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호로록-.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커피.
흰 안대로 눈을 감싼 여인은 눈을 가렸는데도 불편한 기색 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 검이 새로 출품된 경매 물품인가요?”
“맞습니다, 마담.”
혈마검 야마오카.
8층 보스 몬스터인 악귀의 드랍 아이템에 [진혈의 피]를 먹여서 진정한 힘을 일깨운 검이다.
진호가 경매장에 내놓은 아이템은 블랙마켓의 주인의 앞에 놓여졌다.
여인은 가느다란 손으로 칼날을 천천히 훑었다.
손에 아른거리는 푸른 빛.
혈마검은 그 기운에 반항하듯 부르르 떨었다.
칼에 깃든 사이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치려는 찰나.
“쉿.”
작은 목소리에 붉은 기류가 잠잠해졌다.
칼날에서 손을 뗀 여인은 붉은 기류 일부를 붙잡아서 입에 갖다 대었다.
그녀는 음미하듯이 붉은 기운을 습, 빨아들이고는.
“훌륭하네요.”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담께서 극찬하실 정도입니까?”
“등급은 유니크지만 실제 능력은 그 이상이랍니다.”
아이템이 같은 등급이라고 해서 꼭 동일한 능력치를 보유한 건 아니다.
혈마검처럼 규격에서 조금 벗어난 병기도 있는 법.
“이왕 살펴본 김에 조금 더 들여다봐야겠어요.”
비서가 화들짝 놀랐다.
“마담의 능력을 사용해야 할 정도입니까?”
“아티팩트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려면 이 방법이 가장 빠르답니다.”
여인은 손을 들었다.
[정의의 가호 - 기울어지지 않은 천칭]
은색 저울.
평행을 이루고 있는 저울 위에 칼날의 기운을 올려놓았다.
왼쪽으로 축 처지는 저울.
여인은 작은 추를 하나씩 얹었다.
추가 올라갈수록 평형에 가까워지는 저울.
다섯 번째 추를 올려놓는 순간, 왼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이 오른쪽으로 살짝 내려갔다.
“준레전드……!”
“잠재력이 예상을 넘어서네요.”
탑 시스템이 보여 주는 것 이상을 들여다보는 능력.
성좌와 계약하면서 [시야]를 봉인하는 대가로 얻은 강력한 힘이다.
기울어진 저울을 어루만지던 여인이 입술을 떼었다.
“생물의 피를 먹일수록 강해지는 검. 조건을 타지만, 최대치까지 강화시키면 레전드 등급에 버금가는 잠재력을 지녔답니다.”
“마담의 안목은 대단하시군요.”
“내일 히든 상품으로 나가면 되겠어요.”
“경매 물품으로 나오면 반향이 엄청날 것 같습니다.”
여인은 비서의 감탄사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출처가 궁금한걸요?”
“다비 스미스가 보장한 인물입니다.”
“블랙 카지노 관리자군요.”
“바로 호출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조금 지켜보죠.”
블랙 네트워크의 정보량은 엄청나다.
바벨탑 출현 이후 급격하게 세를 불려서 마피아나 삼합회, 갱단 등을 아우르는 세력.
그럼에도 혈마검 같은 아티팩트는 금시초문이다.
‘이 아티팩트, 뭔가 있어.’
블랙마켓의 주인.
마담은 가리개로 가려진 두 눈을 반짝였다.
* * *
다음 날.
난 시간에 맞춰 경매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가느냐?”
“당분간은 계속 갈 거야.”
“원하는 물건이 따로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게 나올지 안 나올지는 모르지.”
시니스터.
악 계열 성좌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 ‘아티팩트’를 교묘하게 배포할 거다.
아티팩트를 전 세계 곳곳에 흘리기 가장 용이한 곳이 지하 경매장이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그 물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이건 예상이 어긋나기를 바라는 게 낫겠네.”
지구 소속 플레이어들은 다른 차원들보다 평균 수준이 떨어진다.
성좌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는 차원.
회귀 전, 시니스터가 지구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도 2030년 이후의 일이다.
내 길드원들을 모두 주시 중인 세트.
시니스터가 원래의 역사보다 4년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 원인은 나밖에 없다.
성좌들한테서 어그로를 너무 끌었나.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경매장 좌석에 앉았다.
“오늘도 경매장을 찾아 주신 귀빈 여러분,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경매 물품.
어제는 쓸 만한 물건이 나오나 싶었는데, 경매 이틀째는 꽤 따분했다.
“350만!”
“500만!”
다른 이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지만.
“그대는 끼지 않는 게냐?”
“쓸 게 없어.”
회귀 전에 온갖 수라장을 다 겪은 몸이다.
어지간한 아이템은 눈에 차지도 않는다고.
포식이라는 능력 때문에 갑주와 무기를 쓸 일이 없어서 더더욱 그러했다.
반지나 목걸이, 귀걸이 같은 보조 아티팩트라면 모를까.
그나마도 현시점에서는 성능에 비해 가격이 과하게 높았다.
차라리 원자재를 구해서 모르스한테 의뢰를 맡기는 게 훨씬 낫지.
세라프의 깃털과 혈왕의 구슬을 선점해 둔 것도 당장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그러던 중.
“이번 물품은 저희 경매장에서도 연원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물건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혈의 피로 진정한 모습을 각성한 아이템.
혈마검 야마오카다.
“이 검으로 할 것 같으면 유니크 등급에, 스킬이 둘이나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를 먹일수록 강해져서 레전드급에 준하는 성능으로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준레전드?”
“말도 안 돼. 이런 아이템은 들어 본 적 없어.”
“생명력 흡수 옵션도 있다잖아? 내장 스킬은 그렇다 쳐도.”
“근접 탱킹이나 딜링 모두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강력한 옵션이지.”
“저 검은 우리 길드에서 가져가야 해!”
달아오르는 공기.
어제 진혈의 피가 나왔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시작은 1,000만 달러입니다.”
“2,000만.”
“4,000만.”
“5,000만!”
순식간에 치솟는 금액.
“과연. 그대의 행동에는 모두 의미가 있구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 검, 혈향이 남아 있느니라.”
나는 검지를 입가에 대었다.
사업(?) 밑천을 그렇게 털어 내면 곤란하지.
워낙 작게 말해서 누가 들을 리는 없지만, 순간 마음이 철렁거렸다.
“냄새도 맡을 줄 알았나.”
“정확히는 혼의 흔적이라고 해야겠구나.”
“뭘 못 하겠군.”
[낡아빠진 야마오카의 이빨]을 강화하는 건 미래의 지식.
누구한테도 보여 줄 수 없어서 화장실까지 다녀왔는데, 닉스는 한 번 본 것만으로 그걸 간파해 냈다.
“후훗, 걱정하지 말거라. 여의 입은 무거우니.”
닉스는 윙크를 했다.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구먼.
완전히 요물이여, 요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1억 5,000만 달러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2천만, 원화로 약 200억에서 시작했던 혈마검의 가격은 1500억 넘게 올라가 있었다.
닉스의 도움으로 늘려 놓은 총알보다 2배 더 높은 자본.
거참. 미래의 지식을 안다는 게 얼마나 위력적인지,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상기되었다.
로렌트가 혈마검의 비밀을 밝혀낸 후에는 6천만 달러 선에서 거래되었으니.
혈마검 야마오카가 3배에 가까운 가격에 팔린 건 검의 성능 자체도 뛰어나지만 아직 출처가 밝혀지지 않아서다.
블랙마켓에서 볼일을 마치면 투자금을 유망 기업에 투자해서 굴려보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야겠어.
“혈마검 야마오카는 1억 5,000만 달러에 낙착되었습니다!”
땅- 땅- 땅-!
나무망치의 소리가 이번만큼은 참 달콤하게 들렸다.
그 뒤로도 경매를 쭉 지켜봤지만,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다.
소득이야 있었지만.
“지루하구나.”
“나도 동감이다.”
“그렇다면 카지노를 가 보는 건 어떻겠느냐?”
“안 돼. 볼일이 있다니까.”
누구 속도 모르고 저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냐.
닉스를 흘겨보고 있을 때.
“고객님, 저희 경매장에 맡겨 주신 물품을 정산하려 합니다만.”
“아, 바로 됩니까?”
“그렇습니다. 블랙마켓은 신용과 규칙이 우선이니까요.”
범죄자 새끼들을 모아 놓은 주제에 신용이라.
근데 틀린 말도 아니다.
블랙마켓을 설립한 존재는 ‘규칙’에 관해서만큼은 철두철미한 사람이거든.
도리어 블랙 네트워크의 중심인 블랙마켓이 자리를 잡으면서 전 세계의 범죄율이 낮아졌으니까.
현시점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정보다.
“가지.”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룸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담당자가 곧 올 예정입니다.”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에 앉아서 촉감을 즐기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로 들어왔다.
“저희 경매장에 물품을 맡겨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고객님.”
어럽쇼.
난 미간을 찌푸렸다.
회귀 전에 몇 번이고 마주쳤던 구면.
그녀를 여기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일이 재미있어지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불편한지라.”
툭- 툭-.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으면서 걷는 여인.
그녀는 이내 맞은편에 앉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족하지만 이 경매장의 총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마담이라고 불러 주세요.”
“마담. 본명은 아니겠군요.”
“호호홋, 사람은 하나 정도 비밀을 가지고 있잖아요?”
“블랙마켓에서 비밀을 지켜야 할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니겠죠.”
“어머.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해 주신다.”
능글맞기는.
혈마검의 배당금만 받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큰 거물이 튀어나왔다.
마담.
블랙마켓의 지배자이자, 블랙 네트워크의 중심인물 중 한 명.
눈을 가린 것은 정의의 여신인 [테미스]를 배후성으로 두면서 생긴 페널티다.
시각이 봉인되었을 뿐.
두 눈이 달린 사람보다 사물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건드린 것도 가벼운 속임수라는 거지.
“그래서. 총책임자께서 배당금 때문에 오신 건 아닐 거고.”
“진호 님께서는 서론을 좋아하지 않으시는군요.”
“내 신상까지 이미 파악을 했는데, 굳이 말이 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호호, 별거 아니에요. 왠지 당신에게서 특별한 느낌을 받아서, 얼굴 한번 보려고 온 거랍니다.”
안대로 눈을 가렸는데도, 나를 주시하는 ‘눈빛’이 느껴진다.
성좌의 능력.
어떤 것이든지 간파할 수 있는 테미스의 가호였다.
난 정수리에 자리 잡은 극야를 슬쩍 움직였다.
“아앗.”
작은 탄성을 지르는 마담.
신력에 의한 간섭이면 마찬가지로 가호나 신력으로 쳐 낼 수가 있다.
테미스의 가호를 직접 사용하면 이 정도로 무력화시키진 못했겠지.
간접 발현 정도는 얼마든지 끊어 낼 수 있다.
“그렇게 저를 들여다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진호 님은 감이 좋으시네요.”
“칭찬으로 넘어가 드리고 싶지는 않은데.”
“호호, 좋아요. 그럼 어떤 걸 대가로 드리면 될까요?”
마담은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날 관심 있게 보지 않았으면 그녀가 나오는 일이 없었을 터.
회귀 전의 기억을 근거 삼아 질러 봤는데 효과가 있군.
이 자리.
지루했던 경매 과정을 단번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80차 경매 물품 리스트를 주시면 없었던 일로 생각하겠습니다.”
난 싱글거리며 폭탄 발언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