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놓아라, 이 잡것아!」
바동거리는 검은 파라오.
턱이 들썩거린다.
미안하지만 티라노의 치악력은 원시종 중에서도 최강이거든.
무공을 못 쓴다지만.
[암흑 투기를 사용합니다.]
기 발현과 흡사한 스킬.
위력은 한 수 모자라지만, 어떤 부위에도 두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날카로운 치아 위에 암흑 투기를 두르고는 검은 파라오를 몇 번이고 씹어 댔다.
콰득! 콰득!
“더럽게 질기네.”
「무, 무엄한 것! 짐을 그 더러운 아가리 속에…….」
“말도 더럽게 많고.”
급격하게 줄어드는 검은 파라오의 기운.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실버 등급 한계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기어 다니는 존재.
아니지, 검은 파라오는 잘근잘근 씹혀서 소멸했다.
이럴 거면 오크의 두 팔을 어렵게 구현할 필요가 없었겠는걸.
티라노사우루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치악력을 무공과 결합할 방법도 연구해 봐야겠어.
퉤-!
검은 파라오의 거죽을 내뱉고는 공허의 거울을 해제했다.
“아으으.”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신음.
뒈질 것처럼 아프다!
히페리온의 창이 심장을 꿰뚫었을 때와 비견될 정도의 고통이다.
-너무 엄살 부리는 것 아니더냐?
아파서 대꾸할 힘도 없다.
한계 이상으로 혹사시킨 육체.
[재생]이나 [변이]로는 통증을 줄일 수 없다.
궁여지책으로 힐을 사용해도 줄어드는 고통은 미미했으니.
치유 주문과 관련된 정수를 더 포식하든 해야지.
끙끙거리고 있자, 닉스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거두더니 실체화했다.
“여에게 기대어라.”
닉스의 무릎에 얌전히 머리를 맞대고는 심호흡을 했다.
줄어드는 통증.
“후, 진짜 이건 적응이 안 되네.”
“이번 적은 여러모로 그대와 닮은 상대였구나.”
“시간을 끌면 필패였어.”
검은 파라오의 유일한 약점은 ‘경험’이다.
[시간의 모서리]에서 요그 소토스가 그러했듯.
이번 승부의 관건도 시간이었다.
놈에게 시간을 줄수록, 여러 능력을 다루는 데 익숙해졌을 거다.
“후훗, 동류를 만난 느낌은 어떻느냐?”
“끔찍한 혼종이야.”
난 쳇, 하고 혀를 찼다.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래도 취할 건 취해야지.”
평원 일부를 덮을 정도로 넓었던 검은 파도.
이제는 옷가지 크기의 거죽만 남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괴물은 정수를 남기는 법.”
[기어 다니는 존재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전설]
[포식한 정수: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공허 비추기가 추가됩니다.]
[공허 비추기]
등급: ★★★★★
분류: 액티브
사용자가 100% 포식한 정수를 지정, 공허의 힘으로 만든 육체를 씌워서 생전의 모습으로 구현한다.
정수를 구현하는 동안에는 해당 효과를 볼 수 없다.
공허 비추기로 정수를 구현할 경우, 마력 스텟이 영구적으로 소모된다.
구현한 정수의 수준에 맞춰 재사용 시간도 달라진다.
붙들어 놓은 혼을 구현하는 능력이 적절하게 변화된 형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뭐가?”
“그대의 능력을 일부 소모해야 하지 않느냐.”
“뭐, 그건 맞지.”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봉인기로 여길 만큼의 페널티.
근데 말이야.
난 포식으로 능력치를 꾸준히 올릴 수 있거든.
“정수를 100% 포식해도 마찬가지.”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포식한 용아병의 정수.
포식 때마다 마력 스텟을 추가로 늘려 주기에, 혼자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금이야 모든 능력치에 추가 포식 효과가 붙는다지만.
튜토리얼부터 쌓아 올린 탓에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니까 조금은 써도 돼.”
“하면 처음으로 구현할 정수는 무엇이더냐?”
“크크크. 그건 이미 정했어.”
[공허 비추기를 사용합니다.]
[대상은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입니다.]
[전설 등급 정수를 구현합니다. 마력 스텟 200이 영구적으로 소모됩니다.]
[구현한 정수의 원주인이 사용자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레벨과 능력치가 하향 조정됩니다.]
[180일 후에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심장 언저리에 감도는 보랏빛.
공허의 힘이 내 마력을 집어삼켰다.
회귀 전에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지만, 기분이 좋진 않군.
충분한 마력 스텟을 흡수한 공허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꾸물거리면서 뼈대를 세우는 보라색 기류.
이내 힘줄과 근육이 뼈에 들러붙으면서 생물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먼 옛날에 지구를 지배했던 종족.
“카오오오오!!!”
티라노사우루스가 울부짖었다.
* * *
[공허 티라노사우루스]
나이: 1
레벨: 200
종족: 원시종(공허)
직업: 투사
*능력치
근력: 751
민첩: 503
체력: 735
맷집: 754
마력: 308
*사용자의 레벨에 맞춰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능력치에 비해 커다란 육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민첩 페널티가 붙습니다.
“카오오오…….”
힘차게 비명을 지른 직후에 주저앉는 원시종.
“이 또한 계획의 일환이더냐?”
“설마.”
난감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티라노사우루스를 구현한 건 좋았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골다공증(?)을 뽑을 줄이야.
200레벨이라고는 보기 힘든 압도적인 스펙이지만, 원체 몸뚱이가 크다 보니 페널티가 붙었다.
“쓸모없는 녀석.”
“카오…….”
“마력 식충이. 덩칫값도 못 하는군.”
티라노는 주둥이를 쭉 내밀었다.
뭐야.
좀 혼냈다고 해서 반기라도 드는 거야?
“카오. 카오.”
내 허벅지 근처에 주둥이를 대고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비비는 티라노사우루스.
지가 무슨 고양이인 줄 알아.
덩치가 원체 커서 살짝 닿는데도 몸이 갸우뚱거린다.
“후훗. 크기는 산만 한 것이 귀엽구나.”
“카오오. 카오.”
닉스가 만지작거리자 고롱거리는 게 상당히 좋은 모양이다.
어휴.
“한데 이상하구나. 그대가 이조차도 예상 못 했을 리 없건만.”
“이래서 눈치 빠른 여신님은.”
쳇.
나는 혀를 찼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는 용아병보다도 강하다.
제대로 구현했으면 챌린저 등급의 괴물이었을 터.
내 등급인 실버에 맞춰서 스텟을 조정해 버렸으니, 제힘을 발휘할 리 없지.
“여신님이랑 마찬가지야.”
“이 귀염둥이도 레벨을 올리고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더냐?”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귀염둥이가 뭐니.
15미터 길이의 공룡을 보고 그렇게 부르는 건 여신님밖에 없을 거다.
“내 경험치 일부를 먹긴 한데. 어차피 버려지는 게 많으니까.”
지금도 한계 레벨에 도달해서 경험치가 허비되잖아?
닉스가 내 경험치를 야금야금 잡아먹는데도 흘리고 있으니.
버려지는 경험치도 살릴 겸.
강력한 전력을 미리 확보해 둘 생각으로 티라노를 구현했다.
“카오. 카오오.”
“그렇다고 네 모자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카오오…….”
풀이 죽은 티라노사우루스.
“그대여, 이 귀염둥이를 언제까지 너라고 부를 셈이더냐?”
“여신님이 애칭이라도 붙여 주든지.”
“렉시가 좋겠구나.”
“카오. 카오오.”
티라노사우루스가 신난 듯이 꼬리를 휘둘렀다.
쿵! 쿵!
평원이 들썩인다.
“두 번 신나면 이 땅을 다 갈아엎겠군.”
“후훗. 그대가 빚어낸 피조물이니 친절하게 대해 주거라.”
“카오오! 카오!”
티라노사우루스, 아니 렉시가 항의했다.
“알았으니까. 슬슬 돌아가자”
“지도를 얻은 후에도 여기에 더 머무를 셈이더냐?”
“아니. 필요한 건 다 얻었다.”
드림랜드 북부와 동부, 그리고 중부는 위험지역이다.
내 수준으로는 살아남는 게 고작.
필요한 정수가 더 있지만, 목숨을 걸 만큼 급하지는 않다.
“렉시, 우리를 태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카오오! 카오오!”
콧김을 킁- 하고 불더니 고개를 숙이는 렉시.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올라타는 순간, 지면을 차면서 질주했다.
“속도는 나쁘지 않네.”
“카오오오!”
내 칭찬에 흥이 난 듯 더 속도를 올리는 렉시.
문득 의문 하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신님, 근데 왜 렉시야?”
“문제라도 있느냐.”
“꼭 여성 이름 같잖아.”
“맞도다.”
……얘, 암컷이었구나.
나는 입을 쩍 벌렸다.
* * *
도시 근처에 다다르자 렉시를 공허로 되돌렸다.
“그대의 마력을 소진해서 불러 놓곤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한번 등록하면 언제든지 소환과 역소환할 수 있다.”
“과연. 편리하구나.”
소멸하지만 않으면 장소를 불문하고 불러오는 게 가능하다.
“궁금한 게 있도다.”
“뭔데?”
“평원에서 쓰러트린 존재. 한 객체의 정수를 포식하지 않았느냐.”
“아, 그건 유니크한 놈이라 그렇지.”
바벨탑으로 치면 네임드 몬스터.
명색이 니알라토텝의 기운을 받은 괴물이다.
기어 다니는 존재는 여러 우주를 통틀어서 하나만 있다.
“더 볼 일은 없겠구나.”
“아니. 핵을 이루는 녀석은 니알라토텝에게로 돌아갔을 거야.”
검은 파라오.
네프렌-카는 니알라토텝에게 귀속되어 있다.
정수 포식을 해도 영혼까지 사라지진 않으니 자동으로 돌아갔겠지.
회귀 전에도 놈의 정수를 포식했지만, 얼마 후에 드림랜드에서 다시 출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흉물이 되살아나다니. 참으로 끔찍하구나.”
몸서리치는 닉스.
“당분간 볼 일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손사래를 치고는 항구도시 달라스 린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기어 다니는 존재를 사냥할 줄이야.”
“약속한 걸 잊진 않았겠지?”
“물론이지. 받게나.”
드림랜드 전역을 기록해 둔 지도도 손에 넣었다.
나야 드림랜드의 특성을 얼추 기억하고 있지만, 현시대의 인류는 아니었다.
세르게이한테 전해 주면 엄청나게 좋아하겠군.
탐사를 마친 후, 베이스캠프로 삼은 드림랜드 남부로 돌아왔다.
“홍윤수 선배님, 고생깨나 하신 것 같군요.”
“말도 마십쇼, 길드장님. 동부는 아주 끔찍한 곳이었으니까요.”
뱀 인간 우스 나가라이의 영역은 사람이 갈 만한 곳이 못 된다.
홍윤수를 드림랜드 동부로 보낸 것도 얻을 게 없어서였거든.
또한.
그의 기동력이라면 위험천만한 동부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애쓰셨습니다.”
“성과가 많지 않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운이 좋았군요.”
태연한 표정으로 드림랜드 지도를 내밀자,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 마경의 지도입니까?”
“예. 여기에도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있어서 부탁 하나를 들어주고 입수했습니다.”
“정말이지. 길드장님은 대단하십니다.”
“후배는 어디에 던져 놔도 굶어 죽지는 않겠어.”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홍윤수와 신준석.
두 사람의 격렬한 반응에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마경에 대한 정보는 충분한 것 같으니 돌아가죠.”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며칠 동안 이어진 드림랜드 탐사.
유의미한 결과를 거둔 채, 이르쿠츠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