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아우터 갓.
세계 바깥, 그러니까 외우주의 신이자 성좌들이다.
만신전의 성좌들과 차이가 있다면…….
『화과산의 미후왕이 외우주의 성좌를 보고 경악합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은 외신의 기운이 당신의 정신을 좀먹을 수 있다며 강하게 경고합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은 외우주의 성좌를 주시하는 걸 멈추고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
저 ‘오염’이라는 거다.
외우주의 성좌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벌어질 수 있는 오염.
외해의 존재들은 상대와 자신의 벽을 허물고 그들의 개념으로 동기화시키는 성질을 지녔다.
【시끄럽군.】
툭-!
천리안 계약으로 이어진 손오공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드림랜드는 외우주와 현실이 뒤섞이면서 만들어진 이계의 마경.
꿈, 그러니까 외해의 지배자인 ‘아자토스’의 영역이다.
손오공이 신왕급에 준하는 성좌라지만 여기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저 성좌가 내 예상대로의 존재라면, 손오공 본체가 강림해도 어찌할 수 없을걸?
-삼라만상의 이치를 모두 담아 둔 성좌라니.
“여신님, 저거 너무 오래 보지 마.”
-기분 나쁜 힘이 여의 정신을 잠식하려고 하나, 괜찮도다.
태연한 닉스의 음성.
신왕급에 준하는 성좌, 손오공조차 질겁했는데 말이야.
역시 개념신은 다르구먼.
닉스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과 이야기를 해 볼까.
난 천장이었던 것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눈과 입.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핑핑 돌고 심장박동수가 증가했다.
냉혈 스킬도 무효화.
저 아득한 존재와 눈을 마주치자, 당장이라도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는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까드득.
빌어먹을.
내가 성좌들 따위에게 고개를 숙일 것 같아?
외우주든 뭐든.
알 바 아니다.
회귀 전에 없던 일이라고 해서 대면하자마자 머리를 숙일 마음 따윈 없다고!
비릿한 피 맛이 입가에 감돈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나 보다.
어, 근데 출혈이 좀 심한데.
-그대여. 피, 피가!
닉스가 비명을 질렀다.
호들갑 떨기는.
피 맛이 감돈 덕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재생 스킬로 파인 부위를 회복시키면서 정수리에 깃든 힘을 끌어왔다.
신력.
성좌에게만 허락된 힘.
유적과 성유물에서 포식한 기운으로 정신을 보호했다.
후욱- 깊게 숨을 들이쉬자 머리를 뿌옇게 물들이던 기운이 조금 가셨다.
이제야 살 것 같군.
숙인 고개를 다시 들었다.
무수한 눈 사이로 비쳐지는 ‘우주’의 신비.
신력으로 정신을 보호했는데도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광경이다.
하지만.
참아 냈다.
【대단하구나. 이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다니.】
“나야말로. 경계를 상징하는 성좌, 요그 소토스가 필멸자한테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 책의 사본에 적혀 있나? 아니면…….】
여운을 남기는 말투.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입을 잘못 뻥끗거렸다간, 저 존재감에 눌려서 회귀라는 비밀을 토해 낼지도 모른다.
천장 위에 달린 수많은 눈이 나를 주시한다.
비밀을 꿰뚫어 보는 눈.
신력으로 정신을 보호하고 있지만, 오래 끌면 위험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 어느 기록에서도 관측되지 않은 존재. 이런 경우는 흔치 않지.】
“그게 중요한가?”
【내 흥미를 끌었다는 것이니 중요하지 않겠나.】
회귀 전에는 없던 변수.
아이러니하게도 요그 소토스가 모습을 드러낸 원인은 ‘회귀’였다.
요그 소토스는 우주의 모든 사건과 지식, 그리고 ‘시간’을 기록한다.
그 기록에서 벗어난 존재.
나라는 변수가 요그 소토스의 영역을 알짱거렸으니.
-저 성좌가 그대를 흥미롭게 여기는 듯하구나.
응. 그래서 문제야.
외우주의 섭리는 이 세계와 전혀 다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요그 소토스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자아를 유지하지 못했다.
공포, 그리고 광기라는 개념을 실물로 옮겨 놓은 성좌.
저 눈을 봐라.
시간선에서 벗어난 ‘나’라는 변수를 파악하고 싶은 욕구에 번들거리고 있잖아?
까딱하면 실험용 모르모트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위기.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가능성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이어질 거다.
내가 회귀자라는 게 밝혀지면 세포 단위로 해부될걸?
필사적으로 신력을 전개, 내 정신을 보호하는 것도 그 이유다.
도망치려고 해도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까지 막혀 있으니.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건가.”
【관찰과 기록은 내 영역. 새로운 변수도 기록해야 할 대상이지 않겠나.】
“날 여기에 둔다고 관찰이 될 것 같진 않아서.”
【삼라만상의 이치가 내 안에 있도다. 지금은 대화가 정도의 단말을 내려보내서 더딜 뿐.】
-저 존재감이 단말이라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그래.
요그 소토스는 외신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다.
늘 잠들어 있는 공허의 주인, 아자토스를 대신하여 깨어 있는 대성좌.
본체가 강림했다면 드림랜드 전체가 흔들렸을 거다.
“그래. 당신의 본체는 오지 못하지.”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요그 소토스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엔, 드림랜드가 너무 작으니까.”
【정답이다, 필멸자여. 하나 시간은 언제나 나의 편이니, 그 비밀을 들여다보는 건 시간문제다.】
회귀의 비밀을 밝혀서 모르모트가 되느냐.
혹은 이 자리에서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하느냐.
요그 소토스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했다.
뒤늦게 대화의 진의를 읽어 낸 닉스가 표정을 굳혔다.
-위기로구나.
참 일찍도 알아채셨다.
희번덕거리는 눈깔들을 보고도 감흥이 없다니.
과거로 돌아온 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몇 번이나 했지만 지금처럼 위태로운 적은 겪지 못했다.
회귀자라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 낸 변수.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가는 벌거벗은 것처럼 모든 것이 읽힐 것 같은 두려움.
그 공포가 늘어졌던 마음이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위기에 처했을 때 더 날카로워지는 정신력.
회귀 전에도 수십 번이나 난관을 헤치고 살아남은 몸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무엇일까.
두 번의 삶 속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고민했다.
잠시 후.
“거래를 하자, 요그 소토스.”
난 입술을 떼었다.
* * *
경계에 머무는 자, 요그 소토스.
그는 영역 끄트머리에 걸린 변수를 감지하는 순간,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을 풀었다.
무언가를 의식한 게 아니었다.
요그 소토스의 개념은 지식의 보고.
생물, 세계, 그리고 성좌.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존재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는 게 요그 소토스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세계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요소를 파악하는 건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마경, 드림랜드.】
탑과 세계가 융합하면서 생긴 현상, 마경.
변수가 측정된 장소는 지구와 외우주가 이어진 공간이었다.
셀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동안 이토록 그의 관심을 끈 존재는 몇 없었으니.
요그 소토스는 차원의 간섭을 억누른 채 의식의 단말을 드림랜드로 보냈다.
본래는 자연재해와도 같은 외우주의 성좌이지만.
의식 일부를 분리해서 내려보낸 단말은 만신전의 성좌들처럼 자아가 강력해졌다.
그렇기에.
“거래를 하자, 요그 소토스.”
호기로운 진호의 목소리에 흥미를 느꼈다.
요그 소토스 본체였으면 반응하지 않았을 제안.
파도에게 말을 걸듯 의미 없는 행동이다.
[시간의 모서리]에 강림한 요그 소토스의 ‘일부’는 달랐다.
그는 시간선에 기록되지 않은 변수, 진호에게 강렬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거래라는 건 대등한 존재가 약속을 하는 것 아닌가?】
“맞아.”
【날 기만하는 건가.】
요그 소토스는 흥미를 누른 채, 조소했다.
흔들리는 세계.
단말에 불과한 그가 감정을 드러낸 것만으로 드림랜드 전체가 흔들렸다.
“날 관찰하고 싶다며?”
【그래. 이 안에 가두고 끊임없이 지켜본다면 언젠가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
스스스슷!
진호는 어둠으로 벼려 낸 칼을 쥐었다.
밤의 여신 닉스의 기운.
만신전의 성좌들조차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지만, 요그 소토스의 일부는 극야의 정체를 바로 간파했다.
【밤 그 자체를 다룬다고 한들,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설마. 당신이 전력을 다하면 0.1초도 못 버틸 텐데.”
【잘 아는군.】
요그 소토스는 진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란, 이 통로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제 비밀을 스스로 밝히거나.
아니면 관찰당할 때까지 갇혀 있거나.
그 순간.
“거래 대상은 내 목숨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암흑 칼날이 진호의 목덜미에 아른거렸다.
-그, 그대여!
비명을 지르는 밤의 여신.
요그 소토스의 일부는 수많은 눈을 움직였다.
【어째서 그게 거래 대상이라는 거지?】
“내가 지닌 비밀. 그걸 알지 못하면 답답한 게 누구일까.”
【외신을 우습게 아는군. 난 그 시체를 살펴서 알아낼 수도 있다.】
“가능하면 해 보든지.”
주르륵.
붉은 피가 칼날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서슴없는 진호의 행동.
칼날이 깊게 파고들지 않은 건 진호가 힘을 뺀 게 아니었다.
쭉 뻗은 보라색 촉수.
요그 소토스의 의식 일부가 개입해서 진호를 붙들었기에, 피가 조금 나는 것에 그쳤다.
【필멸자여, 내가 손을 쓰지 않았으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알아.”
【네 목숨으로 거래하자는 것, 진심인가?】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본체에서 의식을 분리했기에 느끼는 흥미.
요그 소토스의 단말은 진호를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다는 욕망을 강하게 느꼈다.
【네 비밀. 그리고 강한 영혼. 둘 다 탐나는구나.】
“그럼 거래를 할 거냐?”
【이번에는 속아 주지. 내 흥미를 위해서.】
추아악!
암흑 칼날을 막았던 촉수가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촉수는 진호의 오른손을 휘감은 후, 그대로 스며들었다.
손등 위에 생긴 보라색 결정.
【더 가까이에서 너를 관찰하마. 이게 내 거래 조건이다.】
“살려 보내 주는 대신인가?”
【그렇다.】
“이봐. 거래라는 건 일방적인 게 아니잖아.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큭큭큭. 여기서 보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군.】
요그 소토스의 의식 일부는 지식의 보고에 잠든 성유물 하나를 꺼냈다.
위에서 추락하는 검.
【성 제롬의 대검이다. 이 정도면 거래비로 충분할 터.】
천장 위에 붙어 있던 눈들이 감기기 시작한다.
구구궁-!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가 다시 나타났다.
【나를 즐겁게 해 주길 바란다. 시간선에서 벗어난 존재여.】
요그 소토스의 단말은 그 말을 끝으로 본체와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