍에 특화된 플레이어를 발굴,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서 선더버드로 부화시킬 생각이었지만.
국내에서 테이밍 관련 능력자를 찾기 어려워서 포기했다.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주인 잃은 제단에 사용하면 되지.”
히죽 웃으면서 제단 바닥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마나에 공명하기 시작하는 제단.
[괴조의 알을 주인 잃은 제단에 바칩니다.]
[괴조의 알 → 야타 까마귀]
[야타 까마귀가 해당 미션에 강림합니다.]
회귀를 해도 이런 건 바뀌지 않아서 좋다니까.
괴조의 알을 매개로 소환된 환상종.
발이 하나 달린 커다란 흑조, 야타 까마귀가 나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