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닉스의 앞에 쌓여 있는 칩들.
내가 딴 것보다 배 정도 많아 보였다.
“허, 허허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다비.
얘, 괜찮나 몰라.
닉스는 활기찬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기이니라.”
“아주 판을 쓸어 버렸네.”
도신(賭神)이 강림하면 이런 모습일까.
카지노에서 매칭해 준 상대.
딜러.
그 누구 할 거 없이, 하얗게 질린 채로 닉스를 주시했다.
호구 잡으려다가 역으로 당한 건가.
거기에, 내가 준 판돈을 수십 배로 불려 놓다니.
“여신님, 어떻게 된 거야?”
“도박이라는 여흥, 하다 보니 상당히 흥미롭구나.”
“아니, 그러니까 돈을 어떻게 불렸냐고.”
“여의 계약자라는 자가 이리도 둔해서 어디에 쓸지.”
닉스는 혀를 찼다.
“저, 고객님.”
“동행이 이렇게 게임을 잘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래도 그렇죠…….”
억울한 표정 짓지 마.
카지노에서 돈 많이 딴 게 죄도 아니고.
하여간 심보가 못됐어요.
“잃는 사람이 있으면 따는 사람도 있는 법. 그게 카지노 아니던가?”
“부탁이니 오늘은 가 주시죠.”
다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들었지, 여신님?”
“흐음, 이대로 떠나기는 아쉽건만.”
“여기도 장사는 해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오늘만 좀 봐줘.”
“후훗, 그럼 내일 오면 되겠구나.”
닉스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거.
위험한데.
고작 몇 시간 만에 훌륭한 도박중독자가 되었구나.
“나중에 놀 시간 줄 테니까 일어나.”
“그렇게나 간청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이번에는 양보하마.”
닉스가 못 이기는 척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다비, 약속한 건 언제쯤 해결되나?”
“내일이면 됩니다.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디에 묵을지는 알고?”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꽤 성대하게 환영식을 해 줘서 믿음이 안 가네.”
비릿한 미소를 남기고는 닉스와 함께 카지노에서 벗어났다.
“아래에서 꽤 힘을 썼더구나.”
“그걸 또 어떻게 알았데.”
“후후훗, 여는 그대의 계약자이니라. 그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지.”
벙커에 걸어 놓은 마법 중에는 인기척이나 감시를 차단하는 결계도 있는데, 용케 느꼈네.
“걱정 안 됐어?”
“얼마나 죽였느냐.”
“내가 사람을 왜 죽이나.”
“걱정해야 할 것은 카지노의 직원들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다행이니라.”
안 죽이려고 힘 조절하느라 고생했지.
묘하게 핵심을 짚는 이야기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지노에서는 어떻게 그만큼 딴 거야?”
“필멸자의 감정과 마력의 움직임. 두 가지를 읽어 내니 쉽더구나.”
“아까 나한테 보여 준 걸 말하는 건가.”
“그러하다. 특히 욕망이라는 감정은 숨기려고 할수록 농밀한 향을 내기 마련이니라.”
“맵핵 쓰고 게임한 거네.”
“맵핵?”
“그런 게 있어.”
슬롯머신이나 룰렛 같은 기계에도 심리전을 걸 수는 없다.
하지만.
딜러가 카드를 배분하는 포커나 블랙잭 등, 진행 요소가 ‘사람’인 경우에는 닉스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카드 게임이 피지컬을 요구하는 게임도 아니고.
무슨 패.
그리고 어떤 속임수를 쓰는 지도 다 알고 있으면 지는 게 더 어려울 거다.
“참 대단하다.”
“후훗, 필멸자들의 놀이, 좀 더 접해 보았으면 하는구나.”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더 놀게 해 줄게.”
닉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나라의 필멸자들은 이렇게 약조를 한다더구나.”
“지영이가 알려 줬어?”
“그러하니라.”
“별 이야기를 다 했네.”
나는 한숨을 쉬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 * *
기나긴 밤이 끝나고,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욱.”
한 차례 심호흡을 크게 내뱉은 후, 감았던 눈을 떴다.
수라마령심공의 공능으로 쌓인 내공.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기를 운용하는 것만으로 몸이 개운해졌다.
-피곤하지는 않으냐?
“반쯤은 인간에서 벗어난 몸이야. 이 정도쯤이야.”
탑 시스템에서도 종족을 ‘용인’으로 인식한 판국이다.
여독 정도는 운기행공만 해도 떨쳐 낼 수 있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타이밍 한번 좋군.”
옷가지를 가볍게 걸치고는 통로로 나갔다.
호텔 종업원은 편지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온통 시커멓게 물든 종이.
-그 편지가 그대의 목표 맞느냐?
“응. 일 처리는 확실하네.”
봉인을 뜯자, 약도 하나가 들어있었다.
전 세계의 암흑가를 한데 엮어낸 블랙 네트워크.
그들이 자랑하는 암흑 시장, 블랙마켓의 위치가 표기된 약도다.
회귀 전의 지식을 활용하고 싶지만, 이 블랙마켓이라는 게 위치가 주기적으로 바뀌거든.
다비한테 접근해서 추천인을 괜히 얻어 낸 게 아니다.
“한데 궁금한 게 있구나.”
“말해 봐.”
“그 노인한테서 카드를 받은 것으로는 부족하였느냐?”
협회장한테서 받은 카드를 말하는 것이군.
나는 씩 웃었다.
“블랙마켓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쓸 수가 있으니까.”
“흐응. 어제처럼 안하무인으로 갈 줄 알았건만.”
“그쪽도 나름의 룰이 있거든. 어제는 그 규칙 안에서 움직인 거다.”
블랙 카지노에서는 플레이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다비가 지하 벙커에서 가격을 후려치려 했던 것도. 내가 스스로의 몸을 보호한 것도.
어디까지나 규칙의 허용 범위 내라는 말.
“범죄자들 주제에 지들 룰은 또 철저하게 지킨단 말이야.”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도 아니고.
아이러니하게도, 블랙마켓의 존재 덕분에 지하경제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유지가 되었다.
필요악인 셈이지.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외출 준비를 했다.
약도에 표시된 곳으로 가니 지난밤에 만났던 다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말이랑 표정이 반대잖아.”
“누구 덕분에 일이 좀 많아서 말이죠.”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다비.
한순간이지만, 저 말을 하면서 짜증이라는 감정을 살짝 드러냈다.
닉스가 휩쓸어간 판돈.
그 칩을 현금으로 환전하려면 블랙 카지노를 모두 털어야 했으니.
“우리가 사기를 친 것도 아니잖아. 표정 좀 풀어라.”
“당신도 그렇지만, 저 숙녀분의 트릭은 반드시 간파해 낼 것입니다.”
글쎄, 평생을 가도 모를걸?
내가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어도, 인간의 감정을 읽어 내지는 못했거든.
닉스가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 건 스킬 같은 게 아니다.
개념신이라는 최고위 성좌이기에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거지.
“그래. 힘내라.”
설명해 주기보단, 직접 당해 보고 깨달아 봐라.
나는 다비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이쪽으로.”
다비가 안내한 건물은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마천루였다.
“호오,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구나.”
“숙녀분께서는 블랙마켓이라고 해서, 지하에 있을 줄 아셨나 보군요.”
“부정하진 않으마.”
“이쪽 계열 종사자들은 원래 더 뻔뻔한 법입니다.”
“밝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둠이라. 그 또한 흥미롭도다.”
철학적인 말.
다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이래 봬도 밤 그 자체인 여신님이다.
‘밤’이나 ‘어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한도 끝도 없을걸?
“가자.”
“알겠습니다.”
다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섰다.
1층 로비에는 파티에 온 손님들처럼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가득했다.
각 암흑가의 보스.
혹은 블랙마켓을 찾은 유명 플레이어나 재벌이다.
“여신님이 보기에는 어때?”
“과연.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탑 아래에 이만한 욕망이 꿈틀거릴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잖아.”
“필멸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세계란, 참으로 흥미롭도다.”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던 중, 경비 하나가 일행 앞을 막아섰다.
“실례지만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는지.”
“아, 그 두 분은 제 손님입니다. 신원은 제가 보장하지요.”
“다비 스미스 님의 추천인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경비는 우리를 살짝 흘겨보고는.
“블랙마켓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지 두 개를 내밀었다.
다비가 손짓했다.
“받으시죠. 여기서 신원을 증명해 줄 아이템입니다.”
“사양 않지.”
난 배지를 받아서 가슴팍에 채웠다.
평상복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배지.
이런 곳 온다고 분위기에 맞춰서 옷 입는 건 싫거든.
반면에 극야로 짠 드레스 위에 배지를 단 닉스는 원래부터 착용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이걸로 2천만 달러는 없는 셈 치자고.”
“저 숙녀분께서 가져가신 것도 있습니다만.”
“그거야 둘이서 해결할 문제잖아.”
다비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두 분, 블랙마켓이 처음이시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제 호의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호의는 무슨.
자기 이름 달아 놓고 블랙마켓에서 엉뚱한 짓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게 훤히 보이는걸.
“그러면 블랙 카지노 주인장의 안내나 받아 볼까.”
못 이기는 척 다비의 속셈에 넘어가 주었다.
명색이 헤르메스의 계약자.
회귀 전에도 꽤 이름을 떨쳤던 플레이어이기도 했으니, 가까이 둬서 손해 볼 건 없다.
본성이 남을 속이기 좋아하는 놈이라서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가 되면, 저 녀석이 알아서 나한테 붙을 거다.
“그런데 어딜 가실 겁니까?”
“지하 경매장.”
“고객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경매장은 별도로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필요하…….”
협회장한테 받은 카드를 들이밀자, 다비가 입을 다물었다.
“그대여, 따로 찾는 물건이 있느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
“참으로 모호하구나.”
“이왕이면 그 물건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닉스.
진심이다.
원 계획대로라면 블랙마켓과 접촉하는 게 1, 2년 뒤였을 터.
내가 일정을 앞당긴 건 오아시스의 주인인 악신 세트의 움직임 때문이다.
시니스터.
악 계열 성좌들의 모임.
신화에서 트러블 메이커로 악명을 떨친 성좌들이 만든 소모임이다.
구성원으로는 세트나 마라 파피야스, 바알, 앙그라 마이뉴 같은 진성 ‘악’ 계열 성좌들과 로키나 헤르메스, 손오공처럼 흥미 위주로 사고를 치는 이들이다.
시니스터가 지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2030년 경.
근데 세트의 움직임이 빠르단 말이야?
“기우이기를 바라야지.”
“흐응, 또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중에 설명해 줄게.”
“좋아. 그때까지는 여가 참고 기다려 주마.”
시니스터가 지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세트가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건지.
그걸 알아내려면 지하 경매장만큼 확실한 장소가 없다.
난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경매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