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잠시간의 침묵.
마담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그건 들어드리기 어려운 부탁이군요.”
“어물쩍 넘어가는 건 곤란한데.”
“블랙마켓은 규칙이 어떤 것보다도 우선이랍니다.”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차를 한 모금 들이마시는 마담.
“아시나요? 경매 물품은 사회자에게도 당일에 고지한다는 것을.”
“당신 능력으로 나를 살펴보는 것도 룰 위반 아닌가.”
“무게가 다르답니다.”
[정의의 가호 - 기울어지지 않은 천칭]
드디어 그 저울을 꺼내는군.
아까 약식으로 날 들여다본 것과는 다르다.
마담이 블랙마켓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 진정한 힘.
유·무형을 따지지 않고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성좌의 가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호오, 테미스의 능력이로구나.”
닉스의 감탄사에 마담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테미스는 정의의 여신 아닌가?”
“그러하니라.”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던지자 닉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씰룩이는 마담의 입가.
그녀가 테미스를 배후성으로 두었다는 건, 회귀 전에도 일급비밀로 취급되었다.
천칭 소환도 밝혀지지 않은 고유 능력으로 알려졌으니.
닉스가 저울을 보자마자 단번에 간파했으니 꽤나 놀랐을 거다.
“그 숙녀분, 올림포스와 관련된 소환수인가 보군요.”
“흥, 여를 한낱 사역마 취급 하는 것이더냐?”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 않나요.”
닉스는 입을 다물었다.
한 방씩 주고받았군.
혈마검 야마오카를 출품하고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많이도 파악했네.
“제 능력 앞에서는 무엇이든지 가치를 매길 수 있답니다.”
“출품될 물품에 대한 정보와 방금 전의 일. 둘의 무게를 비교하겠다는 말이군.”
“호호, 대화가 통해서 좋네요.”
“이 저울이 공정하리란 법이 있나?”
“안타깝게도 제가 섬기는 성좌께서는 저울에 수작 부리는 걸 용서하지 않으세요.”
“좋아. 그럼 시작하자고.”
“저울에 입김을 불어 주시겠어요?”
후- 하고 세게 바람을 부니 저울이 왼쪽으로 축 처졌다.
“이번에는 제 차례군요.”
마담이 입김을 부니 저울이 크게 요동쳤다.
반대쪽으로 휙 넘어가는 저울.
“진호 님, 보이시나요?
“두 안건의 가치 차이가 이 정도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실 가호를 이렇게 보여 드리는 것도 꽤 큰 지출이랍니다.”
뭐, 예상대로다.
내가 마담의 무례를 지적한 건 어디까지나 [저울]을 사용하게끔 유도할 수단이었을 뿐.
“추가로 조건을 제시해도 되나?”
“물론이랍니다.”
참 운이 좋았다.
블랙마켓의 마담.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려운 높으신 분이거든.
혈마검 야마오카를 팔 때 이런 상황까지 예측한 건 아니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자, 그럼 미끼를 던져 보실까.
“갈라테아의 설계도를 얻을 수 있는 정보.”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반대로 기우는 저울.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던 마담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 * *
두근- 두근-.
마담은 손을 꽉 쥐었다.
‘평정심이 무너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블랙마켓을 운영하면서 생긴 초인적인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당장 입을 열어서 진호를 추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마담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마스터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엄청 놀라셨을 거예요.’
블랙마켓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지의 단체, 블랙 네트워크의 일부다.
마담이 블랙마켓의 주인이라면, 모기업 개념인 블랙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인물도 있기 마련.
어둠의 인형사.
블랙 네트워크를 설립한 인물이자, 세계 각지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부추기는 인물이다.
뛰어난 수완가이자 강력한 플레이어.
개발도상국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국적을 옮기고는 이름 없는 랭커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 마스터께서는 갈라테아의 도면을 찾는 데 여념이 없으셨죠.’
그리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만든 완벽한 인형.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신의 축복을 받아서 사람으로 변한 존재가 갈라테아다.
인형사로서 더 높은 경지로 오르기 위해 필요한 도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저를 포함한 일부일 터.’
마담은 신음을 삼켰다.
혈마검이 매물로 올라온 직후.
진호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마쳤다.
향신료 제도의 영웅.
골드 문과 구룡방에서 모두 주시 중인 슈퍼 루키.
단기간에 엄청난 활약상을 보였지만, 블랙 네트워크와의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울기가 역전되었군.”
나직한 목소리가 마담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테미스의 가호를 발동시킨 상황.
‘값’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갈라테아의 설계도가 휴지 조각에 불과하겠지만.
블랙 네트워크의 2인자이자 어둠의 인형사를 섬기는 이, 마담한테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컸다.
너무나도 절묘한 시기에 꺼낸 협상 카드.
진호가 회귀라는 초현실적인 일을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담으로서는 짐작조차 불가능한 상황.
“갈라테아가 무엇이더냐?”
“피그말리온이라고, 고대의 유명한 조각가가 만든 인형이야.”
“과연. 그 도면에도 역사와 격이 깃들었겠구나.”
진호와 닉스가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조금 놀랐네요.”
“제 제안에요?”
“그렇답니다. 마침 블랙 네트워크에서 은밀하게 찾고 있는 아이템이었거든요.”
마담은 정보를 일부 공개했다.
[기울어지지 않은 천칭]을 사용한 게 역으로 독이 된 셈.
그럼에도, 그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하게 블랙 네트워크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진호를 압박했다.
“정보 출처가 중요합니까?”
“전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거래하기 싫으면 관두죠.”
진호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좀 곤란한데요.’
마담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생겼다.
블랙 네트워크 내부에서 정보가 샜는지 아닌지.
그리고 진호가 언급한 ‘갈라테아의 도면’에 대한 정보까지.
이 자리에서 그가 떠나 버리면 둘 다 얻지 못한다.
“잠깐만요.”
마담은 진호를 붙잡았다.
“더 말씀을 나누시려면 그 저울부터 어떻게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빙그레 웃는 진호.
유독 그 미소가 얄밉게 느껴지는 마담이었다.
정보조차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천칭.
마담은 늘 정보의 이점을 활용해서 최선의 거래를 이끌어 냈지만.
회귀자인 진호한테는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지금은 손해를 더 보더라도 저 사람을 붙들어야 한다.’
손익계산을 마친 마담이 입술을 떼었다.
“한 가지 더 묻죠.”
“얼마든지요. 저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면.”
“혹시 블랙 네트워크 내부에 정보통을 심어 두었나요?”
“이 순간에 궁금한 게 정보의 출처라니. 역시 마담은 다르네요.”
“대답 여부는 진호 님의 자유의사지만, 말씀해 주시면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 드릴게요.”
마담은 승부수를 직구로 던졌다.
블랙 네트워크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 중인 [갈라테아의 도면].
진호가 내부 인사와 관련이 있는지 가늠할 정보다.
만약 그가 여기서 대답을 하면 그만큼의 값을 추가로 치러야 하지만.
대답을 피하면 블랙 네트워크 내부를 단속할 근거가 생긴다.
‘어찌하실 건가요?’
마담은 진호의 입술이 떼어지기를 기다렸다.
* * *
이야, 천하의 마담을 이런 식으로 먹이네.
블랙마켓을 암중에서 지배하는 철의 여인, 마담.
회귀 전에도 몇 번 봤지만 그때마다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손익계산에 철저한지라, 늘 마담이 이득을 더 보는 거래만 했었거든.
특히 [기울어지지 않은 천칭]은 정보의 불균형까지도 가치로 보정한다는 숨겨진 규칙이 있다.
블랙 네트워크의 정보망을 활용한 마담.
불균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그녀한테서 이득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대를 회귀 전의 지식 하나로 흔들다니.
회귀는 역시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블랙 네트워크하고는 아무 연관도 없습니다.”
난 마담이 궁금해했던 답을 망설임 없이 들려주었다.
왼쪽으로 더 기우는 저울.
바닥에 닿을까 걱정될 정도로 처졌다.
“그럼 무슨 수로…….”
“그 대답의 가치는 마담도 감당하지 못할 건데요?”
마담이 테미스의 가호를 꺼낸 이상, 어떻게든 저 천칭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내가 회귀자라는 정보는 그녀가 지불할 수 있는 값어치 이상일 터.
서로를 위해서도 그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후, 이렇게 손해를 본 거래는 처음이군요.”
“당신이 섬기는 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마담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자존심이 꽤 상한 모양이군.
그 뒤로 한동안 침묵이 VIP룸에 감돌았다.
생각이 복잡하겠지.
기울어진 천칭을 평행하게 만들려면 내가 제시한 것만큼의 가치를 줘야 한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제 능력 안이라면 들어드리죠.”
마담은 항복 선언을 했다.
시니스터의 꼬리를 잡으려고 움직인 건데.
블랙 네트워크의 거물과 연을 만들게 되었군.
소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꼴이지만.
눈앞에 생긴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다.
“한국 지부의 책임자.”
“……블랙 네트워크는 한국에 지부가 따로 없는걸요?”
“이제부터 생기면 되겠네요.”
드르르륵!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천칭이 어느 정도 균형을 되찾았다.
“당신,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뭐, 간부라고 해도 블랙 네트워크의 행사에 참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신분 보장 및 혜택을 봐줄 만한 자리를 만들어 달라?”
“이해가 빠르시네.”
추가 조건이 붙을수록, 천칭의 기울기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평형을 이룬 저울.
“이번 거래는 완전히 손해만 봤네요.”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다른 사람은 손해를 보겠죠.”
“호호, 그게 저인 경우는 별로 없어서요.”
딸랑딸랑-.
마담은 탁자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마담.”
“경매 물품 리스트를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비서가 자리를 나가자, 마담이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갈라테아의 도면. 잊으시면 곤란하답니다.”
“명단 확인만 하면 바로 알려 주죠.”
잠시 후.
비서가 들고 온 경매 물품 리스트를 훑어보던 중.
“빌어먹을.”
나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들불의 화로]
시니스터의 힘이 깃든 가짜 성유물이 물품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