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길.
맞은편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길가를 따라 이동하는 여러 차량들.
“세르게이군요.”
토마스가 중얼거렸다.
러시아 측 탐사대도 우리를 인지했는지, 속도를 낮추었다.
“한국 팀, 벌써 돌아온 건가?”
지프에서 내린 세르게이.
억울한 듯, 한수창이 입을 떼었다.
“마경에서 이틀을 머무르고 왔습니다.”
“이틀? 당신들이 떠난 지 반나절도 안 됐다.”
“그쪽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까.”
세르게이는 내 부연 설명에 뒤통수를 긁었다.
“시간의 흐름?”
“응. 드림랜드는 현실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거든.”
“벌써 정보를 얻어 온 건가.”
“안 그래도 탐사 결과를 보고하려던 참인데 잘됐군.”
“모두 멈춰. 잠시 쉬어 가겠다.”
뒤따라오던 차량들도 그 자리에서 멈췄다.
마경으로 향하는 길.
도로도 한적해져서 진로 방해할 일은 없었다.
나는 이틀간의 탐사 결과와 회귀 전의 지식을 절묘하게 섞어서 세르게이에게 들려주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세르게이.
“……대단하다.”
“뭐가?”
“우리가 준비만 하고 있을 때 그만한 정보를 파악하다니.”
“뭐, 우리 팀이 좀 유능해서.”
“정말이지. 부끄럽군.”
“근데 내 말을 의심하지 않는 건가?”
“의심할 필요가 있나. 후에 교차검증하면 될 뿐.”
나는 욕망의 주머니에서 드림랜드 지도를 펼쳤다.
마경의 정보가 기록된 아이템.
세르게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너무 큰 것을 얻었군.”
“이보세요. 누가 이걸 준대?”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냐!”
“사본 준다고, 사본.”
뺨을 긁는 세르게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도 한국의 조력 덕에 시작이 한결 쉬워졌군.”
“위험하고 불가사의한 곳이니까. 몸 사리면서 탐사해라.”
“큭. 무사히 돌아와야 이 빚도 갚겠지.”
세르게이. 회귀 전에 진 빚은 이걸로 갚은 거다.
회귀라는 증명되지 않은 수단을 쓰려고 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나를 지지해 주었던 녀석.
세르게이가 없었으면 시간과 관련된 성좌들의 정수를 모아 회귀한다는 작전은 시행조차 못 했을 거다.
뭐, 당사자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속에 담아 둔 빚 하나가 덜어진 느낌이다.
드림랜드 지도 사본을 넘겨준 후, 곧바로 귀국했다.
“아, 여긴 따뜻하군요.”
화색을 띤 토마스.
시베리아의 혹독한 환경에 고생깨나 한 모습이다.
“어떠셨습니까?”
“미스터 유를 곁에서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봐 줄 사람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토마스의 진가인 육성.
나야 이미 한번 완성을 이룬 몸이지만, 길드원들은 아니거든.
실망하지 않을 거요, 분석관 양반.
역천 길드원들은 모두 찬란한 빛을 품고 있는 원석이거든.
그러면 길드원 육성은 토마스에게 맡겨 두고.
“바벨탑이나 올라가야지.”
-실버 등급은 길드원들과 함께 공략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원래는. 근데 난 혼자가 아니잖아.”
닉스.
그리고 렉시.
둘이라면 조금 어려워도, 공허 비추기로 구현한 렉시가 추가되면서 승률이 확 올라갔다.
“이왕 움직일 거면 혼자 먹는 게 좋잖아.”
-저 못된 심보 하곤. 사람이 늘 한결같구나.
낄낄거리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바벨탑 어플.
드림랜드를 다녀와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접속하는 기분이다.
[매칭 중]
[27/100]
[35/100]
36층 미션은 전 세계 단위로 매칭된다.
빠르게 차오르는 숫자.
100명이 되자마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미 실버 등급 최대치인 200레벨에 도달했겠다, 빠르게 클리어하고 승급전이나 준비해야지.
그 순간.
하얗게 물든 시야 위로 글자가 새겨졌다.
『지혜의 탐구자는 현재 미션 난이도와 당신의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수의 성좌가 지혜의 탐구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지혜의 탐구자가 난이도 상승을 제안합니다.』
『지혜의 탐구자는 당신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주시 중인 성좌들이 영성을 소모하여 미션에 개입할 수 있게 바뀐다고 알려 줍니다.』
난이도 상승.
26층하고 비슷한 상황이다.
차이가 있다면, 26층처럼 구조 자체가 바뀌기보다는 관전 중인 성좌와 관련된 내용물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
굳이 따지면 바알이 튜토리얼에서 늪의 마왕에게 빙의한 상황과 비슷했다.
[탑 시스템이 성좌 다수의 건의를 검토합니다.]
[대상 - 유진호]
[제안: 성좌의 개입에 페널티 상쇄]
[미션 클리어 시 보상 증가.]
뜻밖의 제안이군.
오딘 녀석, 무슨 생각이지?
-그대에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구나.
“난이도가 올라가는데.”
-여의 계약자라면 어떤 고난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을 터.
태연하게 말하긴.
난 턱을 만지작거렸다.
미국의 탑 랭커인 엘렌하고도 일전을 벌일 정도의 전투능력.
플래티넘 구간까지는 큰 위기가 없을 거다.
성좌가 개입한다 쳐도 미션의 큰 틀이 바뀌지 않으면 통과가 가능할 터.
단지.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나는 시간을 돌리기 전, 탑 곳곳에 숨겨져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수집했다.
현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과 보상.
예를 들면 내샨 대공에게 아다만티움을 먹이고 공허의 보석을 얻는다든지 말이다.
“정보의 이점을 포기하긴 아쉬운걸.”
-하긴. 플래티넘까지는 제법 알려져 있지 않느냐.
뉘앙스는 다르지만.
닉스의 말은 핵심을 짚었다.
『지혜의 탐구자는 시련의 구조를 틀면서 개입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확언합니다.』
뭐야.
오딘이 왜 이렇게 애가 닳아 있는지 모르겠군.
애시르 신족의 지배자.
그의 관심사는 오직 ‘멸망’의 가능성을 살펴서 다가올 종말의 때를 막는 것뿐이다.
회귀 전에도 플레이어들을 [에인헤야르]로 거둬가는 것 말고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성좌인데.
어쨌든.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네.”
[탑 시스템은 제안의 형평성을 고려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검토 결과, 문제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성좌들이 개입하면서 미션 난이도가 대폭 상향되었습니다.]
강화된 미션 난이도.
회귀 전에는 없던 흥미로운 상황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대는 역시 영웅의 상이니라.
“왜?”
-더 큰 고난 앞에서 웃지 않느냐.
고난보다는 미션을 클리어했을 때 따라올 보상 때문이지.
나는 굳이 정정해 주는 대신 감았던 눈을 떴다.
* * *
[바벨탑 - 36층]
[투스카니 다리]
[미션 - 제국의 방벽]
바르칸과 아레온.
투스카니 다리를 사이에 두고 수백 년 동안 다툰 바르칸과 아레온 제국.
프란 강 사이에 놓인 투스카니 다리를 제외하면 서로의 영역에 진입할 수 없기에, 대규모 병력을 움직이기보다는 작은 분쟁만 간간히 벌였습니다.
이제는 다리의 소유자를 정해야 할 때.
다리 너머에 있는 상대 측 수문장을 격파하십시오.
▶목표: 아레온 제국 수문장 격파.
▶특이 사항 - 다수의 성좌 개입
성좌의 개입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바르칸 제국 소속이 됩니다.
상대 진영은 이번 미션에 개입한 성좌를 섬기는 차원 중 무작위로 선택된 곳의 플레이어 집단입니다.
한강보다도 더 넓은 강.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의 흐름 위로 긴 다리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속속들이 미션에 진입하는 플레이어들.
이내, 플레이어들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성좌의 개입?”
“다른 차원은 또 무슨 말이야.”
“그 말대로라면…… 미국 랭커 팀을 쓰러트린 오크가 나오는 거 아닌가?”
웅성웅성-.
당황할 만도 하다.
이런 건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처음이거든.
26층처럼 성좌들이 특정 미션에 개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지만.
-다들 혼란해하는구나.
“뭐, 그럴 만하지.”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군중을 헤치며 다리 위로 걸어 나갔다.
돌발 행동에 하나둘 쏟아지는 눈빛.
일부는 내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놀라거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명성이라는 게, 이럴 때는 편하다니까.
굳이 설득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된다.
“성좌의 축복이 더해진 보상을 받고 싶으면 알아서 따라와라.”
[공허 비추기를 사용합니다.]
[대상은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입니다.]
[이미 구현한 정수입니다. 마력 스텟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카오오오!”
렉시는 소환되자마자 목을 쭉 빼면서 괴성을 질렀다.
유명 영화의 명장면이 떠오르네.
가볍게 도약해서 렉시의 등에 올라탔다.
“앞으로 가자.”
“카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렉시.
잠시 후.
“도, 돌격!”
“유진호 님을 따르자!”
100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소리를 지르며 렉시의 뒤를 따랐다.
-호오, 저들의 기개가 제법이지 않느냐.
“얼마나 버티려나.”
-상대 측이 누군지는 모르나 참으로 불쌍하구나.
“아니, 우리 편 말하는 건데.”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수준이 낮았다.
그러니까 뒤에 찾아올 멸망을 피할 수 없었지.
당장 엘렌만 해도 오크 투사한테 꺾였잖아.
종족의 기본값만 놓고 보면 인간이란 종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탑 시스템의 보정 덕분에 규격 외의 힘을 얻은 것뿐.
“그래도 살아남으면 보상 하나는 엄청날 거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구나.
“크크크, 설마 내가 지겠어?”
시스템이 검토해서 형평성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정도다.
그 말인즉슨.
이번 미션에서 다른 종족과 매칭이 된다고 해도 밸런스가 맞다는 말이지.
“어느 종족이랑 붙을까.”
다리를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 측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가로군.”
인도 신화로 알려진 데바 신족을 섬기는 이들.
상체는 인간이요, 하체는 뱀인 반인반사(半人半蛇)의 종족이다.
남녀 할 거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서 정면을 보기가 껄끄럽군.
나가들은 기다란 꼬리로 바닥을 쓸면서 다가왔다.
“저 빈약하게 생긴 게 지구인인가?”
“가장 최근에 차원 간 경쟁에 끼어든 종족.”
“전체적으로 약하더군. 쉬쉿.”
“금방 끝내자고.”
얼씨구.
벌써부터 다 이긴 줄 알고 있네.
“렉시야.”
“카오오오오!”
등을 가볍게 치자, 렉시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크기에 비해 빈약한 스텟.
티라노사우루스 특유의 치악력이나 꼬리 공격도 제대로 펼치기 힘들었지만.
저 육중한 몸으로 짓누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쉬잇. 고작해야 지구인의 소환수다. 덩치만 클 게 분명…….”
쿠웅!
렉시의 발에 짓눌린 나가 하나가 가루로 화했다.
“응? 뭐라고 했냐?”
자식.
말이나 다 하고 죽을 것이지.
“카오오오!”
“그래. 다 밟아 버리고 가자.”
렉시는 쌍심지를 켠 채, 달라붙는 나가를 하나씩 짓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