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쉬이이잇!”
기다란 꼬리가 렉시의 발을 묶는다.
첫 돌진 때는 꽤 재미를 봤지만, 나가들은 눈 뜨고 당해 주지만은 않았다.
“카오오! 카오!”
나가 열 마리가 달라붙자, 렉시는 돌진을 멈춘 채 제자리에서 울부짖었다.
“덩칫값은 해야 할 거 아니냐.”
“카오…….”
“그렇게 울어도 안 불쌍해.”
덩치에 비해 스텟이 빈약한 렉시.
나가 몇 마리를 짓밟아서 쓰러트렸고, 어그로를 끈 걸로 제 역할을 다했다.
타이밍 맞게 완성된 주문.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흔들리는 등 위에서 마력을 재배열하느라 멀미까지 왔다.
이글거리는 화염을 다리 끝 부분, 그러니까 나가 무리가 몰려드는 쪽으로 투척했다.
“쉬쉿. 대규모 파괴 마법이다.”
“막아라.”
쉿쉿거리는 뱀의 숨소리.
한자가 허공에 맺혔다.
데바 신족에게 전해지는 공능.
도법(道法)이다.
나가 몇 마리가 입술을 달싹이자, 허공에 생성된 문자들이 솔라 익스플로전을 붙들었다.
봉(封)이라는 글자 수십 개에 붙들려서 고정된 주황색 구체.
그 안에서 폭발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쉬쉿. 저 인간을 죽여라!”
나가 일부는 바닥으로 꼬리를 차면서 도약했다.
우우우웅-!
창끝에 아른거리는 푸른 입자.
-저치들. 오러를 구현하였도다!
“알아.”
-그대와 같은 실버 등급으로 매칭이 되었을 터.
“종족 차이가 크잖아.”
특별한 깨달음 없이도 성장하면서 오러를 깨치는 종족.
그게 나가다.
“너무 놀랄 필요는 없어. 위력도 모자라니까.”
저놈들이 온전한 오러를 이끌어낼 수 있으면 실버 등급이었겠어?
입자가 흩날리는 게 증거다.
효율과는 동떨어진 마나 소모량.
-미숙한 자들이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거다.”
-그렇다면 장기전으로 가야겠구나.
“아니. 그럴수록 정면으로 부숴 줘야지.”
-하여간, 악취미하곤.
넓게 펼쳐지는 내공.
비익대붕장으로 오러 다발들을 밀어냈다.
단조로운 찌르기.
위력 자체는 오러를 둘러서 굉장했지만, 대붕이 날개를 펴는 데서 만든 장법으로 모두 흘려보냈다.
유(流)의 묘리에 특화된 무공.
갈 데 잃은 창날들이 양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여도 가세하겠느니라.”
닉스가 극야를 전개했다.
사방으로 퍼진 어둠은 벽의 형태로 변신.
막 달라붙었던 나가들을 밀쳐 냈다.
“진호 님! 우리도 돕겠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서 접전 지역에 도달한 플레이어 군집.
글쎄.
도와준다니 마다하지는 않으마.
“쉬쉬쉿. 저 잡것들이?”
“수준 차이를 알려 주겠다.”
나가 중 일부가 창날을 플레이어들에게 돌렸다.
바닥을 미끄러지면서 이동하더니 가까이에 있는 플레이어 하나의 목덜미에 날을 쑤셔 넣었다.
“컥.”
비명 한 줄기와 함께 가루가 된 플레이어.
한발 늦게 탱킹 및 어그로 관리 스킬들을 사용했지만.
[서펜트 스피어]
[오러]
마나를 밀어 넣은 창으로 갑주나 방패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윽,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독이다.”
무너지는 탱커들.
피부에 닿기만 해도 신경 체계를 무너트리는 맹독이다.
“큐어 포이즌!”
“리커버리!”
“안 돼. 치유 주문으로도 해독이 더뎌.”
따라온 플레이어들이 아연실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나가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플레이어 사이를 돌아다니며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다.
“쉬쉿. 이대로 전멸시킨다.”
[뇌둔의 술 - 뇌망을 사용합니다.]
파지지직!
번개로 짠 그물이 나가 무리를 휘감는다.
“좀 따끔할 거다.”
“쉬쉿. 도법으로 풀면 그만.”
후방 지원을 맡은 나가들이 입술을 달싹인다.
뇌망을 뒤덮는 한자.
해주(解呪)라.
직설적인 글자구먼.
“쉬쉿. 이딴 잔재주 정도는 우리의 도법으로 없애 주마.”
“안 없어지는데?”
뇌망에 닿는 순간 튕겨 나는 글자들.
막 주문을 읊고 있던 나가들의 혀가 마구 꼬였다.
“케켁!”
비명을 지르는 나가들.
혀를 깨물어서 피가 나는 놈들도 있다.
“저치들은 왜 저러느냐?”
“주력이 꼬여서 그래.”
도법의 핵심인 주력(呪力).
자신만만하게 도법을 펼쳤다가 역공당했으니, 속이 꼬일 만도 하다.
무림인으로 치면 주화입마 초기에 입문한 셈.
“도법은 선법보다 한 수 아래 능력이거든.”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서 여러 술법을 펼치는 도법.
도법은 깨달음을 얻어서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 선인으로 거듭나려고 만든 기예다.
자연의 이치를 사용자의 의지대로 바꾸는 선법하고는 상성이 안 좋지.
이미 자연지체인 기운이니까.
내 선법이 기초 단계이지만, 상성에서 앞서서 역으로 내상을 입힐 수 있었다.
“하면 아까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한 것도…….”
“마법을 막아 내면 기세 좋게 도법을 더 펼칠 줄 알았지.”
“과연. 그대는 계획이 다 있구나.”
격렬한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대화.
“쉬쉿. 죽여 버리겠다!”
“어차피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니잖아.”
태연하게 대꾸하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막 고함을 질렀던 나가의 육신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쫄기는.”
“쉬, 쉬쉬쉿!”
“여신님, 이제부터는 좀 바빠질 거니까 대꾸 못 해 준다.”
나는 렉시의 등을 가볍게 차면서 전장으로 난입했다.
* * *
나가는 만만치 않은 적이다.
어느 정도냐면.
엘렌을 쓰러트린 오크보다 2배 정도?
뭐, 저 녀석들이 엘렌을 이길 정도까지는 아니고.
기본 종족값이 그 정도라는 거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인데.”
렉시를 돌진시켜서 나가 무리의 선두를 묶고.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빼고 가장 강력한 주문인 솔라 익스플로전을 일부러 사용, 놈들이 도법을 사용하게 유도했다.
그 결과, 후방의 나가 무리도 마비시켰으니.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기 전에 나가 전력 상당수가 무력화되었다.
“쉬쉬쉿!”
“쉬쉿!”
그런데도.
남은 숫자가 훨씬 많아서 그렇지.
“보상은 확실하겠어.”
쏟아지는 살기.
나가들의 매서운 눈매를 마주하면서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쉬쉿. 다른 인간들은 형편없다.”
“쉿. 조심해야 할 건 눈앞의 저 인간뿐.”
일촉즉발의 상황.
채챙!
오러를 휘감은 창들이 빗발치면서 전투 개시를 알렸다.
메탈 반사 장갑으로도 완전히 상쇄시킬 수 없는 공격.
놈들의 창에 맺힌 오러가 문제다.
가성비가 안 좋을 뿐, 위력만큼은 진짜였으니까.
“하아아아!”
다리 인근의 잡음을 날려 버리는 커다란 고함.
나가들의 움직임이 살짝 둔해졌다.
늑대왕 서린의 정수.
[포효]의 디버프 효과가 즉각적으로 적용되었다.
살짝 둔해진 창들의 연계 공격.
고함으로 생긴 미묘한 간극을 이용해서 연계 공격 사이의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메탈 반사 장갑을 사용합니다.]
[암흑 투기를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3중으로 강화한 갑주로 나가의 창을 받아 낸다.
쿵! 측면으로 받았는데도 암흑 투기가 휘청거린다.
오러와 비슷한 성질을 지녔지만, 방어용으로 넓게 두르다 보니 온전히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탐욕의 가호로 침식해서 강화시킨 메탈 반사 장갑도 푹 파였다.
창에 실린 힘을 모두 해소하지 못해서 휘청거리는 몸.
“그대여!”
“신경 쓰지 말라니까.”
진짜다.
나 혼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대처가 가능하다.
지금만큼은 닉스가 마음을 써주는 게 오히려 불편했다.
공격 일부를 허용하면서까지 좁힌 거리.
나가들은 당황하지 않고 내지른 창을 회수, 2차 공격을 준비했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발밑에서 솟구친 극야의 힘.
암영추혼검까지 사용하지 않는 이상, 치명상을 입힐 위력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
나가들의 호흡을 뺏는 정도면 충분했다.
“쉬쉿! 사술이다!”
“쉿! 당황하지 마라.”
당황해 놓고 하지 말라긴.
백택군림각으로 지면을 내리치자, 다리 전체가 흔들거렸다.
시스템 보정으로 무너지지는 않지만, 나가들의 기세를 흩트리긴 충분했다.
[블레이징 소울을 사용합니다.]
전신에 불을 두른 채.
나가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추가로 마나를 불어넣어서 한껏 키워 낸 불꽃.
무리 한가운데서 폭발한 화염이 넘실거리면서 시야를 가린다.
비산하는 연기와 불 사이로 보이는 나가 무리.
극야의 힘과 블레이징 소울을 사용했지만 제대로 된 상처를 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찰과상 수준.
하나씩, 차근차근 적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내공을 불어넣은 손가락으로 가까이에 있는 나가의 목덜미를 찔렀다.
목에 바람구멍이 뚫린 나가가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쇄애액!
어깨 죽지를 노리는 창날.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막는데도 용케 노렸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나가 무리가 흐트러진 진세를 다잡을 거다.
그게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치고받고 싸워야겠지.
그러니까.
“큭.”
창끝이 어깨에 파고든다.
달군 쇠가 피부에 닿는 느낌.
나가의 독이 퍼지면서 신경계를 혼란시켰다.
근데 말이야.
난 독을 품고 사는 거랑 마찬가지거든.
[산성 피가 나가의 독에 간섭합니다.]
[나가의 독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90% 감소합니다.]
완전 무효화까지는 불가능했다.
고작해야 2성급 능력.
나가의 종족 특성인 독에 비해 한 수 뒤쳐졌다.
그 정도면 충분해.
이번에는 탐욕의 가호로 상처 부위를 휘감았다.
어떤 것이든 ‘침식’할 수 있는 가호.
나가의 독에 동기화.
곧장 외부로 밀어냈다.
깨어진 메탈 반사 장갑 사이로 튀는 시커먼 액체.
막 창을 휘둘렀던 나가의 몸에 닿았다.
“쉬시시시시!!”
몸을 비트는 나가.
탐욕의 가호로 성질을 변화시킨 독이다.
놈이 품고 있는 독의 원전이야, 당연히 내성을 가졌겠지만 이건 좀 다를걸?
독으로 쓰러트릴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하지.”
창을 홱 당기자, 독에 걸린 나가가 홱 딸려 왔다.
딱 때리기 좋은 각도야.
[백수제왕무 - 1초식]
[응룡황권을 사용합니다.]
퍼엉!
나가의 상반신이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이제 둘.”
렉시한테 타박할 게 아니었네.
지금까지는 렉시가 나가를 쓰러트린 속도와 비슷했다.
“카오오오!”
나가 무리한테 붙들린 채, 억울하다는 듯 소리 지르는 렉시.
야, 승부는 지금부터니까 너무 애 닳아 하지 마라.
슬쩍 뒤를 보니 닉스가 극야를 넓게 펼쳐서 렉시를 보호해 주었다.
전력을 분산시켜 주면 이쪽도 고맙지.
쉽지 않은 싸움.
[공허 비추기]로 원시종의 정수를 구현한 터라, 스텟 보너스도 줄어들어서 몸도 둔해졌다.
“뭐, 이 정도 페널티 정도야.”
나는 연신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나가 무리의 호흡을 뺏었다.
한순간이라도 놈들이 기세를 되찾으면.
그때는 단순히 귀찮은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더 덤벼 봐라.
결국 이기는 건 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