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쉴 시간은 없었다.
[38층 미션을 통과했습니다.]
[39층 미션을 통과…….]
여태 미뤄 두었던 탑 등반을 다시 시작했고.
“스승님, 이번에는 진심으로 갑니다!”
“언제는 진심 아니었다고.”
길드원들과 합을 맞추기 위해 훈련도 빠지지 않았다.
약 한 달 동안 기량이 상승한 길드원들.
특히 핑 레이와 지영이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있었다.
[아이기스의 방패]
[진동 결계]
가호와 고유 능력을 결합.
훨씬 더 견고해진 결계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핑 레이도 마찬가지.
분신들도 초보적인 선법을 펼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고유 능력 - 분신]
[풍둔의 술 - 풍검(風劍) x 10]
“사부, 이건 다 받아 내지 못할 것이…… 커헉!”
뭐라는 거니.
메탈 반사 갑주를 탐욕의 가호로 침식, 그 위로 다크 오러를 두르니 따로 방어할 필요가 없다.
날 상대하려면 자잘한 견제보다 강력한 한 방을 노려야 하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나.
지영이가 친 결계도 꽤 오래 버텼지만.
[백수제왕무 - 1초식]
[응룡황권을 사용합니다.]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
연속으로 무공을 펼치자 순식간에 박살났다.
“스승님, 어디서 영약이라도 먹고 온 거 아니죠?”
헬쓱해진 표정으로 지영이가 고개를 저었다.
영약은 무슨.
한 달 동안 두 마약 카르텔을 무너트리느라 들불의 화로를 빼면 포식한 정수도 없는데.
“그래도 눈에 띄게 성장했네.”
두 사람 다 성좌 덕을 제대로 보는군.
토마스가 첨언했다.
“마스터, 다른 길드원들도 슬슬 배후성 계약을 진행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야죠.”
“혹시 특별히 생각해 두신 성좌라도……?”
“에이, 배후성 계약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성좌의 눈에 들어야지.”
훈련을 참관 중이던 엔리케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저씨, 저 나름대로 성좌들한테 인기 많거든요?”
분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엔리케.
네 회귀 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나는 그 말에 긍정하는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입술을 떼었다.
“S급 미만은 취급 안 해 준다.”
엔리케의 성격은 교만함을 밑바탕에 깔아 두었다.
잘난 건 맞지만 그걸 너무 오냐오냐 하면 다시 고개를 추켜세울 거란 말이야.
한 번씩은 눌러 줘야 한다.
“우씨, 그래도 A급까지는 쳐줘야죠!”
“A급까지 해도 얼마 안 될 거 같다만.”
“전쟁의 씨앗, 옹기장이의 수호자, 모닥불의 지킴이, 그리고 화산의 주인이 저를 지켜보고 있어요.”
호오, 많기도 하네.
엔리케를 지켜보는 성좌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대장장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전쟁의 씨앗이면 철기를 최초로 빚어냈다는 투발카인이고.
옹기장이의 수호자는 도교 계열의 성좌로 알려진 화덕진군이다.
둘 다 플레이어에게 관심을 크게 두지 않기로 유명하지만, 엔리케만은 예외인 모양이다.
그리고.
엔리케가 언급한 성좌 중에는 내가 기다렸던 존재도 있었다.
“화산의 주인이랑 계약 해.”
“바로 정해도 돼요?”
“헤파이스토스면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야. 그만한 성좌가 없지.”
헤파이스토스, 혹은 불카누스.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이자 고신족 퀴클롭스의 제자,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의 병기를 수없이 만든 강력한 성좌다.
“헤파이스토스라니.”
상심으로 젖어 든 엔리케의 목소리.
“왜, 실망했어?”
“멋진 성좌도 많잖아요. 왜 하필이면 대장장이랑 계약하라는 건지.”
“너한테 관심을 두는 다른 성좌들도 다 대장장이들이다.”
“에엑.”
“네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려면 대장장이 성좌와 계약하는 게 좋아.”
엔리케의 고유 능력.
메카닉 컨트롤은 대장장이와 궁합이 잘 맞는다.
회귀 전.
엔리케가 기계 군주로 불렸을 때는 A급 성좌인 [모닥불의 지킴이], 카베와 계약을 했었다.
만약 헤파이스토스를 배후성으로 두면 전생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을걸?
“알았어요.”
엔리케는 마땅찮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배부른 녀석.
형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데.
영수 형님과 카를라는 배후성으로 둘 만한 성좌가 아직 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금만 기다리세요. 괜찮은 성좌 알아봐 줄 테니.”
“믿을게요.”
“길드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맞겠죠.”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
핑 레이 때처럼 괜찮은 성좌를 물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십쇼.
한편, 블랙마켓에서는 내 의뢰를 금방 수행했다.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USB를 건네주는 영.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덕에 회귀 전의 지식과 어렵지 않게 비교할 수 있었다.
“확실히 빨라졌어.”
회귀 전만 해도 지구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갓 차원 경쟁전에 돌입했을 때만 해도 성좌와 계약한 이들이 플레이어 중 1%가 될까 말까였다.
여기서 표기된 1%는 만신전에 넘쳐나는 C급 성좌와 계약하는 이들도 포함하는 수치였으니.
한데, 지금은 그 수치가 3%나 되었다.
지구를 주시하는 성좌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
이 변곡점을 만들어 낸 건…….
“당연히 나겠지.”
한탄하듯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돌린 후 1년도 안 되었는데 나비효과가 광풍처럼 들이닥쳤다.
1회차에서 겪었던 역사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회귀 전의 지식을 더 활용할 수 없는 시기가 금방 오겠어.
하지만.
“오히려 좋아.”
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제어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라고 해서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성좌들이 지구에 관심을 둔다는 건.
곧 플레이어들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니까.
60층 너머, 그러니까 다른 차원의 플레이어들과 경쟁을 벌여서 밀리지 않으면 멸망의 시대가 오지 않게 막는 것도 가능했다.
이제는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할 때.
그로부터 며칠 후.
매월 10일마다 찾아오는 승급전 시즌이 돌아왔다.
* * *
[바벨탑 접속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가 머무는 공간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속됩니다.]
[현재 골드 승급전이 활성화되어있습니다.]
[40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N]
휴대전화를 들어서 가볍게 흔들자, 다른 길드원들도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이미 해당 등급을 넘어선 신준석과 홍윤수, 그리고 토마스를 뺀 전원이 이번 승급전에 참여한다.
“준비는 다들 됐지?”
“예!”
기합이 팍팍 들어가 있는 길드원들.
-후훗, 참으로 든든하구나.
“이번에는 어렵겠어.”
-무엇이 말이더냐?
“패배하기가.”
-교만은 패배를 불러온다만, 이번에는 전력 차가 크니 나무랄 수도 없구나.
한숨을 쉬는 닉스를 흘겨보고는 접속 버튼을 눌렀다.
일그러지는 풍경.
눈을 감았다가 뜨니 두 달 전에 봤던 섬이 눈에 들어왔다.
[바벨탑 - 41층]
[에르델 섬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승급전]
에르델 섬은 과거 마도제국에서 새로운 마도 병기 및 전투 마법사 훈련시설을 설치한 곳입니다.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가동을 멈추었지만, 곳곳에 위험시설과 병기들이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습니다.
섬 곳곳에 있는 거점을 점거하십시오.
상대 진형보다 많은 거점을 지배하면 포인트가 적립됩니다.
▶목표: 500포인트 적립.
▶특이사항
-사망 시 60분 후에 전장으로 다시 소환됩니다.
-거점 점령 개수 차이가 벌어질수록 포인트 적립 속도도 빨라집니다.
1위 - 참여 인원 100% 승급
2위 - 참여 인원 50% 승급
[이번 승급전은 한국 / 이집트 입니다.]
[두 국가의 인원 차이가 10% 이상 나지 않으므로 조정 없이 시작됩니다.]
[한국 - 51]
[이집트 - 55]
실버 승급전과 동일한 필드에 같은 주제.
핑 레이가 으스댔다.
“단번에 밀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숨은 붙여 줘.”
“사부님답지 않습니다만.”
“나답지 않긴. 정수에 목숨 건 사람한테 그러지 마라.”
-이상하구나. 그대는 이미 워 골렘의 정수를 포식하지 않았느냐?
닉스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 안 나? 1층에서 고블린들의 정수가 따로 취급받던 거.”
-호오, 그런 일이 있었지. 기억하노라.
“층계가 다르다 보니 같은 워 골렘이라고 해도 다른 정수를 줘.”
포식 가능한 정수는 하나라도 더 먹어야지.
『죽음을 관장하는 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매의 눈을 가진 주시자가 당신을…….』
쏟아지는 성좌들의 관찰 메시지.
여태 본 적 없는 이질적인 기운을 띤 성좌들이다.
-참으로 인기가 많구나.
“인기는 무슨.”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죽음을 관장하는 자와 매의 눈을 가진 주시자, 둘 다 엔네아드에 속한 성좌다.
엔네아드란 올림포스 12신처럼 이집트 신화의 주신들을 일컫는 용어.
날 관찰 중인 두 성좌는 S급에 해당하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 만도 하지.
“오시리스, 그리고 호루스.”
죽음을 관장하는 자는 명계의 신인 오시리스요.
매의 눈을 가진 주시자는 오시리스의 아들로 엔네아드를 이끄는 지도자, 호루스다.
제우스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두 성좌.
엔네아드에서 최고신이자 신왕급으로 불리는 건 태양신 라이지만, 그가 외부 활동을 거의 나서지 않는 탓에 두 성좌가 엔네아드를 대표했다.
심상치 않은걸.
“먼저 이집트 팀 낯짝이나 보러 가자.”
일행을 이끌고 섬 중간 지점인 팩토리로 이동했다.
야트막한 산으로 감싸인 분지.
팩토리 근처에는 이미 상대 측 플레이어가 포진해 있었다.
“스승님, 저거 미라들이죠?”
지영이의 손가락이 언덕 너머의 언데드 무리를 가리켰다.
수백 구에 달하는 망자들.
붕대로 전신을 칭칭 동여맨 언데드, 미라다.
“30층에서는 제우스더니. 이번에는 이집트 출신 성좌들이냐.”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실버 등급에서 주신급 성좌들이 주목하는 상대를 만날 줄은 몰랐다.
이 또한 회귀하면서 발생한 나비효과겠지?
“스승님, 이번 상대 심상치가 않아 보이는데요.”
“제우스의 계약자도 박살 냈는데 이 정도야.”
주신급 성좌를 배후성으로 둔 것은 우리 일행도 만만치 않았다.
손오공, 헤파이스토스, 그리고 아테나.
각 신화를 대표하는 ‘신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나같이 강력한 성좌들이다.
그뿐이랴.
-후훗, 여가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더냐?
힘을 잃긴 했어도 개념신의 영역에 닿은 닉스까지 있었다.
“역천 길드의 저력을 보여 주자.”
난 빙그레 웃으면서 앞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