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지하 30층에 위치한 경매장.
오페라 극장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무대 사이로 정장을 입은 남녀 여럿이 앉아 있다.
“경매까지 30분 남았군. 이때가 가장 긴장된단 말이지.”
“저번 경매에서는 프라울의 눈물이 출품되었던가?”
“소문에 따르면 이번 경매에서는 그 촉매와 짝을 이루는 어둠의 미소가 나온다던데.”
“이번에도 치열하겠군.”
“참. 코를레오네시 파랑 카모라 파의 갈등이 첨예해진다고 해서 무기 경매에 불이 튈 것 같더라.”
웅성웅성.
잡담에 섞인 수많은 정보들.
살짝 귀를 기울인 것만으로 여러 조직들의 동향을 알 수 있었다.
“고객님께서는 참 운이 좋으시군요.”
“경매 열리는 날에 맞춰 와서?”
“그렇습니다. 경매는 정해진 날만 치러지니까요.”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맞춰서 온 거다.
경매가 열리는 날은 매월 1일부터 7일이니까.
경비에게 블랙 카드를 제시하고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넌 안 가냐?”
“우리 고객님께서 무엇을 찾아 경매장에 오셨는지가 궁금해서요.”
다비가 태연하게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슬며시 총알을 체크했다.
계좌에 남은 돈은 약 150억.
블랙카지노에서 얻은 게 200억이니, 달러로 환산하면 3,500만 달러를 쓸 수 있다.
“여신님, 부탁 하나만 하자.”
“말해 보아라.”
“어제 여신님이 딴 판돈 좀 빌려줘.”
“그 칩 말이더냐? 그대의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하여라.”
다비가 황당한 눈빛으로 닉스를 바라봤다.
“거기 숙녀분, 4,000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빌려주신다고요?”
“필멸자들의 가치는 여에게 통용되지 않느니라.”
“아니, 그게 말입니다.”
“조용히 있어 봐. 경매 시작한다잖아.”
난 다비의 입을 봉인했다.
닉스는 블랙카지노에서 번 돈의 가치를 잘 모른단 말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솜사탕이나 케이크와 치환하면 평생을 먹어도 남을 정도의 양이 나올 텐데.
설명해 주자니 복잡하니까 넘어가자.
“지하 경매장을 찾아 주신 귀빈 여러분, 곧 제80차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니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지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짝짝짝!
쏟아지는 박수갈채.
모두의 관심이 경매 물품으로 쏠렸다.
“첫 번째 물품은 브라질에서 발견된 만년한철입니다. 감정 결과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은 최상급 금속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무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바위.
광물은 강렬한 조명 아래에 있는데도 본연의 어두움을 간직했다.
“만년한철?”
“마나를 담는 데 특화되었고 아주 단단한 광물이다.”
“저 정도 양이면 갑주도 몇 벌이나 만들 수 있을 거야.”
술렁이는 인파.
경매 진행자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떼었다.
“시작은 100만 달러입니다.”
“150만.”
“300만.”
“400만!”
눈 깜짝할 사이에 천정부지로 치솟는 만년한철의 값어치.
경매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고객님께서는 참여 안 하십니까?”
“뭐 하러.”
“만년한철로 만든 병기나 갑주는 값어치가 높으니까요.”
“그거야 탑에서 보상으로 나온 완제품 위주잖아.”
나는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만년한철의 가공 난이도는 천상의 광물이라 일컫는 아다만티움이나 오리하르콘에 필적한다.
이 시기에는 저 광물들을 완벽하게 제련할 만한 장인이 없거든.
빨라도 2030년?
그러니까.
저건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거다.
만년한철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내지 못할 바에야, 탑에서 나오는 완제품을 구매하는 게 낫지.
“고객님이 모르는 장인이 있을 수도 있죠.”
“내 생각을 잘도 읽어 냈군.”
“마인드 리딩 같은 건 아닙니다.”
“알아. 그랬으면 느꼈겠지.”
냉혈 덕분에 정신 간섭 스킬에 상당한 저항력을 지녔다.
그뿐이랴.
밤의 여신의 가호를 정수리에 동기화하면서 정신력도 훨씬 더 강해졌다.
랭커급 플레이어가 아니면 내 생각을 읽을 시도조차 못 할걸?
“1,300만! 더 없으십니까?”
다비랑 잡담을 나누는 동안 가파르게 올라가던 만년한철의 가격이 소강세를 보였다.
그 뒤로도 두 명이 손을 더 들었지만, 최종 가격은 1,500만 달러에서 멈췄다.
“유진 로스차일드 님, 만년한철 낙찰을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경매물품의 주인이 정해지자, 다시 한번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오가는 금액의 규모가 엄청나군.”
“지하 경매장이니까요. 양지의 경매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회귀 전에도 온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
내 생각보다 열기가 더 뜨거웠다.
잔고는 약 7천만 달러.
이왕 지하 경매장에 왔으니 ‘확인’할 물품 말고도 몇 가지 물건을 구하고 싶은데.
그 부분은 운에 맡겨야 하나.
“이 열기를 이어 갈 다음 물품입니다. 탑 48층에서만 발견되는 신녹의 녹용!”
블랙마켓에서 주관한 경매.
전 세계의 블랙 네트워크를 아우른다는 조직답게, 희귀한 물품이나 보물이 연달아 쏟아졌다.
마력이 깃든 아티팩트.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진 진귀한 예술작품.
지하 경매장은 꼭 플레이어와 관련된 물품만 다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진혈의 피. 혈주술의 위력을 증대시켜 주는 강력한 촉매입니다. 10만 달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혈주술이라고?”
“사용하는 플레이어도 거의 없잖아.”
“위력이 세지만 조건도 많이 타고. 원체 다루기가 까다로우니까.”
군중은 경매 물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15만 달러.”
그 순간.
다비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 고객님.”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군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물품에 입찰을 한 건.
바로 나였다.
* * *
“경매 1일차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붉은 커튼이 무대를 가린다.
하아아-.
“저 아이템들을 사려고 2천만 달러나 태우다니.”
천천히 흘러나오는 다비의 한숨.
“네 돈도 아니면서 아까워하지 말지?”
“제가 고객님께 지불해야 할 돈이 포함되지 않습니까.”
“네 손을 떠난 돈에 왜 이렇게 몰입하나.”
“어휴.”
다비가 마른세수를 하고 있을 때, 정장을 입은 경비 둘이 다가왔다.
“35번 고객님, 이리로 오시죠.”
“전 여기 있겠습니다.”
다비는 돈지랄(?)의 여운을 떨쳐 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두 경비는 무대 뒤로 일행을 안내했다.
“낙찰받으신 진혈의 피, 세라프의 깃털, 그리고 혈왕의 구슬입니다.”
피를 담아 둔 포션 병.
새하얀 깃털.
마지막으로 투명한 구슬.
상태창을 활성화시켜서 확인해보니 진품이 맞았다.
“경매에 물품을 낼 수도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블랙마켓에서 검토가 필요하지만요.”
경매 진행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낙찰받은 물품을 모두 챙겼다.
“모두 촉매로 보이는구나. 용도가 무엇이느냐?”
“다 쓸 데가 있지.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알았느니라.”
화장실 문을 잠그고는 욕망의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블랙마켓의 감시망이 그나마 덜 닿는 곳이 여기이니, 어쩔 수 없지.
[낡아 빠진 야마오카의 이빨]
등급: 레어[R] / 분류: 칼
내구도: 73/400
살아 있는 생물의 피를 갈구하는 검입니다.
갓 벼려 냈을 때의 날카로움은 잃었지만 피 냄새를 잘 맡아서 빈틈을 보여 줍니다.
흡수한 피는 사용자의 생명력과 체력으로 치환됩니다.
*근력 + 3
*민첩 + 3
*피 흡수 스택: 0
8층에서 핏빛 악귀를 쓰러트리고 얻은 검.
말이 좋아야 레어 등급이지, 실제 성능은 매직 등급에 불과했다.
피 흡수 스택을 쌓으면 조금 더 쓸 만해지지만.
최대치까지 흡수 스택을 축적시켜도 동일 등급 무기에 조금 못 미쳐서 외면을 받는 검이다.
“이 아이템의 진가는 따로 있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포션 병을 들었다.
막 낙찰받은 진혈의 피.
뽀옹-! 마개를 빼자 진한 혈향이 코에 아른거린다.
난 포션에 담긴 피를 망설이지 않고 칼날에 흘려보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낡아 빠진 야마오카의 이빨].
혈조를 따라 흘러간 피가 칼날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낡은 야마오카의 이빨이 진혈의 피를 흡수합니다.]
[진혈의 피가 칼에 잠들어 있는 진정한 힘을 일깨웁니다.]
[혈마검 - 야마오카로 변화합니다.]
[혈마검 야마오카]
등급: 유니크 / 분류: 칼
내구도: 1500/1500
살아 있는 생물의 피를 갈구하는 검입니다.
진혈의 피를 받아들이면서 칼에 깃든 힘을 일깨웠습니다.
흡수한 피는 사용자의 생명력과 체력으로 치환됩니다.
더 많은 피를 흡수할수록 검의 성능이 올라갑니다.
*근력 + 20
*민첩 + 20
*피 흡수 스택: 0
*[혈류 폭주] 스킬 내장
*[피의 분노] 스킬 내장
[혈류 폭주]
등급: ★★★
분류: 액티브
검으로 낸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폭발시킨다.
[피의 분노]
등급: ★★★
분류: 액티브
피의 흐름을 가속화시켜서 신체 능력을 증폭시킨다.
사용 시 체력이 소모된다.
짠!
이걸 누구한테 못 보여 줘서 아쉽군.
8층을 공략한 후, 원혼의 구슬을 백호 길드한테 양보한 건 이 때문이다.
원래는 5년 뒤에나 알려질 [낡아 빠진 야마오카의 이빨]의 비밀.
이 숨겨진 요소도 탐험가 로렌트가 발견한 것이다.
본의 아니게 로렌트의 업적을 여럿 가로채는군.
세라프의 깃털과 혈왕의 구슬도 [진혈의 피]처럼 쓸 데가 다 있다.
혈마검 야마오카를 욕망의 주머니에 수납하곤 느긋하게 화장실에서 나왔다.
“오래 걸렸구나.”
“긴장하면 배탈 나는 체질이라.”
“하여간 필멸자는 불편하기도 하지. 그런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구나.”
닉스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고는 경매장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고객님,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안 가고 기다렸냐.”
“고객님께서 무슨 짓을 벌이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솔직하군. 도박사로는 실격이다.”
“실격 여부를 정하는 건 접니다.”
다비와 잡담을 나누며 경매장 입구로 돌아갔다.
“고객님, 오늘 경매는 이미 끝났습니다만.”
“물건 하나를 내놓고 싶어서.”
다비는 의문 섞인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아공간에서 튀어나오는 검.
칼날에 깃든 사이한 기운이 주위를 빨갛게 물들였다.
“흡, 이 검은?!”
“유니크 등급, 혈마검 야마오카다. 내일 경매에 내놓고 싶은데.”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헐레벌떡 뛰어가는 경매장 관계자.
돈이 복사가 되는 마술.
경매장에서 얻을 건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