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붕대를 감은 망자, 미이라.
언데드면서도 성력을 근원 삼아 움직이는 이율배반적인 존재다.
죽음을 관장하는 성좌, 오시리스의 가호다.
미이라들은 금색으로 빛나는 4미터 길이의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법칙.”
“죽은 자의 법칙을 따르라.”
“만물의 종착역에 동참하라, 필멸자여.”
수백 구에 달하는 미이라가 열을 맞춰 전진하니 훈련된 군대를 보는 것 같다.
오시리스의 계약자라.
회귀 전에도 오시리스를 배후성으로 둔 하이 랭커가 있었는데, 이집트 출신은 아니었단 말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없군.
승급전에서 나를 만나다니.
-자아도취로 가득한 기름진 표정이로구나.
“그 표현은 또 뭐야?”
츠캉!
손톱을 길게 늘이면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산 자에게 죽음을!”
미이라 하나가 창을 쭉 내질렀다.
날에 실린 은은한 빛.
언데드 주제에 성력을 오러처럼 둘러놓았다.
실제 오러와 비교하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위력.
그래도 일개 소환수 치고는 강력했다.
-호오, 꽤 흥미로운 존재로구나. 여가 가세하지 않아도 되겠느냐?
“가세는 무슨. 여신님은 쉬고 계십쇼.”
철갑 아르다밀로와 아이언 슬러그의 정수를 엮어 낸다.
전신을 뒤덮는 은색 갑주.
그 위로 데스 나이트의 정수에서 추출한 암흑 투기를 둘렀다.
암흑 마나를 오러처럼 구현하는 기예.
미이라의 창은 시커먼 기류를 뚫어 내지 못하고 옆으로 튕겨 났다.
“죽음의 주인께서 내려 주신 성스러운 힘이!”
“죽다 만 시체가 말 많긴.”
내공을 실은 주먹으로 미이라의 머리를 터트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루로 화하는 미이라의 머리통.
쇄애액!
창날 여러 개가 순차적으로 날아들었지만 무시했다.
육감이 전해 주는 충격량은 미미했으니까.
창을 피하기보단, 도리어 몸에 충돌한 날을 붙들어서 홱 당겼다.
“어, 어어.”
“네 주인 곁으로 꺼져라.”
창을 쥐고 있던 미이라의 정수리에 꽂힌 지풍(指風).
손가락에 응축시킨 내공이 발출되면서 커다란 구멍을 새겨 놓았다.
“거, 사부만 재미 보는 건 그렇지 않소!”
뒤따라드는 길드원들.
미이라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스승님, 이 정도면 금방 전멸시킬 수 있겠어요.”
글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걸?
“일어나라.”
푸스스!
가루가 되었던 미이라들이 다시 생성되었다.
오시리스의 가호로 되살린 언데드.
새로 나타난 미이라들은 대열 곳곳에 뚫린 구멍을 메웠다.
“반칙이잖아요, 이건!”
“역시 파조동. 예상을 벗어나지를 않아.”
“쳇.”
지영이가 혀를 찼다.
하여간 쟤는 말을 조심해야 해.
입이 화를 불러오는 체질이야.
수백에 달하는 미이라들은 진을 갖추더니 한 점으로 밀집했다.
뭉친 채로 창을 앞으로 내미니 고슴도치처럼 보인다.
천천히 전진하는 미이라 군대.
그 주위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약한 자들이 모여 봐야 오합지졸일 뿐!”
핑 레이가 분신들을 만들면서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봉에 아른거리는 푸른 기운.
유형화된 기를 두르고는 선법으로 강화, 날카롭게 찔렀다.
미이라 군대를 감싼 막에 닿는 순간.
쩌어어엉-!
분신 아홉 기가 터져 나갔고.
“컥!”
핑 레이 본체도 비명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신성력으로 만든 방진 결계.
황금을 녹여 만든 병기 위에 신성 문자로 주문을 기록, 공격과 방어에 용이한 형태다.
“저, 스승님. 틈이 없어 보이는데요?”
“역시 결계는 전문 분야라서 바로 알아보네.”
“쿨럭, 쿨럭. 그 사실을 알면서 왜 안 알려 준 거냐!”
핑 레이의 눈빛에 원망이 섞였다.
“말해 줄 틈도 없이 달려갔잖아, 이 멍청아!”
“날 보고 멍청이라고 했겠다!”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가 좋아진 건지, 아니면 더 나빠진 건지 구분이 안 가는군.
오시리스의 방진.
미이라 군대 개개인에 부여된 성력을 끌어모아 결계로 치환하는 공격이다.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쏟아붓거나.
아니면 힘의 총량에서 우위를 점하고 그대로 찍어 누르거나.
“역시 내키는 건 두 번째 사항이군.”
느긋한 걸음으로 미이라 군대에게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상황.
“잠깐만요!”
미이라 군대 중심부에서 튀어나온 뾰족한 목소리가 긴장감을 일그러트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잠깐?”
“우, 우리 대화로 풀면 안 됩니까?”
미이라 군대가 전진을 멈췄다.
채챙!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날카롭게 섰던 창날이 아래로 내려졌다.
사그라지는 적의.
골드 승급전에서 경쟁 상대로 만나 놓고 무장 해제를 한다고?
“뭔 꿍꿍이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양옆으로 갈라지는 미이라 군대.
비쩍 마른 사내가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저 녀석, 독일의 하이 랭커인 마르코 아니던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처음 떠오른 생각이 맞았다.
마른 사내는 나랑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 오오오오!!!”
괴이한 소리를 크게 냈다.
난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돌발행동.
살기를 피워 올리자, 사내가 황급히 입을 떼었다.
“영광입니다. 유진호 플레이어님과 통성명을 하게 되다니!”
“날 알아봐 준 건 고맙다만.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지?”
“저는 마르코, 마르코 호프만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독일 소속 하이 랭커이자 여섯 군주 중 하나, 르네 데이비스를 막아섰던 플레이어.
융합기공 앞에서 무릎 꿇긴 했지만, 회귀 전을 기준으로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런데 마르코가 왜 이집트 소속이 되어 있고, 날 보자마자 무장해제를 한 건가.
내가 회귀함으로써 세계의 흐름이 바뀌었다지만, 이건 비약이 너무나도 심했다.
설마, 저 녀석도 나처럼 회귀를 한 건 아니겠지?
“하나만 묻지.”
“예! 말씀하십쇼!”
“갑자기 왜 무장해제를 한 건가?”
“그건 제가 유진호 플레이어의 팬이라서 그렇습니다!”
“……응?”
내 팬이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말은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 * *
마르코 호프만.
오시리스를 배후성으로 두었던 하이 랭커.
회귀 전에는 여섯 군주 바로 아래로 분류될 만큼 강력한 플레이어다.
그랬던 그가…….
“사인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명함을 내밀 줄은 몰랐다.
양옆에 줄지어 선 미이라들은 한 술 더 떠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부복했다.
“진심입니까?”
“제가 유진호 님께 거짓을 말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독일 출신이었던 양반이 이집트에서 승급전을 치르질 않나.
팬이랍시고 고개를 먼저 숙이고 있고.
설마.
“방심을 유도하는 건가.”
-그런 것 같진 않구나. 여가 보기에는 진심이니라.
“여신님의 눈에 그렇게 보여?”
-후훗, 여가 모든 감정을 읽어 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사특한 마음을 품지는 않았구나.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의 마르코는 실력에 걸맞는 인성의 소유자였다.
다르게 말하면 오만하단 거지.
여섯 군주조차도 경쟁 상대로 여겨서 나하고도 사이가 안 좋았다.
저 녀석이 이렇게나 고분고분하니 묘하네.
“길드장님, 이집트의 마르코 호프만은 논외 등급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플레이어입니다.”
영수 형님이 첨언했다.
“그건 어떻게 알고 계세요?”
“토마스 분석관이 영상을 몇 번 보여 줬습니다.”
“아하.”
벌써부터 외국의 신예들을 경쟁 대상으로 상정, 훈련을 하고 있었군.
참 빠르네.
그나저나 이대로는 곤란했다.
워 골렘의 정수를 포식해야 하는데, 싸울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마르코 호프만.”
“예, 예!”
“사인을 원한다면 해 줄 수 있다.”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다. 네 실력을 모두 발휘해서 싸우는 거다.”
“어째서 그런 조건을……?”
“거저 주는 승리 따위는 관심 없다.”
마르코의 눈빛에서 묘한 열망이 일렁였다.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아니야.
나 날로 먹는 거 엄청 좋아해.
하지만 싸울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으니, 놈에게 동기 부여를 해 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쿡쿡.
“왜 웃어?”
-평소의 그대답지 않구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니라.
쳇, 혀를 한 번 차고는 뒤로 물러났다.
몸을 일으키는 미이라 군대.
마르코가 입술을 떼었다.
“진호 님의 사인을 받을 수 있다면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오시리스 방진]
[집결 형태]
지이이잉!
미이라 군대를 중심으로 유형화된 성력이 회오리친다.
공방 모두 대처가 가능한 형태.
-후후훗, 이제야 싸움 같구나.
“난 아니거든.”
새로운 변수.
분명 긍정적인 변화지만 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스스슷!
극야를 일점에 집중.
암흑 칼날로 구현하고는 그 안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내공.
칼날 위에 시커먼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수라마령심공의 영향으로 검어진 내공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후, 경지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검강을 구현할 수도 있겠는걸?
무공 성취도는 낮지만 어둠이라는 성질에 동화시키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를 흉내 내는 것도 가능했다.
“오오오, 이게 말로만 듣던 어둠의 칼날!!”
환희 섞인 목소리가 미이라 군대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팔자도 좋구먼.
방진 위로 칼을 휘두르자, 미이라 군대를 둘러싼 방어막이 찢겨져 나간다.
“죽음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
“위대한 질서 앞에 무릎을 꿇을지어다.”
미이라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이건 제가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호 님!”
울상 섞인 마르코의 목소리.
부탁이니까 둘 중 하나만 해 주지 않을래?
미이라 군대가 합창하자 성력이 증폭되면서 암영추혼검을 밀어냈다.
-힘이 부족해 보이는구나.
“이 정도면 충분해.”
넓게 퍼진 힘.
미이라 각 개체가 지닌 성력을 방진으로 끌어모으는 거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서 손실이 크다.
힘의 총합이 100이라면 50 정도는 날아가는 셈.
거기서 또 일점으로 집중하면 효율이 더 떨어진다.
암흑 칼날에 내공을 추가로 불어넣으면서 팔에 힘을 주자.
쩌어어억!
미이라 군대가 힘을 합쳐 만든 방어막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그 충격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미이라들.
무방비 상태의 마르코는 박수를 쳤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1시간 뒤에 다시 와라.”
서걱-.
마르코를 쓰러트리자 미이라들도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여, 역시 스승님이세요. 자기 팬에게도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
“저 냉정한 마음가짐. 본받고 싶군요, 사부.”
핑 레이와 지영이가 깐족거렸다.
너희는 승급전 끝나고 훈련 2배로 예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