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연달아 퍼져 나가는 굉음.
지면에는 혀를 내민 채 쓰러진 염소의 종자가 한가득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수 포식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덩달아 레벨도 올랐다.
보너스 스텟은 모두 극야에 투자.
남은 스텟은 포식으로 올릴 수 있으니까, 아낄 필요가 없다.
“만찬이야, 아주.”
-침 떨어지겠구나.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어때?”
-그대는 여를 더 극진히 섬겨야 할 필요성이 있도다.
“네네, 그러시겠죠.”
닉스의 힐난을 한 귀로 흘리고는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염소의 종자의 정수를 포식했습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고대]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급속 성장이 추가됩니다.]
[급속 성장]
등급: ★★★
분류: 액티브
대상에게 공허의 기운을 불어넣어서 빠르게 성장시킨다.
성장 과정에서 공허의 힘의 영향을 받아서 변이가 일어날 수도 있다.
상당한 마나를 소모한다.
급속 성장은 다방면에서 활용이 가능한 스킬이다.
키메라의 정수인 ‘변이’처럼 상처를 재생시킬 수도 있고.
다른 생물에게 적용시켜서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하면 변이의 상위 호환 격 스킬 아니느냐? 타인도 치유할 수 있다니.
“이 정수의 본질은 치유가 아니야.”
성장이 반드시 ‘재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성장의 일부 단면일 뿐.
급속 성장은 돌연변이 가능성이 있는 변이보다 한층 더 다루기가 까다로운 스킬이다.
“외신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란 말이야.”
광기를 내포한 존재.
모든 마물의 어머니라고 하는 슈브 니구라스는 오죽할까.
그 피조물인 염소의 종자도 마찬가지다.
놈에게서 추출한 정수는 공허의 성질을 띠고 있기에, 공허의 힘이 급속 성장 과정에서 개입한다.
“입 아프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좋겠지.”
나는 평야에 손을 얹었다.
[급속 성장을 사용합니다.]
풀포기에 스며드는 공허의 마력.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무릎 높이까지 자랐다.
-호오, 가이아의 힘을 보는 것 같구나.
“좀 더 봐 봐.”
허리 언저리까지 자라난 풀.
그 순간, 잎사귀가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동물의 치아 같은 날카로운 가시가 자라났다.
입(?)을 크게 벌린 식물은 이내 쭉 뻗더니 닉스를 삼키려는 듯이 바동거렸다.
-흉측하구나.
미간을 찌푸리는 닉스.
“외우주의 생물들이 좀 이래.”
-하면, 그 급속 성장이라는 걸 사용하면 모두 이러느냐?
“공허의 힘을 컨트롤하면 이렇지는 않아.”
파이어볼로 식물을 태워 버리면서 느긋하게 대꾸했다.
공허라는 부작용이 있어도 응용하기에 따라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스킬.
상황에 따라서는 저 부작용조차 이점으로 살릴 수 있다.
[내샨 대공의 정수가 염소의 종자의 정수에 반응합니다.]
[공허의 힘이 안정됩니다. 공허의 거울의 지속시간이 50% 증가하고, 사용자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듭니다.]
[공허의 힘의 쿨다운이 반으로 감소합니다.]
“그래, 이거지.”
입가가 씰룩인다.
직접적으로 ‘공허’와 연관이 된 정수를 포식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시너지가 발생할 줄 알았다.
회귀 전에는 겪어 보지 않은 일.
하지만.
그 지식은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활용이 가능했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니라.
“왜?”
-불쾌하게 생긴 염소들이 더 몰려오고 있지 않느냐.
평원을 뒤덮은 검은 물결.
꽤 많은 염소의 종자를 해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쓰러트린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뿐이랴.
“변종도 섞여 있군.”
나이트건트와 흡사하게 생긴 날개를 단 염소의 종자도 나타났다.
급속 성장으로 날개를 만들다니.
참신하네.
회귀 전에도 저런 건 못 본 것 같은데.
-그대를 사냥할 준비를 갖춘 모양이구나.
난 미간을 찌푸렸다.
진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사람 귀찮게 하긴.”
몰이사냥이라는 꿀을 더 빨 수 없는 게 아쉬울 뿐.
아니지.
미처 포식하지 못한 시체들도 있겠다.
최근에 얻은 스킬을 활용할 무대가 펼쳐졌다.
“레이즈 데드.”
쓰러져 있던 염소의 종자들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난다.
[구울 32기를 제작했습니다.]
사체의 보존 상태에 따라 제작되는 언데드.
겉 부분이 타긴 했어도 높은 마법 저항력 덕에 사지가 멀쩡한지라 모두 구울로 되살아났다.
-망자를 일으키다니, 불경하구나.
“좀 참아 줘.”
투덜거리는 닉스를 안정시키고는 구울 무리를 전진시켰다.
퍽!
도끼를 맞자마자 휘청거리는 구울.
손톱으로 염소의 종자를 할퀴었지만 피해가 크지 않았다.
중급 언데드인 구울로는 플래티넘 급 전투력을 지닌 염소의 종자에게 상대가 안 됐다.
-어찌 된 일이더냐? 상대가 안 되는구나.
“지켜보면 알아.”
나는 어깨가 푹 파인 구울에게 암흑 마나를 부여했다.
시간을 되돌리듯, 푹 파인 어깨가 다시 붙는 구울.
“으어어어.”
다시 염소의 종자에게 달라붙어서 살점을 물어뜯었다.
-저렇게나 빨리 복원할 줄이야.
“마나만 충분하면 괜찮다.”
혼원룡의 심장 덕에 넘쳐나는 마나.
암흑 마나로 치환하는 데 걸린 시간도 거의 없기에, 언데드들을 계속 복원했다.
하지만.
[구울 2기가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복구할 수 없습니다.]
수적으로도.
질로도.
몰려드는 염소의 종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전세.
쩝.
-쉽게만 풀어 가려고 하니 이러지 않느냐?
“있어 봐요. 생각 좀 하게.”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마력은 넘쳐 나지만 관련 패시브 스킬이나 보조 마법이 없어서 벌어진 문제.
제작 가능한 언데드의 숫자도 적고, 회귀 전의 기억보다 전투 능력까지 떨어졌다.
시너지 효과를 부여하는 정수들을 더 포식했어야 했나.
잠깐.
“여기서 제사장 녀석으로 변하면?”
-제사장이라면, 그 달의 제사장이라는 자를 말하는 것이더냐?
“응. 또 모르지. 언데드를 다루는 스킬에 시너지를 줄지.”
밑져야 본전.
마침 염소의 종자의 정수 덕에 재사용 시간도 줄어들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달의 제사장의 흔적이 거울에 비쳐집니다.]
[혼에 기록된 형태로 변환합니다.]
[사용자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지속 시간이 1시간으로 설정됩니다.]
[근력과 민첩이 50% 감소합니다.]
[마력이 70% 증가합니다.]
얼굴 위에 나타난 새하얀 가면.
[데모닉 파워]로 모든 능력치를 마력에 돌린 것처럼 힘이 쭉 빠졌다.
그 순간.
“으어어어어!”
구울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한결 기괴해지고 더 커졌다.
어럽쇼.
정말 효과가 있다고?
* * *
[공허의 거울로 비춘 혼의 흔적이 언데드와 공명합니다.]
[구울의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달의 제사장의 패시브 스킬 - 죽음의 오라가 발동됩니다.]
[죽음의 오라]
등급: ★★★
분류: 패시브
지휘 중인 언데드의 능력치가 50% 상승한다.
빛이 없을 때만 작용한다.
구울의 몸을 휘감는 검은 기류.
달의 제사장이 타고난 패시브 스킬이 언데드들을 강화시켰다.
오호라.
“그렇다는 말이지?”
죽음의 오라도 그렇고, 레이즈 데드로 제작한 언데드들도 강해졌다.
그렇다면.
달의 제사장으로 변한 상태에서 레이즈 데드를 사용하면 어떨까?
곧바로 암흑 마나를 재배열했다.
“레이즈 데드.”
[구울 73기를 제작했습니다.]
배 이상 늘어난 언데드의 숫자.
역시.
달의 제사장은 언데드 통솔에 특화된 몬스터였다.
공허의 거울로 그 모습과 특성을 취하니, 관련 스킬들도 덩달아 강해진 것!
배 이상 늘어난 구울들이 염소의 종자를 물어뜯는다.
파괴되어도 다시 복구되는 구울.
반면 염소의 종자들은 부상이 누적되자 하나둘 지면에 쓰러졌다.
-싸움을 구경만 하다니. 그대답지 않구나.
“그러게. 좀이 쑤시긴 해.”
끝이 나지 않는 전투.
전투가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지부진했다.
[공허의 거울의 지속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변신이 해제됩니다.]
원래대로 돌아온 육체.
막 달려들던 구울 중 2/3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염소의 종자들의 숫자가 제법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바글바글했다.
내 어깨에 걸터앉아 있던 닉스가 호문쿨루스의 육체로 실체화했다.
“여신님도 나서게?”
-딱히 그대를 위해 나서는 것은 아니니라.
“그러면 왜.”
-여도 이 육체를 강화하려면 경험치가 필요한 것뿐이니.
닉스가 손을 펼치자, 극야의 힘이 파도처럼 휘몰아치면서 염소의 종자들을 밀어냈다.
여신님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건투를 빌지.”
나는 염소의 종자 집단 사이로 파고들었다.
몇 시간 후에야 끝난 전투.
염소의 종자가 추가로 몰려든 탓에 시간이 많이 끌렸다.
“그럼 마저 포식할까.”
어둠의 육체를 전개.
광범위하게 극야의 힘을 흩뿌리고는 포식을 사용했다.
일일이 만지면 시간이 더 걸렸을 거야.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 평원에 널린 사체들의 정수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포식했다.
[염소의 종자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구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언데드로 제작한 사체는 정수가 바뀌었다.
회귀 전에는 언데드의 정수를 포식할 수 없었기에, 언데드 제작 관련 스킬을 반쯤 버려두었다.
프레데터로 전직한 덕분에 입장이 바뀌었군.
구울의 정수야 이미 19층에서 다 모았다지만, 다른 언데드들을 제작해서 정수를 모으는 방법도 고려해야겠다.
“조금 지치는구나.”
“내 어깨에 기대든지.”
“그렇다면 조금만 빌리겠노라.”
머리를 기대는 닉스.
잠깐만요.
영체로 변해서 쉬는 거 아니었어요?
슬쩍 힘을 주려고 했으나, 고른 닉스의 호흡을 듣는 순간 오른손을 다시 돌렸다.
이렇게 지친 티를 내면 밀어낼 수가 없잖아.
“자는 건 아니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
이 난장판에서 졸다니.
보통은 아니라니까.
몸을 낮추면서 닉스가 깨지 않게 받아 주었다.
휴.
짧은 한숨과 함께 정신적인 피로감을 해소했다.
육체는 [혼원룡의 심장]과 [대지모신의 가호] 덕분에 멀쩡했다.
하지만.
나이트건트 무리에 이어 염소의 종자와 쉼 없이 싸운 탓에 정신의 피로가 쌓였다.
조금 쉬는 건 괜찮겠지.
닉스의 숨소리를 배경음 삼아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현 위치는 드림랜드 남서부.
중심부로 가는 건 위험하니,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탄달로스의 사냥개나 ‘기어 다니는 존재’를 사냥해야겠다.
그럼 ‘공허의 거울’의 시너지 효과도 더해질 터.
실전에서 공허의 힘을 수련할 겸, 강화까지 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다.
“흐응.”
그나저나.
이 여신님, 깨기는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