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대여, 네크로미콘의 사본에는 기어 다니는 존재도 기록되어 있느냐?
“응. 드림랜드 서부를 돌아다니는 네임드 몬스터다.”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배회라. 발품과 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겠구나.
“아냐. 적당히 냄새만 풍겨 줘도 올걸?”
도시에서 거리를 둔 후.
심장의 마력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만큼이나 마력에 민감한 괴물.
마력을 쉼 없이 생산하는 혼원룡의 심장 덕에 큰 소모 없이 미끼를 뿌렸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지평선이 검게 물들었다.
-밤이 찾아오는 것치고는 이상하구나.
“저건 밤이 아니야.”
-그렇다는 건…… 설마?
“기어 다니는 존재.”
평원을 검게 물들이면서 기어오는 존재.
아니, 기어온다기보다는 해일이 휘몰아치는 형상에 가까웠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어둠의 장막.
아랫부분에 달린 수많은 팔들이 지면을 긁으면서 어둠을 움직였다.
-제법 흉측한 몰골에 적응했다 생각했다만 오산이었구나.
한숨을 쉬는 닉스.
그때.
손등에 박힌 수정이 파르르 떨렸다.
“관음하는 놈이 둘로 늘었네.”
미간을 찌푸리니 닉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맞다. 그 수정은 무엇이더냐?
“빛나는 부등변다변체.”
-꽤 요란한 이름이로구나.
[빛나는 부등변다변체]
등급: 신화 / 분류: 성유물
내구도: 50/10,000
시공간을 초월에서 어디에든 있는 문입니다.
요그 소토스는 어떤 성좌의 부탁으로 빛나는 부등변다변체를 만들었지만, 왜 만든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조각은 크기가 너무 작아서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현재 사용할 수 없는 기능입니다.]
*[현재 사용할 수 없는 기능입니다.]
…….
보다시피.
말이 좋아야 신화 등급 성유물이지, 제 기능조차 발휘하지 못한다.
-빛 좋은 개살구로구나.
“그래서 다행이지.”
외신들의 성유물은 하나같이 위험하다.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도 마찬가지.
이 아티팩트의 진가는 심연 속에 머무는 ‘어둠의 유령’을 불러낼 수 있는 거다.
말이 좋아야 유령이지.
실제로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분신이다.
한번 불러내면 피아 구분 없이 반경 100킬로미터 안에 있는 생명체들을 학살하는 괴물.
“요그 소토스가 관찰용으로 박아 둔 거야.”
-손오공에 이어 다른 성좌의 관심이라. 참으로 인기가 많은 사내로고.
『화과산의 미후왕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은 외신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놓지 말라 경고합니다.』
경고는 무슨.
손오공의 메시지를 휙 치우고는 정면을 주시했다.
“여신님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어.”
-그렇게 강적이더냐?
“말단이기는 해도 화신체거든.”
니알라토텝.
요그 소토스 다음가는 아우터 갓.
평원을 잠식한 어둠은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발톱 정도?
아니. 발톱도 아깝군.
발톱에 낀 때 정도의 존재다.
-허, 성좌의 잔재에 불과한 것과 전력으로 다투어야 하다니.
“꼬우면 힘 되찾으시든가.”
-여가 무엇부터 도우면 되겠느냐?
닉스는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상황 봐서 동기화해서 내 극야 좀 컨트롤해 줘.”
-여에게 맡기어라.
선법과 닉스의 가호, 그리고 보조 마법.
각종 버프를 사용하고는 아르스 게티아까지 들었다.
「……!」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울음.
바벨탑이 세워지면서 모든 언어가 통합되었지만, 외우주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냉혈 스킬이 발동됩니다. 냉정한 마음이 유지됩니다.]
“넌 개도 아니면서 시끄럽게 짖어 대냐?”
소음 공해로 사람 귀를 어지럽히는 건 틴달로스의 사냥개로 족하다.
아르스 게티아에 불어넣은 암흑 마나를 해방.
막 완성시킨 바르바토스의 철퇴로 기어 다니는 존재를 내려쳤다.
휘청거리는 검은 파도.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이한 풍경이다.
바르바토스의 철퇴가 가격한 부위가 푹 파이더니, 넓게 펼쳐지면서 더 넓어졌다.
-저 흉측한 것의 화만 돋운 것 같구나.
“마냥 그렇진 않아. 저놈은 형태가 안 정해졌거든.”
-결국에는 저 어둠을 모두 살라내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정답.”
시커먼 파도에서 튀어나온 손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친다.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는 괴물.
기어 다니는 존재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생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기괴한 형체.
기어 다니는 존재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괴물이다.
끝에서 끝까지, 약 200미터가량 되며 높이는 10미터에 달한다.
놈을 보고 괜히 해일 타령한 게 아니란 말이지.
「너도 우리와 하나가 되자.」
「외로워.」
「춥다. 배고프다.」
팔 사이로 돋아난 입들이 제각각 이야기를 했다.
기어 다니는 존재에게 잡아먹힌 이들.
더 이상 ‘객체’로서 살아 있다기보다는 사념이나 망집에 가까운 혼의 흔적들이다.
-참으로 시끄럽구나.
미간을 찌푸리는 닉스.
당연하게도, 저 목소리 하나하나에는 정신을 오염시키는 기운이 섞여 있다.
저 검은 파도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게 제정신일 리 없잖아?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금속화를 사용합니다.]
길게 늘어난 손톱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산군파랑조.
손끝에서 방출된 날카로운 기가 검은 파도를 할퀸다.
철퍽, 철퍽.
바닥으로 떨어진 수많은 손들.
이내 검은 파도에 다시 흡수되더니 형태를 바꾸었다.
-촉수로구나. 조심하거라!
한 번이라도 낚이면 저 파도에 삼켜지겠지.
그러면 끝이다.
기어 다니는 존재는 무수한 생물체를 자신에게 동화시켰다.
하나이자 군체인 끔찍한 괴물.
검은 파도에 휩쓸리면 여태 흡수한 혼들이 날 탐할 것이다.
내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상황.
기어 다니는 존재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면 일격에 끝나 버리는 승부다.
반면에 무공이나 암흑 마법으로는 제대로 피해를 입힐 수도 없고.
“불합리하네.”
나는 픽 웃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불합리한 전투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다.
쾅! 쾅! 쾅!
뒷걸음질 치자, 촉수 다발이 방금 전에 서 있던 곳을 후려쳤다.
“블레이즈.”
발자국에서 솟구치는 화염.
파이어 웜의 정수에서 얻은 1성 급 스킬, 블레이즈다.
-그 스킬은 오래간만이로구나.
“딱히 쓸데가 없었으니까.”
-하면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더냐?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 돼.”
기어 다니는 존재는 단기간에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이다.
조금이라도 놈의 몸집을 깎아내야 하는데.
블레이즈 스킬은 소모전에서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
시너지 효과로 공격력도 조금 늘어나 있으니까.
-하나, 도망만 가서는 이길 수 없느니라.
“누가 도망친대?”
운류보를 최대로 전개.
기어 다니는 존재를 크게 돌았다.
한발 늦게 움직이는 촉수 다발.
아까도 말했지만, 놈은 하나이자 군체다.
여러 의식이 섞여 있기에 멀티태스킹에 능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연계 공격처럼 협력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엉킨다는 거다.
놈의 주위를 크게 도니 촉수 다발이 날 쫓던 중에 서로 부딪쳤다.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거다.」
종속된 혼들끼리 혼란을 일으키니, 이번에는 수백으로 갈라진 손이나 촉수를 뭉쳤다.
훨씬 굵어진 촉수와 손들.
하나하나가 아름드리나무의 밑동 정도로 커다랬다.
-이러면 서로 꼬일 일은 없어 보이는구나.
“내가 더 편하지.”
기어 다니는 존재의 힘도 무한하지는 않다.
지금이야 칼로 물을 베듯 전혀 피해가 없어 보이지만.
놈의 힘을 소진시킬수록 검은 파도의 영역도 줄어들 것이다.
밀려드는 촉수 다발을 향해 응룡황권을 내질렀다.
콰드득! 권기에 닿자마자 뭉개진 촉수.
크게 돌아온 촉수 두 개가 양쪽 옆구리를 노린다.
시간차 공격.
이 정도는 익숙하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극야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려서 촉수들을 붙들었다.
툭, 하고 끊겨 나가는 극야.
붙든 것은 1초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주먹을 거두고는 봉황각으로 촉수 하나를 더 불사른 후, 검은 파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후욱.”
눈이 감긴다.
육신의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부담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기어 다니는 존재와 닿는 것만으로도 외우주의 정신오염에 잠식되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전력 질주를 한 후에 철봉을 하는 느낌.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찼는데도 팔을 움직여야 한다.
심호흡과 함께 정신적인 피로감을 떨쳐 내는 순간.
무수한 입이 검은 파도 위에 맺혔다.
[공허 파헤치기]
[쭈그러트리기]
[위더 바디]
…….
공간 일부가 쭈그러지고.
육체의 생기가 빠져나간다.
검은 파도 위에 맺힌 입들이 쏟아내는 이계의 저주.
태풍이 불어 닥치는 것처럼, 압도적인 저주의 힘이 몰아쳤다.
혼미해진 정신.
이 순간에도, 우선적으로 해주해야 할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극야의 힘으로 일그러진 공간에 개입.
기어 다니는 존재의 기운을 몰아내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일그러진 공간에 붙들렸던 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이자, [육감]에 몸을 맡겼다.
두근- 두근-.
시간 차로 들이닥치는 위험 신호.
[백수제왕무 - 10초식]
[백택군림각을 사용합니다.]
대량의 내공을 지면에 불어넣으니, 평지에 붙어 있던 검은 파도가 덩달아 휘청거린다.
왼손으로는 힐 주문을.
극야의 힘으로는 몸에 들러붙은 기운을 베어 냈다.
그러면서도 오른팔로 무공을 펼치면서 기어 다니는 존재의 촉수를 막았다.
쾅!
등 뒤를 가격하는 커다란 충격.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커다란 촉수가 등을 후려치자, 충격으로 중심이 무너졌다.
한순간이지만 시야가 하얗게 물들 정도의 충격.
두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쓰러지지 않는 게 고작이다.
다음은 피하거나 쳐 낼 수 없다.
[축지(縮地)를 사용합니다.]
[혼돈의 힘이 축지에 간섭합니다.]
[마법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축지에 대한 간섭이 무효화됩니다.]
[정상적으로 이동됩니다.]
공허의 힘에서도 자유로운 건 이미 심해의 주술사와의 전투에서 확인했다고!
메탈 반사 장갑을 두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수십 미터나 벌어진 거리.
방금 전에 꽤 많은 힘을 소모했는지, 기어 다니는 존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얌전히 있어라.
이미 [아르스 게티아]의 주문을 사용했지만.
나한테는 꽤 강한 마법 공격이 하나 더 있거든.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이글거리는 구체가 검은 파도 위에 멈추는 순간.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