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끼이익-!
10센티 두께의 철문이 뒤로 밀려난다.
“저희 사무실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꽤 살풍경한 모습이군.”
카지노와 비슷한 규모의 벙커.
내 조소에 다비가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이 업계가 가끔 위험하기도 해서 말이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글쎄.
방 전체를 통짜 쇠로 짜 놓고, 거기에 방어 마법까지 몇 겹으로 친 공간을 사무실이라고 할 수 있나.
미사일이 날아와도 버틸 것 같은 벙커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제 스킬을 한번에 간파하시다니.”
“내 눈이 남들보다 좋아서.”
“단순히 눈이 좋아서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닌데요.”
“그쪽 밑천 털어먹었다고 남의 정보까지 알아갈 셈인가?”
“허허허, 그저 다음에 게임 한 번 더 하자는 겁니다.”
“그건 당신 하는 거 보고.”
내 수작질을 밝혀 보시겠다?
승부사 기질은 이때도 여전하군.
천안(千眼)에 바로 들통나긴 했지만, 다비의 솜씨는 세계구급으로 뛰어났다.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의 계약자.
기만과 여행, 그리고 전령을 주관하는 신의 마음을 살 만큼 손재주가 엄청나거든.
저 녀석이 처음부터 [가호]를 사용했다면 나라고 해도 간파 못 했을 거다.
“고객님의 칩은 저희가 보관해 두었습니다.”
“2천만 달러. 다 세 놨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희는 신용이 우선이니까요.”
“플레이어 스킬로 밑장 빼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것도 규칙이지 않습니까.”
“한마디도 안 지는군. 말은 청산유수야.”
카드 게임에서 심리를 흔들어 놨는데도 벌써 제정신을 차릴 줄이야.
역시, 미래에서도 유명한 갬블러이자 헤르메스의 계약자라는 건가.
“고객님, 혹시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왜, 이제 와서 블랙마켓은 아무나 이용할 수 없다고 하게?”
“허허허, 블랙마켓을 어떻게 아신지는 모르나, 그곳을 이용하려면 추천인이 필요합니다.”
“여기 있잖아, 추천인.”
“전 일개 말단입니다. 블랙마켓에 누군가를 추천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2천만 달러를 내놓으시든가.”
“허허, 그건 곤란하지요.”
따악!
다비가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 벙커 곳곳에 드리운 음영에서 플레이어들이 튀어 나왔다.
“제 역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1천만입니다. 그 정도로 이해해 주시죠.”
“이해를 못 하겠다면?”
“직접 몸으로 이해를 시켜 드리는 수밖에.”
스르릉-!
칼집에서 나온 검이 은은한 벙커의 조명을 반사시키면서 살짝 빛났다.
“목숨을 해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천만 달러로 만족해 주시죠.”
“친절하기도 하군. 고맙다.”
“고객님,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생각대로 움직여 줘서 고맙다고.
굳게 닫힌 벙커의 문.
저 문을 닫는 순간부터 결계가 발동되었다.
나조차도 깨트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정도로 단단한 방어막.
이곳은 너희 모두를 가둔 감옥이 되었다.
두둑-.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이제부터 널 이해시켜 주려고.”
“그게 무슨…….”
“그러니까 이런 거지.”
난 곧바로 가까이에 있는 플레이어를 향해 출수했다.
* * *
블랙 카지노는 일반적인 카지노보다 훨씬 엄청난 보안을 갖추고 있다.
손님들이 플레이어다 보니, 평범한 경비들만으로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막을 수 없다.
다비가 불러낸 경비들도 마찬가지.
천안(千眼)으로 읽어 보니, 모두 골드 등급 수준의 플레이어였다.
그 정도로 누구를 이해시킨다는 건지 원.
“커흑!”
멱살을 잡힌 경비가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백수제왕무를 펼친 것도 아닌데 빈틈을 허무하게 찔려서 일격에 제압당했다.
“이, 이보십쇼, 유진호 고객님.”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벌써 호구조사까지 마쳤네.”
“명성이 높다고 하지만 실버 등급이잖습니까. 이러고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살아 나갈 수 있는 걸 고민해야 하는 건 반대가 아니냐.”
태연하게 대꾸하고 있을 때.
멱살을 잡힌 경비가 스킬을 발동했다.
[스네이크 슬래시]
마치 탈구라도 된 것처럼 흐물거리는 양팔.
경비는 양손에 쥔 칼을 기묘한 각도로 휘둘렀다.
목을 잡힌 상태로 공격이라.
기개는 참 좋군.
그게 아니면 엄청난 월급이 쥐여 준 용기인가.
금속 재질의 갑각이 전신을 뒤덮는다.
허공에 튀는 불똥.
강한 마찰력으로 발생한 불꽃과 함께 경비의 칼날이 옆으로 튕겨 났다.
메탈 반사 장갑.
충격을 되돌리는 옵션 덕에 충격이 하나도 와 닿지 않는다.
“이, 이건.”
“다행인 줄 알아라.”
길드원들과 대련을 하면서 강해진 힘에 나름 익숙해졌다.
힘 조절을 제대로 못 했으면 의도하지 않게 피를 볼 수도 있었으니까.
“무엇…… 끄에엑!”
멱살을 잡은 경비를 허공으로 든 후, 반대편으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경비.
쾅- 철로 된 벽과 부딪치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안 죽였어.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기야 하겠다.”
“…….”
침을 삼킨 경비들.
긴장한 기색으로 내 주위를 감쌌다.
“자신의 실력을 믿으시는군요.”
“너도 네 손가락 감각을 믿잖아. 같은 거지.”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가세해야겠군요.”
뒤에 빠져 있던 다비가 지팡이를 들었다.
뱀 두 마리가 서로를 옭아매면서 위로 향하는 형태.
헤르메스를 상징하는 성유물, 카두게우스와 흡사한 지팡이다.
[전령신의 가호 - 혼란]
뱀 두 마리가 나를 직시한다.
우우웅-!
귀에 아른거리는 이명.
시야가 흐려지고 중심을 잡을 수 없다.
두 발로 땅을 짚고 있는데도,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고객님을 진정시켜라.”
다비의 목소리가 초대형 스피커를 거친 것처럼 수십 배로 증폭되었다.
72마신의 능력으로 발현하는 저주에 버금가는 디버프.
아니지.
저 능력이 ‘가호’라는 걸 생각하면, 한 단계 윗줄이다.
신중하게 거리를 좁히는 경비들.
[메탈 반사 장갑]을 뚫어 내려면 일반적인 공격으로 효과가 없는 걸 두 눈으로 봤으니까.
멱살을 잡은 경비가 수작질을 부리는 걸 일부러 맞아 준 이유다.
어설프게 공격해서는 소용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려고.
내공을 오른 다리에 집중.
있는 힘껏 벙커 바닥을 내려찍었다.
[백수제왕무 - 10초식]
[백택군림각을 사용합니다.]
몇 겹으로 쳐 놓은 결계가 발길질 한 번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는 백택군림각이 만들어 낸 진동을 읽어 냈다.
헤르메스의 가호로 일그러진 오감.
그래도.
정수와 동기화시키면서 강화시킨 내 ‘감각’을 모두 가릴 순 없다.
동굴인의 정수, [감각]을 동화하면서 수배로 민감해진 오감.
빅 배트의 정수에서 얻은 [초음파]로 진동을 읽어 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듣는 걸로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내면 그만이다.
“글레이셜 스파이크!”
“윈드 블레이드!”
밀폐된 공간에서 마법이라.
그래서인지, 대인전에 특화된 주문만 펼쳤다.
이걸로 내 호흡을 빼앗겠다?
[쏜즈 미사일을 사용합니다.]
엄지 크기의 가시들이 정면으로 쏘아졌다.
가시멧돼지와 나이트건트의 정수가 융합해서 만들어진 기술.
사전 준비 없이, 의지만 있으면 어느 부위에서든 생성할 수 있는 스킬이다.
허공에서 충돌한 가시와 마법.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이 자신 있게 사용한 주문이 가시 다발에 막힌다.
[뇌둔의 술 - 뇌망을 사용합니다.]
암암리에 끌어올린 선기.
손에서 뻗어나간 번개가 그물 형태로 변이, 경비 몇 명을 휘감았다.
“으그그그그!”
“그갸갹!”
기괴한 비명과 함께 자지러지는 경비들.
방금 전에 주문을 외친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도 그물에 갇혔다.
“이야아압!”
남은 경비들이 발악하듯 달려들었다.
헤르메스의 가호가 여전히 감각을 어지럽히는 상황.
“부탁이니 죽지 마라.”
나름 힘을 조절하면서 경비들을 무력화시켰다.
팔이나 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휘긴 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다비 스미스.”
“이, 이게 대체…….”
“같잖은 가호부터 풀고 말하지?”
나는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전령신의 가호가 해제됩니다.]
“뒈지는 줄 알았네.”
“안타깝군요.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버텨 보는 건데.”
“아니. 너희가 말이야.”
힘 조절을 못 했으면 송장 몇 치웠을 거다.
블랙마켓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피를 보는 건 곤란하잖아.
내 말뜻을 알아들은 다비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제 대화를 다시 해 볼까?”
“그, 그래도 곤란합니다. 저희는 신용이…….”
“신용이 넘쳐나서 내가 받을 금액을 반으로 깎으셨다?”
“후, 이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이곳은 당신 같은 분을 가두는 목적으로도 설계했습니다.”
“여기에 가둬서 굶어 죽이려고?”
“협상 방법 중 하나죠.”
하여간.
블랙마켓 놈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방법으로 ‘설득’을 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럼.
나 또한 놈들의 방식대로 해 줘야지.
다비의 헛소리에 대꾸하는 대신 천천히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건 정해진 마력 패턴과 키가 없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고객님께서 아무리 강하시다 해도…….”
[괴력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근력 수치 + 600%의 피해를 입힙니다.]
콰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커다란 소리.
몇 겹으로 결계를 쳐 놓은 철문 중심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쳇.
철문을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구멍을 내는 데 그쳤다.
“그래. 아까 하려던 말 더 해 봐.”
“블랙마켓 추천인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다비는 허리를 공손히 숙였다.
* * *
약간의 소란 후.
다비 스미스한테서 소개장을 받아냈다.
“고객님, 부탁이니 제발 사고는 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거 보고.”
추천인이란, 내 신분을 보장해 주는 대리인 같은 거다.
그런 말 있잖아.
보증은 친구나 가족한테도 서 주는 게 아니라고.
이 녀석은 나한테 보증을 들어 준 셈이다.
“그래도 싸게 먹혔다. 그렇지?”
나를 노려보는 다비.
“왜. 할 말이 있으면 해.”
“아닙니다, 고객님.”
“종종 놀러 올 테니까. 너무 꿍해 있지 말고.”
다비가 나한테 허무하게 털려서 그렇지.
블랙마켓에서도 제법 영향력이 있는 인사다.
회귀 전보다 훨씬 빨리 끈을 만들어 두게 되었군.
블랙마켓에서 내 신분을 증명해줄 후원자도 만들어 뒀겠다.
이제 협회장한테 받은 카드를 내밀면…….
“그러면 다음에 보자고.”
지상으로 올라가자, 다비가 금세 내 뒤를 따라왔다.
“사고 칠까 봐 걱정되나?”
“아닙니다. 고객님께서 가시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나오는 거죠.”
“솔직하지 못하네.”
카지노로 올라왔을 때.
“와아아-!!!”
엄청난 환호가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 지배인님, 큰일이 났습니다.”
경비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다비에게 귓속말을 했다.
블랙카지노를 뒤집어 놓은 인물.
“후후훗, 도박이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구나.”
닉스가 칩을 수북하게 쌓아 둔 채,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넌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