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오아시스의 주인, 세트.
이집트 출신의 성좌이자, 해당 신화에서는 악신으로 위명이 대단한 존재다.
전 신왕(神王)이자 형인 오시리스를 열넷으로 토막 내고 신화의 정점에 도달한 신.
후일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에게 밀려났지만, 여전히 강력한 성좌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원래의 역사는 세트와 계약하는 게 핑 레이지, 지영이가 아니란 점?
“스승님, 무슨 문제라도…….”
연신 흔들리는 눈빛.
내 침묵이 길어지자, 지영이가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아니야. 생각할 게 좀 있어서.”
“헤헤, 큰일 난 줄 알았어요.”
“넌 정의의 주시자랑 계약해.”
“의외네요.”
“뭐가?”
“스승님이라면 더 기다렸다가 다른 성좌와 계약하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아테나 정도면 훌륭한 성좌거든. 너랑 잘 맞기도 하고.”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이자, 정의와 영광을 주관하는 성좌.
그리스 신화에서 여러 영웅들을 돌보거나 가호한 수호신이기도 했다.
아- 하고 지영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테나였구나.”
“가호 레벨을 올리면 아이기스 능력도 받으니까. 너랑 잘 맞을 거야.”
아이기스, 혹은 이지스.
‘신의 방패’를 대표하는 성유물이자, 동시에 아테나가 부여하는 가호이기도 하다.
결계에 특화된 지영이한테는 그보다 더 어울리는 가호가 없지.
회귀 전에도 아테나와 계약했으니까.
“와, 대박! 아테나라니!”
한발 늦게 기뻐하는 지영이를 두고 상념에 빠졌다.
세트가 왜 관심을 둔 걸까.
악 계열 성좌가 움직이는 데는 이유가 꼭 있다.
지영이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는데, 세트의 주목을 받았다는 건 계약보다 다른 데 목적이 있다는 뜻.
“카를라, 혹시 오아시스의 주인이 널 지켜보고 있나?”
“네.”
“엔리케야.”
“나도 마찬가지에요, 아저씨.”
“미친.”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문제라도 있느냐?
“그 성좌가 길드원들을 주시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사부님, 오아시스의 주인이라고 하면 제게도 메시지를 보냈었습니다만.”
“응, 그래.”
그거야 알고 있지.
넌 태생이 교만하고 악한 놈이라서 세트가 관심을 가졌던 거고.
회귀 전에는 ‘죽음의 손’이라는 이명으로 중국 암흑가를 주물렀던 놈 아니던가.
갱생이 안 될 것 같으면 죽일지 말지 고민했었으니까.
“왜 이렇게 으스스하지.”
몸을 떠는 핑 레이.
넌 처신 잘해야 한다.
아니면 목 위가 언제라도 허전해질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성좌와 계약하기 전에 나랑 상담하고.”
오른손을 휘휘 젓고는 등을 돌렸다.
연이은 대련 덕에 늘어난 스펙에도 적응을 했겠다.
새로 생긴 의문을 풀어야 할 시간이다.
난 전화기를 손에 쥐었다.
“협회장님이랑 미팅 가능합니까?”
* * *
분당에 위치한 플레이어 협회.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건물 하나를 사무실로 썼는데.
이제는 인근 건물 몇 동을 추가로 매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 뵙는군요.”
한수창은 건물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닙니까?”
“큭, 진호 님은 제 담당이니 나와야죠.”
러시아행에도 따라와서 길드원만큼이나 자주 보는 느낌이다.
“오늘은 용케도 타이밍이 맞았네요.”
“네?”
“협회장님 말입니다. 그 정도 되는 분이면 분 단위로 일정이 잡혀 있지 않습니까.”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흘리는 한수창.
그 반응은 뭔데?
“진호 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일정을 빼신 겁니다.”
“원래는 무슨 일정인데요?”
“외교부장관님과 미팅이 있었던 걸로.”
“농담이 과하시네.”
나는 가볍게 한수창의 어깨를 쳤다.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비로소 현실감이 느껴졌다.
“그 말, 장난……이죠?”
“제가 언제 업무 가지고 농담을 했습니까.”
“나 하나 보자고 장관이랑 약속을 캔슬했다고요?”
“진호 님은 그만큼 중요한 분입니다.”
거참.
자꾸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회귀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국빈 취급을 받을 줄이야.
새삼 부지런하게 살았다는 게 체감되었다.
“그리고 외교부장관께서 오신 이유가 진호 님 덕분이기도 하고요.”
“예?”
“자세한 건 협회장님께 들으시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앞서가는 한수창 팀장.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 솔솔 풍기는데…….
문이 열리고, 여전히 위압적인 덩치의 노인이 흠뻑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게 누구인가. 협회의 자랑이자 영웅이군!”
190센티의 거한.
하얗게 센 머리와 얼굴의 주름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전신에 감도는 활기는 젊은이에 못지않았다.
“협회장님은 한결같으시군요.”
“무슨 말인가?”
“정정하시다고요.”
“허, 정정이라니. 아직 그렇게 불릴 나이는 아니라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꽤 많이 올라갔다지만, 70대면 노인이거든요?
플레이어로 각성하면서 신체 능력이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섰다지만, 그래도 좀 과했다.
“이리 앉게.”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까?”
“뭐가 말인가.”
“저 보자고 외교부장관과 미팅을 취소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핫, 자네니까 가능한 거였지.”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수창 팀장이 설명을 안 한 모양이구먼.”
“제 몫은 아닌 것 같아서요.”
뒷짐 지고 선 한수창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러시아에서 정식으로 감사 표창장과 관세 인하 이야기가 나왔다네.”
“표창장이야 그렇다 치고. 관세는 저랑 뭔 상관입니까?”
“뭐긴. 모두 다 자네가 마경 탐사를 완벽하게 수행한 덕분이지.”
아.
무지개의 휘광석이 준 임팩트가 원체 크다 보니 잊고 있었다.
퉁구스카강 상류에 나타난 마경, 드림랜드.
마경에 거주 중인 괴물들의 정수를 포식하려고 갔었지.
내친김에 회귀 전의 정보를 적당하게 섞어서 세르게이에게 알려 주었다.
드림랜드 지도 사본까지 줬으니.
러시아 플레이어들이 할 일을 대폭 줄여 주기는 했다.
“그게 정부 차원에서 감사를 표할 일입니까?”
“마경이 더 팽창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네.”
“진호 님의 정보 덕에 마경 인근에 내려졌던 대피령도 해제되었다고 합니다.”
한수창이 첨언했다.
이제야 이해가 좀 가는군.
내 기준은 어디까지나 ‘회귀 전’이다.
10대 마경이 팽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애틀처럼 주요 도시가 마경에 삼켜진 경우를 빼면 큰 위험 요소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 시기에는 그런 확증을 가질 수 없었겠지.
“그래서 외교부장관이랑 미팅이 잡힌 거였습니까?”
김우성 협회장은 껄껄거리며 웃음보를 터트렸다.
“내가 말년에 인복 하나는 있다니까.”
러시아에서 표창장을 수여한다는 당사자가 온다니까 미팅을 취소할 수 있었던 셈.
마경 탐색에서 정수도 포식할 겸 협회의 기를 적당히 살려 주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파급이 컸다.
이것도 나비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찾아왔나?”
“협회장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말해보게.”
“협회의 정보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꽤 범위가 넓은 질문이군.”
협회장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1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길드들보다 한 수 위라네.”
“3대 길드보다요?”
“국정원의 협력도 구할 수 있으니.”
“다행이군요.”
나는 안도감을 드러냈다.
이번에 필요한 건 플레이어의 능력이 아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정보력.
국내 3대 길드조차도, 이 부분만큼은 협회를 능가할 수 없다.
“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플레이어 협회의 역량 안에서라면 뭐든지 말해 보게.”
나는 미리 적어 둔 용지를 내밀었다.
-독일: 요하나 뮬러
-이집트: 압둘 하마드
-브라질: 루이즈 아우메이다
…….
10명이 넘는 숫자.
회귀 전, 악 계열 성좌들과 계약을 맺었던 이들이다.
이 명단 만든다고 옛 기억을 얼마나 떠올렸는지, 머리에 쥐가 날 뻔했다.
세트가 벌인 수작질이 단순한 변덕인지.
아니면 악 계열 성좌들의 마수가 벌써 지구에 뻗기 시작한 건지.
잠정적인 계약자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김우성 협회장은 명단을 쭉 훑어보더니.
“알겠네.”
흔쾌히 대답했다.
“부탁드리는 이유가 안 궁금하십니까?”
“자네의 신출귀몰함이야, 이미 한 팀장을 통해서 많이 들었다네.”
신뢰 가득한 협회장의 눈빛.
그러고 보니.
협회장이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파주 게이트 폭주 사태.
휴전선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까지 한 달 정도가 남았다.
“참. 그리고 비무장지대 쪽 감시는 어떻습니까?”
“북한 쪽도 관심이 있나 보구먼. 그쪽이야 괴물들의 땅이 된 지 오래라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도 막을 수 없으니 말이죠.”
한수창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남북 모두 진입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
1차 대침식 이후 게이트들이 생성되었지만, 손을 놓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감시 인원을 늘리는 게 좋아 보여서요.”
“흘흘흘,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자네의 말은 경시할 수 없구먼.”
협회장은 낮게 웃었다.
내 말을 농담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군.
김우성 협회장.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부탁할 건 그게 끝인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든 말해 보게.”
“협회의 블랙 카드, 제가 쓸 수 있습니까?”
“그걸 자네가 어찌…….”
협회장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블랙 카드.
음지의 시장, 블랙마켓을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이다.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비밀스러운 거래장.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겠지.
“쓸데가 있어서요.”
“흐음, 그건 협회 차원이 아니라 내 선에서 대답을 해야겠구먼.”
협회장은 품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민무늬.
어떤 글자나 그림도 없는 단출한 카드였다.
“받게나.”
“감사합니다.”
“자네라면 현명한 곳에 사용하리라 믿기에 내주는 거라네.”
“협회에 피해 끼치진 않을 겁니다.”
“어느 곳에서 사용할지까지는 물어봐도 되겠나?”
“미국입니다.”
“라스베이거스, 지하 경매장이로군.”
난 빙그레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협회장은 내 말을 긍정으로 여기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사람 붙들어 놓고 너무 시간을 뺏었구먼.”
“더 있으면 한수창 팀장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부담 가지지 말고 언제든 말하게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