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시간의 모서리]에서 나온 순간.
“푸하!”
여태까지 참아 왔던 숨을 터트렸다.
-그대여, 괜찮으냐?
“아니. 다리 힘 풀렸으니까 부축 좀 해 줄래.”
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어깨를 붙드는 손이 아니었으면 바닥에 널브러졌을지도.
내 말을 듣자마자 실체화한 닉스가 붙들어 준 덕에 흉한 꼴을 피했다.
축축해진 등.
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와,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여기는 탑이 아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는 현실 세계.
회귀 전에는 없던 ‘변수’로 요단강에서 발목을 적셨다.
“안 되겠구나.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도다.”
“지금은 아니야.”
“이곳은 여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존재가 있는 곳이니라.”
“그래도 무사히 통과했잖아.”
“여가 모를 줄 아느냐? 그대의 목숨을 건 도박이 통하지 않았으면…….”
닉스가 말끝을 흐렸다.
용케 눈치챘군.
“맞아. 죽었겠지.”
난 순순히 인정했다.
극야로 만든 검을 휘두를 때, 정말로 목숨을 끊을 각오를 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꿰뚫고 있는 대성좌.
요그 소토스가 지켜보는 상황에서는 거짓도 통하지 않는다.
“참으로 무모하도다!”
“그 방법 말고는 없었어.”
신력으로 요그 소토스에게서 정신을 보호하는 것도 한계가 명확했다.
요그 소토스는 ‘시간선’ 그 자체인 성좌.
녀석이 시간을 두고 자기 편이라고 말한 건 허세가 아니었다.
“그 공간에서 오래 머무를수록 위험했으니까.”
“여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지 않느냐.”
“결과가 좋았잖아?”
“그걸 지켜보는 여의 마음도 고려하여라!”
닉스의 외침이 귓가를 울렸다.
난 비로소 닉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습기.
안도감과 서운함이 뒤섞인 눈빛이 내 가슴을 쿡쿡 찌른다.
먹먹한 감정.
나는 말문이 막혔다.
둘 사이에 감도는 침묵.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런 감정은 오래간만이라 정리도 안 되네.
1분 정도 후에야, 잠겼던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미안.”
“그대의 목숨은 여의 것이다. 계약을 잊지 말거라.”
“응. 그 말, 꼭 기억하지.”
닉스는 내 말을 들은 후에야 분기 섞인 표정을 풀었다.
“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느냐? 하여간, 무모해도 정도가 있지…….”
투덜거리는 닉스.
나는 그녀의 푸념을 쭉 들어 주었다.
“늘 조심하여라.”
“예예. 알겠습니다요.”
“좀 쉬어 두어라. 여가 호법을 서 줄 터이니.”
“부탁할게.”
닉스가 경계를 서 주면 별일 없겠지.
그럼.
“목숨까지 걸면서 얻은 보상이나 확인해 볼까.”
손을 싹싹 비비면서 대검 위에 손을 얹었다.
[성 제롬의 대검]
등급: 신화 / 분류: 검
내구도: 20,000/20,000
불가타 성경을 기록한 성 제롬.
그는 말년에 이계의 지식을 깨우치고 외해 너머의 존재를 접했습니다.
외우주의 성좌는 검에 신격을 담아 내어 성 제롬의 믿음을 시험했습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외우주의 지식과 유혹이 속삭이지만, 그 대신 강한 힘을 부여합니다.
*근력 + 100%
*민첩 -30
*맷집 + 30%
*쓰러트린 대상의 강함에 비례해서 체력·생명력·정신력·마력 회복.
*[루이나 소드] 스킬 사용 가능.
*정신 오염 Lv 100 상시 적용
[루이나 소드]
등급: ★★★★★
분류: 액티브
마나를 부여해서 파멸의 기운을 구현한다.
미스틸테인과 마찬가지로 신화 등급 성유물.
근력 보너스는 훨씬 높은 대신 민첩에 페널티가 붙었다.
두 검끼리 스텟 증강률만 비교하면 성 제롬의 검이 한 수 위.
“루이나 소드라.”
오러 블레이드, 혹은 암흑 투기와 동일한 계열의 내장 스킬.
대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희끄무레한 기운이 칼날을 뒤덮는다.
시험 삼아 바닥에 휘두르자, 저저저적! 하고는 지면이 크게 갈라졌다.
“오러 블레이드보다 센데?”
난 혀를 내둘렀다.
미스틸테인에는 보조 마법이 붙어 있지만, 그 부분을 감안해도 강력한 검이다.
신살의 업을 빼면 상위 호환에 가까운 강력한 성유물.
요그 소토스 녀석, 엄청나게 퍼줬군.
“참으로 요란을 피우는구나.”
“검 성능 좀 테스트하느라.”
“여는 마음을 졸이고 있으니 적당히 하거라.”
“알아 모셔야죠.”
닉스의 타박을 뒤로 하고는 성 제롬의 대검을 허리에 대었다.
튜토리얼에서 받은 보상, 욕망의 주머니에 칼끝을 대는 순간.
[아공간이 다른 기운에 오염됩니다.]
[해당 아이템을 수납 시, 욕망의 주머니가 변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친절하기도 하지.
시스템의 경고음에 재빨리 칼날을 떼었다.
미스틸테인을 넣을 때도 이러진 않았는데, 지독한 마검이군.
“들고 다닐 수도 없고. 큰일이네.”
“그렇게 걱정이라면 직접 다뤄 보는 건 어떻겠느냐?”
“검은 나랑 안 맞아.”
부우웅!
성 제롬의 대검을 장난스럽게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면서 나는 요란한 소리와 달리, 기세에서 예리함이 없다.
검법 같은 건 써먹어 보질 않아서.
여태까지 쌓은 전투 경험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 오염 옵션은 폼이 아니야.”
“호오, 그대라면 충분히 인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외우주의 존재하고 관련된 건 뭐든 조심해야 해.”
미스틸테인은 두통이 오고 말았지만.
성 제롬의 대검을 쥐니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타인이 이 검을 목격해도 문제다.
검의 특성상 다른 사람들도 현혹하려고 할 텐데.
“계륵이네. 계륵이야.”
닭갈비에 붙은 살처럼 발라먹기 힘든 부위를 얻은 셈이다.
“전처럼 칼을 포식하지 그러느냐.”
“음, 과식했다간 탈 날걸.”
“과식이라?”
“외신의 성유물이야. 이건 나도 장담 못 해.”
외우주의 대성좌, 요그 소토스가 내려 준 성유물이다.
다루는 것까진 어떻게 한다 해도 검에 깃든 정수를 포식하는 건 위험하다.
지금보다 더 강건한 육체와 영혼을 만들어 두면 모를까.
당장 정수를 포식했다간 성 제롬의 대검에 깃든 요그 소토스의 신력에 삼켜질 수도 있다.
“하기야. 여의 눈으로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성좌였도다.”
“여신님이 힘을 되찾으면 다르지 않을까?”
“장담할 수는 없구나.”
“웬일로 약한 소리를 다 하네.”
“삼라만상의 섭리를 품은 성좌는 본 적이 없도다.”
닉스는 진지한 투로 이야기했다.
올림포스의 신왕인 제우스를 아이라고 표현하는 밤의 여신.
그녀조차 섣부르게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게 외우주의 대성좌인 요그 소토스다.
“이를 어쩐다.”
선물이 너무 과한걸.
턱을 괸 채로 고민하던 중.
시너지 효과를 위해 포식했던 데스 웜의 정수가 떠올랐다.
쩝.
회귀 전에도 몇 번 사용한 적이 있는 정수 효과.
이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대검의 칼날을 그 위에 대었다.
“그대여, 위험한 짓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안 위험하니까 진정해.”
정말이다.
오히려 마술이나 차력쇼에 가까운 거지.
난 대검을 입에 넣었다.
[늘어나는 내장을 사용합니다.]
[삼킨 아이템을 몸 속 아공간에 보관합니다.]
[50/850]
몸무게의 10배까지 보관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
회귀 전에도 중요한 물품을 [늘어나는 내장]에 보관해 두긴 했다.
그래도 말이지.
“검을 통째로 삼키는 것은 피하고 싶었는데.”
칼날의 폭이 원체 길다 보니 입 일부가 찢어졌다.
늘어나는 내장을 사용하려면 해당 물체가 입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스스로 입을 찢어 버려야 하는 고통을 생각해 봐라!
성 제롬의 대검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움직이자.”
“기력은 제법 돌아왔느냐?”
“응. 몸보다 정신이 지친 거였으니까.”
“후훗, 그럴 땐 언제나 여에게 기대도록 하여라.”
“여신님 덕분에 든든합니다.”
드림랜드에서 얻을 건 아직 남아있다.
겸사겸사 세르게이 녀석한테 생색도 내고 말이지.
나는 시간의 모서리 너머에 있는 공간을 천천히 탐사했다.
* * *
벽 너머의 풍경은 남부와 달랐다.
안개를 뚫고 나아가자, 서유럽을 연상시키는 중세풍의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명의 흔적이로구나.”
“네크로노미콘의 기록대로라면 여기가 달라스 린일 거야.”
“달라스 린?”
“꿈에 휘말린 사람들이 사는 항구도시.”
도시 끄트머리에 있는 항구.
출렁이는 물 위로 크고 작은 배가 둥둥 떠 있다.
나는 달라스 린에 들어가서 드림랜드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드림랜드는 여러 세계에 걸쳐 있는 공간.
외지인의 방문이 낯설지 않은 듯이 정보를 순순히 이야기해 주었다.
대부분 아는 내용.
회귀 전의 지식과 별 차이 없지만, 닉스가 곁에 있으니 알리바이용으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
첫 번째 탐사치고는 과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획득했다.
-하면 이제 돌아가는 게냐?
영체로 변한 닉스가 은근슬쩍 귀환을 종용했다.
“좀 더 돌아봐야지.”
-드림랜드의 음식은 여에게 맞지 않는구나.
“아까는 신나 해 놓고는.”
-맛이 없는 간식은 죄악이니라!
드림랜드제 쿠키를 먹고 나서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 뒤로 쉴 새 없이 칭얼거렸다.
서부 인근은 꽤 안정적이기에, 포식할 괴물도 많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서 꼭 포식해 둬야 할 존재가 있지.
“지도 하나만 얻고 가자.”
난 지도를 핑계 삼아 잡화점에 들렀다.
“드림랜드 지도? 그건 외지인한테 안 파는데.”
“지금 있기는 합니까?”
“보다시피.”
잡화점 주인은 낡은 지도를 내밀었다.
[드림랜드 내부 지도]
등급: 레어
분류: 잡화
내구도: 10/10
10대 마경 중 하나인 드림랜드의 구조가 그려진 지도입니다.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아니. 뭐…… 기어 다니는 존재라도 사냥해 주면 모르겠군. 요새 피해자가 속출해서.”
난 웃음을 삼켰다.
기어 다니는 존재.
드림랜드에서 반드시 포식해야 할 정수다.
지도를 운운한 것도 잡화점 상인한테서 저 괴물의 이름이 나오길 유도한 것이다.
“기어 다니는 존재가 뭡니까?”
모르는 척 질문하자, 잡화점 상인이 반색했다.
“도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이네. 흥미가 있나 보군.”
“지도를 준다면 놈을 쓰러트리고 오죠.”
“좋아. 거래 성립이네.”
드림랜드 지도.
그리고 기어 다니는 존재 사냥까지.
상인이야 골칫덩어리를 나한테 떠밀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이득을 본 사람은 바로 나다.
“가자, 여신님.”
-후, 지도만 얻고 귀환하기로 약속하거라.
닉스가 칭얼거리는 걸 한 귀로 흘리면서 도시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