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흐아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래간만에 잠을 푹 잤군.
육체에 정수를 여럿 동기화시키니, 피로감이 엄청났다.
옥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곯아떨어졌네.
-후훗, 정신없이 자더구나.
불쑥 들이미는 닉스.
영체라서 크게 놀라지 않았다.
“피곤할 만했지.”
-몸은 괜찮으냐?
“딱 좋아.”
넘쳐나는 힘.
간밤에 푹 자기도 했지만.
어제 정수 여러 개를 동기화시킨 게 더 컸다.
급격하게 상승한 스텟.
확 올라간 신체 능력에 적응하려면 훈련 좀 필요하겠네.
-굳이? 그대에게 대적할 상대는 많지 않아 보인다만.
“성좌들의 개입으로 난이도도 올랐잖아.”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음속으로는 닉스의 말에 공감했다.
완성의 경지에 발을 딛기 전에도 전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랭커, 엘렌과 비등하게 싸웠다.
난이도가 올라가든.
다른 차원 플레이어들과 경쟁을 하든.
“어렵네.”
-후훗, 그대에게도 어려운 적이 있느냐?
“지기가 어렵다고.”
-여의 계약자는 겸손함을 더 함양해야 할 필요가 있구나.
“스스로를 잘 아는 거지.”
가볍게 웃고는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탑에 바로 오르긴 그렇고.
강해진 육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훈련장에 내려가자, 토마스 밀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오셨습니까?”
“그렇게까지 깍듯이 안 해도 됩니다, 토마스.”
“전 이게 더 편합니다.”
나이도 10살 이상 많은 양반이 이러니까 적응이 안 되네.
영수 형님이야, 섭외 과정에서 작업(?)을 쳐 놓은 게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아침부터 열심이네요.”
“다들 길드 마스터의 활약에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금칠하시기는.”
훈련장은 이미 훈련 중인 길드원들로 꽉 차 있었다.
이거야 원.
몸 푸는 것도 어렵겠어.
무극, 그리고 옐로우 스톰 팀이 합류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조만간 길드 하우스를 옮겨야겠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이전 문제로 건물을 알아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마스터께 조만간 보고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이 양반, 적응도 빠르네.
훈련 담당으로 맡겨 두었는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척척 했다.
“마스터, 혹 제가 권한을 벗어나는 일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런 월권은 마음껏 하십쇼. 아니다 싶으면 제가 커트할 거니까요.”
토마스가 감동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좀 부담스럽군.
흐흐흠,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떼었다.
“핑 레이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내가 직접 부를 수도 있지만.
토마스의 권위를 살려 줄 겸, 일부러 그에게 지시했다.
“대련이군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핑 레이가 땀에 젖은 채로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사부님.”
“오래간만에 대련이나 하자고.”
“흐흐. 사부님, 이제 저는 예전과 다릅니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핑 레이.
그래.
늘 자만심에 젖어 있는 게 이 녀석하고 어울리지.
대련 상대로 핑 레이를 지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팰 수 있는 길드원은 이 녀석뿐라서.
『화과산의 미후왕이 팝콘을 뜯습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은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제일 나쁜 놈은 따로 있구먼.
* * *
널찍한 훈련장.
핑 레이와 거리를 둔 채, 가볍게 몸을 풀었다.
훈련 중이던 길드원들은 양옆으로 물러나서 대련을 관전했다.
“너희가 쉬면 안 되지.”
난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대련을 핑계 삼아서 쉬려고 해?
“스승님을 보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거든요!”
“지영아, 다음 상대는 너다.”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조퇴 좀 할게요.”
“안 돼.”
어딜 도망가려고?
쯧, 혀를 차고는 핑 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플 수도 있다.”
“사부님과의 대련은 원래 그러지 않았습니까?”
“내가 힘 조절이 어려워서.”
의구심으로 물든 핑 레이의 얼굴.
대답 대신 손을 까딱였다.
“양보해 줄게. 들어와.”
“그럼 사양하지 않고…….”
[고유 능력 - 분신]
[풍둔의 술 - 풍신(風身)]
각 분신의 몸을 휘감는 바람.
본체에 뒤떨어지지 않는 속도로 달려들었다.
손오공을 배후성으로 두면서 줄어든 분신 페널티.
바람 선법으로 보조하니 움직임만 놓고 보면 부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성좌한테 제대로 배웠네.
내공을 다리에 집중.
크게 진각을 밟자, 훈련장의 결계가 출렁거렸다.
백택군림각에 중심을 가누지 못하는 분신들.
“이럴 리가 없는…….”
“없기는 왜 없어?”
지면을 박차면서 핑 레이 본체에게 달려들었다.
화르르륵!
전신을 휘감는 불꽃.
여러 정수를 하위 개념으로 등록해서 한층 강해진 블레이징 소울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확 좁혀진다.
축지라도 쓴 것처럼 엄청난 속도감.
블레이징 소울을 사용한 나조차도 놀랄 정도다.
“……!”
콰아아앙! 폭발음이 터진 직후, 핑 레이가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몸 위에 아른거리는 초록색 방어막.
한계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발동되는 결계다.
어럽쇼.
“힘 조절을 해야 하나.”
일격으로 훈련장 결계가 발동될 줄은 몰랐다.
길드원 중 가장 맷집이 좋은 게 핑 레이인데, 블레이징 소울을 못 버틴다고?
“쿨럭! 사부님. 절 죽일 셈입니까!”
“아니야. 난 제대로 힘도 발휘하지 않았어.”
“결계 발동한 걸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컥컥.”
연신 마른기침을 토하는 핑 레이.
지영이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왠지 모를 억울함.
“핑 레이야, 여기까지만 할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죠. 얻어맞기만 했는데.”
잠시 후.
“항복합니다, 항복!!”
“이제 시작이잖아. 난 몸도 안 풀렸어.”
“아. 그러니까 이제 안 한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핑 레이.
[핏빛 도취를 사용합니다.]
[3미터 안에 있는 생명체를 끌어옵니다.]
[영역의 수문장을 사용합니다.]
시선 고정.
그리고 강제 어그로 스킬까지 사용했다.
“나한테서 시선을 뗄 수 없지?”
“아, 그러니까 좀……!”
핑 레이가 이를 악물면서 고유 능력을 전개했다.
다시 한번 10명으로 늘어나더니, 이번에는 선법을 전개했다.
휘몰아치는 바람.
지면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다리를 휘감는다.
“합!”
“하아압!”
비슷한 기합을 외치면서 달려드는 분신들.
어설프지만 유형화된 기가 봉대 위에 아른거린다.
“벌써 기를 두를 정도가 되었나. 이래서 재능 있는 놈들이란.”
-그대가 할 말은 아닌 듯하구나.
이보세요.
나야 회귀 전에 개처럼 구르면서 겨우 터득한 거라고요.
신준석이나 핑 레이처럼 타고난 무재(武材)가 아니라 경험으로 터득한 거다.
툭 튀어나온 손톱.
실버 팽의 능력을 발동한 후, 내공을 손톱에 불어넣었다.
허공에 그어지는 흑색 선.
산군파랑조를 펼치자, 분신들이 한 번에 터져 나갔다.
하지만.
“이거에 반응했다고?”
핑 레이(본체)는 한 발자국 간격을 두고 산군파랑조에서 벗어났다.
“저도 학습이란 것을 합니다, 사부님.”
“그렇다면 이것도 배워 봐라.”
발을 앞으로 내디디면서 쭉 모은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에 모이면서 날선 형태를 띤 내공.
광서지를 발출하자, 핑 레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건 반응 못 하겠지?
[진동 결계 x 5]
카가가각!
강한 반탄력이 오른손을 밀어낸다.
“지영아, 너는 다음 차례인데 성미가 급한 거 아니냐?”
“우리 모두가 덤벼야 급이 맞을 것 같아서요.”
우리……라.
두근- 두근- 스산한 감각이 목덜미에 드리운다.
백 스텝은 래피드대시의 하위 개념으로 묶어 둬서 쓸 수 없으니.
운류보를 펼치면서 이탈했다.
몸을 뒤로 뺀 직후, 은색 선이 허공을 잘라 냈다.
아쉬운 듯 왼손으로 머리를 꼬는 카를라.
“너희 모두의 뜻이 그렇다는 거지?”
“난 빠질게요, 아저씨.”
미래의 기계 군주, 엔리케가 질색했다.
“엔리케야, 너라고 해서 피해 갈 수 있을 거 같아?”
“누님도 무섭지만 길드장 아저씨가 더 무서운 거 모르나!”
“그건 그렇지.”
지영이가 투덜거리고는 결계를 전개했다.
3 대 1이라.
“마침 잘됐군.”
핑 레이만 상대해 가지고는 몸을 제대로 풀 수 없었다.
“스승님이 저렇게 웃으면 꼭 일이 생기던데.”
“알면서 달려든 게 잘못이지.”
“저는 덜 아픈 방법을 선택한 거예요.”
“길드장님, 이길 거예요.”
세 사람은 전의를 불태웠다.
* * *
30분 후.
셋은 온몸에 멍이 든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으.”
“커윽.”
“아프네요.”
결계가 치명상을 막아 준다곤 해도, 충격 모두 해소하진 않는다.
그게 가능했으면 엘렌이랑 대련한답시고 무인도를 잡거나 하지 않았지.
“이제야 몸이 좀 풀리네.”
나는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마스터, 이번 대련을 진행하는 동안 결계의 힘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수리에 얼마나 들어갑니까?”
“이 정도면 수리보다 새로 치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토마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너무 과하긴 했군.
“길드 하우스 이전, 빨리 추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결계를 새로 설치할 거면 여기가 아니라 새 길드 하우스에 하는 게 맞지.
보호막을 박살 낸 건 아쉽지만, 그 덕에 제법 강해진 육체 능력에 익숙해졌다.
길드원들의 실력도 점검했고.
-한데, 두 사람의 성취가 핑 레이보다 더디게 느껴지는구나.
“성좌가 있잖아.”
배후성.
계약하는 것만으로 능력치가 상승하고, 해당 성좌의 가호를 받는다.
신준석과 홍윤수도 배후성을 두었고.
배후성 계약은 일반적으로 플레이어의 성향과 흡사한 성좌와 하게 되니, 계약 유무가 컸다.
음.
그러고 보니, 남은 길드원들도 맺어 줄 성좌를 알아봐야겠군.
“지영아.”
“헤엑, 헥. 스승님. 왜요?”
“널 주시하는 성좌가 따로 있나 해서.”
“으음. 꽤 많긴 한데,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요.”
“왜?”
“때가 되면 스승님이 조언해 주실 것 같아서 기다렸죠.”
통곡의 벽.
혼자서 고신족의 대군을 막아 냈던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니 낯설었다.
회귀 전의 그녀는 타인에게 의지하기보다 자신만을 믿고 나아갔었는데.
낯선 감정을 꾹 누른 채, 지영이와 눈을 마주쳤다.
“일단 A급 이하는 싹 걸러.”
“알겠어요. 그럼 두 성좌가 남네요.”
“둘이나?”
“헤헤, 스승님 덕분에 인기가 많아졌죠.”
급이 높은 성좌일수록, 저랭크 플레이어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난 특이 케이스인 거고.
지영이의 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벌써부터 S급 성좌가 둘이나 주목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두 성좌명이 어떻게 되나.”
“오아시스의 주인, 그리고 정의의 주시자요.”
잠깐.
오아시스의 주인이면…… 세트잖아.
과거 핑 레이와 계약했던 악신.
그 녀석이 왜 지영이를 관찰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