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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206화 (206/300)

206화

들불의 화로는 이 시점에서는 풀리지 않았어야 할 아이템이다.

역시.

미래가 변하기 시작한 건가.

“마담, 들불의 화로를 출품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음, 한국 지부장급이라고 해도 그건 좀 어렵네요.”

“바로 지부장 취급해 주는군요.”

“거래는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 블랙마켓의 기본이랍니다.”

“그럼 전 마담보다 아랫사람이 되는 겁니까?”

“호호호, 바로 맞히셨네요.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지만요.”

“추가 정보를 들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겠군요.”

기긱-!

평행을 유지하는 저울.

내 권한 밖이라는 것을 굳이 언급해서 거래 조건으로 채웠다.

이 순간에도 실리와 형식을 모두 취하려 하다니.

마담,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출처는 러시아 테사크라는 집단이에요.”

“테사크?”

“네오 나치 분파라고 정의하는 게 이해가 빠르겠군요.”

안 끼는 곳이 없는군.

쯧-.

나는 혀를 찼다.

“블랙 네트워크 한국 지부장님. 어찌되었든 함께 하게 된 파트너가 되었으니 조언 한마디 할게요.”

“말씀하시죠.”

“우리 손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마담의 부드러운 경고.

반쯤 억지로 블랙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 나름의 규칙을 존중해 달라는 말이었다.

“네오 나치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그 이유, 들어도 될까요?”

“무게를 감당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겨우 평행이 맞춰진 저울.

여기에서 들불의 화로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하면 다시 한번 천칭이 내 쪽으로 크게 기울 게 분명했다.

블랙마켓에 빚을 지워 놓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한 번에 많이 벗겨 먹으면 다음에 거래하기가 힘든 법이다.

“진호 님의 자비에 감사해요.”

마담은 내 말에 담긴 뜻을 바로 알아들은 듯, 테미스의 천칭을 흩트려 놓았다.

저 천칭이 발동된 상황에서 이야기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그렇다면 저도 서비스 하나 더 해 드리죠.”

“서비스?”

“진호 님이 찾는 아이템, 이번에 처음 나온 게 아니랍니다.”

난 마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다음 날, 난 지난 이틀과 동일하게 경매장으로 향했다.

“흐응, 그곳에서 볼일은 모두 해결한 줄 알았건만.”

“뭐, 생각했던 거랑 다르게 풀리긴 했지.”

블랙 네트워크와 연줄을 만드는 일.

원래는 시간을 두고 블랙 네트워크의 중심인물과 접촉할 계획이었다.

블랙 네트워크는 오로지 이득만을 위해 움직이는 단체.

내 유명세가 빠르게 상승하는 중이라지만, 블랙 네트워크에서 눈여겨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운이 좋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혈마검 야마오카를 만들었을 때 여기까지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많은 걸 얻었다.

“그대는 역시 계획이 다 있구나.”

“아니? 이건 얻어걸린 거야.”

“이곳을 방문한 건 테미스의 계약자와 연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느냐.”

“들불의 화로가 있는지. 그리고 출처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었어.”

“호오, 그대가 찾는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들불의 화로.

제물을 바쳐서 성좌의 힘과 능력을 빌리는 유물이다.

“일견 듣기에는 평범한 아이템처럼 느껴지는구나.”

“로키의 수작질이거든.”

“로키?”

“헤르메스보다 한 수 더 악질인 성좌야.”

“그 아이보다 장난기가 많다니. 끔찍하구나.”

닉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한데, 로키라는 자와 화로가 연관이 있느냐?”

트릭스터의 대명사.

로키 하면 ‘장난’을 떠올리지만, 그의 이름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불.”

로키가 애시르 신족으로 편입되었다곤 하나 실은 서리거인인 요툰의 피가 섞여 있다.

불을 주관하는 요툰, 우트가르트 로키와 동일 인물로 취급하는 신화도 있고.

“화로를 사용할수록 악 계열 성좌의 영향을 받아.”

“그건 성좌를 배후성으로 두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니느냐.”

“좀 다르지. 이건 본질의 문제다.”

사용자의 악의를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유물.

악 계열 성좌들의 소집단, 시니스터에서 하계에 개입할 때 사용하는 아이템이다.

들불의 화로를 사용, 힘을 추구할수록 악한 본성이 혼을 잠식한다.

일반적인 성유물처럼 사용에 제약이 걸리거나 번거로운 조건을 타는 것도 아니니.

“한데 이상하구나.”

“뭐가?”

“그렇게 하계를 어지럽힌다 한들, 시니스터라는 성좌 모임에 득이 될 것이 없지 않느냐.”

“혼란 자체를 즐기는 놈들이다.”

주객전도.

본래는 혼란을 일으켜서 다른 이득을 취하는 게 목적일 테지만.

시니스터에 발을 디딘 성좌들은 다르다.

자신들의 영성을 소모하면서까지 혼란을 부추기고 그걸 즐겨 보는 관음증 환자들.

고신족만큼은 아니어도 질이 나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좌석에 앉았다.

“그래도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시간?”

“순서를 바꿔 달라고 했어.”

경매 자체를 없는 일로 만들 수는 없다.

러시아의 네오 나치 단체가 블랙마켓에 물품을 낸 이상, 경매에 나와야 하니까.

대신 6번째 날에 출품되기로 한 것을 3일 차로 당겼다.

이번 미국행에서는 얻을 걸 충분히 얻었다.

“더 머물러 봐야 시간 낭비다.”

“흐응. 이럴 줄 알았으면 밤에 카지노라도 다녀올 것을.”

“경매를 마치고 다녀오자.”

“후훗, 역시 그대는 여의 마음을 잘 아는구나.”

경매 3일 차.

난 [혈마검 야마오카]를 팔아서 얻은 돈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들불의 화로를 구매했다.

성좌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유물.

이미 블랙 네트워크 안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일까, 생각 이상으로 지출을 했다.

“빌어먹을 시니스터.”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화로를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들불의 화로]

등급: 레전드[L]

분류: 유물

내구도: 500/500

불과 관련된 성좌들과 연결된 유물입니다.

여러 성좌의 기운이 섞여 있어서 성유물이 되지 않았지만, 성좌의 힘을 빌려 올 수 있어서 유물 판정을 받습니다.

제물을 화로에 놓고 불태우십시오.

당신이 바친 제물의 수준에 따라 성좌의 가호가 내려질 것입니다.

“사기 치고 있네.”

첫 줄부터 거짓말이다.

불과 관련이 있기는.

시니스터 소속 성좌들 중 불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 로키뿐이다.

그것도 ‘이름’의 기원에서 따온 것에 불과하지.

탑 시스템의 허점을 노린 편법이다.

“그대의 말대로구나. 불의 기운보다는 마치…….”

뜸을 들이는 닉스.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고민하는 모양이다.

“계약자의 나라에서 그런 음식이 있지 않느냐.”

“아, 부대찌개?”

“그러하니라. 제법 맛이 괜찮았지만 음식물의 모습이 영 아니었지.”

여러 개를 섞었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나 보군.

부대찌개는 또 언제 먹은 건지.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들불의 화로를 쓰다듬었다.

“이것도 마찬가지야. 특정 성좌와 연관은 없지만 성능 하나는 확실하지.”

“하면 어찌할 생각이더냐? 그대라면 성좌들의 정신 간섭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만.”

“화로를 나보고 쓰라고?”

“나쁜 이야기는 아닐 터. 그대는 정식으로 계약한 성좌도 있지 않느냐.”

“난 여신님이면 충분해.”

“후훗, 그 말은 기쁘다만 실용적인 부분도 생각해 보란 말이니라.”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굳이 화로를 쓸 필요가 있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들불의 화로를 포식합니다.]

부우우웅!

들불의 화로가 커다란 진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접촉면을 타고 솟구치는 커다란 화염.

극야의 힘을 발동해서 불꽃을 세게 억눌렀다.

“이러면 후유증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과연. 묘책이로구나.”

우리나라 돈으로 1천억을 호가하는 아티팩트.

그 돈을 써 놓고서 아공간에 보관해 두긴 아깝잖아?

들불의 화로에서 솟구치던 화염이 극야의 힘에 짓눌려서 조금씩 잦아들었다.

[포식한 정수: 38.7%]

“역시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나.”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보아하니 정수를 모두 채우지 못한 듯하구나.”

“이제는 말 안 해도 척척 아네.”

“후훗, 그대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는 않느니라.”

닉스는 코를 추켜세웠다.

“역시 남은 정수들도 채워야겠어.”

“경매에서 나온 들불의 화로는 하나뿐이지 않느냐?”

“처음 풀린 게 아니더라고.”

마담이 서비스 차원에서 준 정보.

이미 들불의 화로는 2번이나 출품되었고, 여러 음지의 단체가 흥미를 가지고 있단다.

화로를 사용하는 데 제약도 따로 없어서 조직 소속 플레이어를 강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모양.

“누가 사 갔는지 들었으니까 회수하면 돼.”

두 화로의 위치는 멕시코와 이탈리아.

마담과 안면을 튼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한데 화로의 대가로 줄 만한 금전이 그대에게 없어 보이는구나.”

“아, 범죄 조직한테 뭣 하러 돈까지 주고 구해?”

공교롭게도 화로를 낙찰받은 두 단체 다 마약 카르텔이다.

양심의 가책 없이 털어먹을 수 있다는 말씀.

마침 무지개의 휘광석으로 완성의 경지에 한 발자국 들이민 상황이라 무력이 부족하지도 않다.

“흐으응. 집으로 돌아가려면 꽤 걸리겠구나.”

못마땅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는 닉스.

“왜?”

“여는 그대가 만들어 준 솜사탕을 먹고 싶다만.”

“돌아다니면서 더 맛있는 것도 사 줄게.”

“후훗, 그대는 아직도 멀었구나. 여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느니라.”

“……?”

그건 또 무슨 말이래.

닉스를 흘겨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놀러나 가자.”

“약조했던 카지노 말이더냐?”

“당분간 바쁠 거야. 지금 안 놀면 언제 스트레스 풀겠어.”

“후훗, 이제야 여의 마음에 드는 제안을 하는구나.”

“그러면 가실까요, 여신님.”

나는 과장된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못 이기는 척 손을 맞잡은 닉스가 가볍게 웃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3주일이 지난 어느 날.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악명을 떨치던 두 카르텔이 순차적으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조직이 보유하고 있던 유물이 행방불명된 것은 큰 이슈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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