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세르게이의 안내를 받아 마경 대책 본부로 들어갔다.
“여기가 본부?”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말이 좋아야 본부지.
이 꼴을 보면 마치…….
“난민 캠프 같나?”
“그래.”
“크크크, 틀린 말도 아니지.”
세르게이는 자조 어린 웃음을 지었다.
퉁구스카에 들이닥친 재난.
인근 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피난 행렬에 몸을 실어야 했다.
갈 곳 잃은 이재민들은 엉성하게 설치된 천막 안에서 머물렀다.
회귀 전에는 지긋지긋하게 봤던 장면.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희박한데 왜 여기에 머무는 거지?”
“정부가 조치를 못 취해 주니까.”
러시아는 탑 출현 이전부터 혼란스러운 정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탑이 생성되면서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얻고 각 지역에서 득세했다.
먼 옛날, 삼국지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세력의 난립.
“러시아 수호 기사단도 그중 하나인가?”
“빌어먹을 놈들. 기사는 무슨!”
쾅- 세르게이의 발길질에 지면이 들썩였다.
“이번 일만 끝나면 네오 나치 새끼들의 머리를 몸통과 분리해 주겠다.”
“그렇게 말해도, 외교적인 실례를 넘어가진 않을 거야.”
“잊지 않는다. 빚은 확실하게 갚을 거다.”
콧김을 흥, 하고 부는 세르게이.
아, 역시 조금 더 손을 봐 줬어야 했어.
세르게이 녀석의 목에서 힘이 덜 빠진 걸 보니 아쉬웠다.
“저, 그런데 정부 측 관계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화의 맥이 끊긴 틈을 놓치지 않고 한수창이 끼어들었다.
“정부? 그딴 건 없다.”
“예?”
“빌어먹을. 정부는 손 놨다고.”
“시베리아 벌판 중심부에 마경이 생성되었는데 말입니까?”
미간을 찌푸린 세르게이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허, 허허.”
“그럼 당신이 총책임자인가 보군.”
“총책임은 무슨. 나 좋다고 목숨 내놓은 등신들을 이끌고 있는 거다.”
러시아의 정국이 혼란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막장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회귀 전, 내가 국외에 관심을 가진 시점은 플레이어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2030년 이후였으니.
그 시기에는 러시아가 이렇게까지 혼란하진 않았거든.
눈앞의 사내, 세르게이가 그만큼 노력해서겠지.
실제로도 수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인류의 첫 번째 군주가 된 것도 이 사내였다.
옛 인연도 있겠다.
지금은 도와주지. 세르게이 볼코프.
겸사겸사 정수도 얻고.
“마경 탐색 상황은 제가 인수인계 받겠습니다.”
토마스가 입을 떼었다.
“이자는?”
“분석관 토마스 밀러. 미국에서 유명한 분이야.”
“흐음, 니콜라이, 이 미국인에게 상황을 공유해 줘라.”
세르게이의 부름을 받은 사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외부인한테 그냥 보여 줘도 되겠슴까?”
“야, 형이야. 형 못 믿냐.”
“알겠슴다. 대장이 그렇게 말하면야. 코쟁이 양반, 따라오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상황실로 향하는 토마스.
“짐 풀 곳을 안내하마.”
세르게이는 퉁명스러운 투로 남은 일행을 안내했다.
* * *
퉁구스카에 생긴 이변 조사.
러시아 정부는 조사 팀을 형식적으로만 파견했다고 한다.
“중앙에서 나온 인원들은 시간만 죽이고 있답니다.”
“그럼 세르게이의 팀이 몸통이라고 봐야겠군요.”
“맞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경단이라고 칭하더군요.”
“러시아 수호 기사단보단 낫네.”
난 피식 웃었다.
토마스가 긴장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러시아 수호 기사단 말고도 다른 세력도 있어서, 마경 탐사는 3파전이라고 합니다.”
“뭐, 그 문제는 세르게이한테 맡겨 두죠.”
3파전이고 뭐고.
내가 러시아의 우환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회귀 전에도 세르게이의 손에 모조리 정리된 네오 나치 세력.
제 기능을 잃은 정부까지 쓸 만하게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회귀 전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지고 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틈은 없어.
“후배님, 꽤 복잡한 상황이군.”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불침번도 둬야겠어요.”
신준석과 홍윤수가 번갈아 가면서 말했다.
“크크크, 두 선배님이 계시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후배님.”
“엘렌 테일러 때도 놀랐지만, 그 세르게이를 상대로 한 치도 안 밀릴 줄은 몰랐습니다.”
두 랭커의 눈에서 열망의 빛이 아른거렸다.
“마경 탐색을 마치면 저랑 대련이나 한번 하시죠.”
“기대하지.”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장님.”
닉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대와 함께하는 이들은 다들 저 모양이구나.
“저게 뭐 어때서?”
-후후훗, 기회가 되면 알려 주마.
묘한 말을 남기는 닉스.
난 못 들은 척하고 다시 토마스의 브리핑에 집중했다.
“자경단에서는 마경 탐색의 주안점을 둘로 본다고 합니다.”
“둘?”
“영역의 확장 요소, 그리고 안전 여부요.”
“확장이야 그렇다 쳐도. 두 번째 항목은 괴물들이 마경 바깥을 벗어나는지를 말하는 것 같군요.”
“예. 길드장님의 안목이 상당하시군요.”
회귀 전에도 겪어 본 일이니까.
10대 마경이 전 세계 곳곳에 자리를 잡은 후.
전 세계는 한동안 변화에 적응하느라 홍역을 겪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생긴 [메일의 계단]은 대기에도 영향을 끼쳐서 배, 그리고 비행기의 경로까지 틀어야 했고.
고비 사막에 생성된 마경은 사시사철 마력이 섞인 황사를 동아시아에 흩뿌려서 공기 정화 사업이 더 발전했다.
그것도 적응 과정을 거치면서 발생한 일.
시스템에서 공개한 것 외에는 마경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정보 파악이 우선이었다.
“마경의 정보는 없었습니까?”
“예. 피난 온 주민들을 돕고 상황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었다더군요.”
“개판이네.”
마경 탐사대라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정작 내부사정 때문에 한 걸음도 못 디뎠다, 라.
세르게이 녀석. 고생깨나 하겠군.
나는 개의치 않았다.
퉁구스카에 자리를 잡은 마경은 이미 회귀 전에도 들어가 본 적이 있으니까.
깊숙한 곳까지만 안 가면 위험할 일은 없다.
탑 지하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고작 마경 정도야.
“자경단에서는 강 하류에서 올라가는 쪽을 맡아 달라더군요.”
“알겠습니다. 한수창 팀장님은 쉬고 계세요.”
“저를 두고 가시려고요?”
새파랗게 질린 한수창이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마경은 어떤 환경일지 모르는걸요.”
“여기보다는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지켜 줄 분도 많고.”
“아…… 그것도 그렇군요.”
자경단 외에도 네오 나치를 표방하는 조직이 둘이나 있다.
국제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수호 기사단인지 머시기인지한테 습격을 받았으니.
“알겠습니다. 선배님들 뒤를 잘 따라다니세요.”
“네!”
저 양반은 왜 따라와서 고생을 자처하는지 원.
일행은 준비를 마치자마자 퉁구스카 강 하류 옆에 뻗어 있는 도로를 달렸다.
얼마 정도를 갔을까.
새카만 안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일반적이지는 않군.”
신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공기가 저 안개 옆에서 굴절된다.”
거드는 홍윤수.
나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이리저리 얽히는 수많은 색상들.
천안(千眼)으로 살펴본 안개 너머는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그때도 끔찍했지만, 다시 보니 더 거지 같네.”
-여길 와 본 적 있느냐?
“아, 다른 곳이 생각나서.”
무심코 내뱉은 말을 빠르게 주워 담았다.
회귀 전에 와 봤다고는 말 못 하지.
그때도 공허와 관련된 정수를 포식한답시고 퉁구스카에 위치한 마경에 들어갔었지.
“길드장님, 차량째로 돌입합니까?”
“아뇨. 옆에 대고 가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토마스가 히죽 웃고는 지프를 길가 옆에 두었다.
안개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생각이 뿌옇게 물들었다.
[10대 마경 - 드림랜드에 진입했습니다.]
[이곳은 원래 세계보다 시간이 10배 느리게 흐릅니다.]
[드림랜드의 환경은 시시각각 변화합니다.]
[몽환 Lv 10]
[슬립 Lv 7]
[감지 능력이 1/5로 저하됩니다.]
풀포기 하나 없는 기암절벽.
뒤를 돌아보니, 바깥 풍경이 훤히 보였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행.
“여신님, 어때?”
-과연, 여의 짐작이 맞았구나.
“카오스의 기운이 느껴져?”
-미묘하구나.
닉스는 어깨에서 떠나 주위를 뾰로롱하며 날아다녔다.
-이 공간을 이루고 있는 파동은 여가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했을 때 느낀 것과 흡사하다.
“흡사하다면, 맞는 거 아닌가.”
-아니. 여의 기억과 비슷한 파장이긴 하나, 무언가가 섞여 있다.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외우주의 성좌가 그리스 로마신화와 연관이 있다 한들, 현시점에서는 쓸데가 없는 정보다.
나는 관심을 끄고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거울이 사용자의 혼을 비춥니다.]
[우르칸의 흔적이 거울에 비칩니다.]
등 뒤에서 솟구치는 날개.
“길드장님?”
홍윤수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두 날개를 움직여서 날아올랐다.
그 순간.
“키이이이이!!”
고막을 찢을 것 같은 고성과 함께 괴물 무리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나이트건트.
곡선으로 휜 뿔을 머리에 달고, 등 뒤에 피막으로 된 날개를 퍼덕이는 괴물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감지 능력을 떨어트리는 디버프가 있잖아요.”
난 태연하게 대꾸하면서 나이트건트 무리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드림랜드에 처음 진입한 이들을 당혹하게 하는 디버프, 감지 능력 제한.
말만 보면 마력, 혹은 살기 같은 걸 감지하기 어렵게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감각에 간섭하는 디버프다.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를 차단하는 게 아닌, 인지 영역을 줄여 버리기에 처음에는 누구나 당황한다.
나야 중고 신인이니까 미리 대비를 했던 거고.
“키이이이!”
나이트건트는 드림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괴물이다.
전투력은 골드 등급 정도.
하지만.
비행에 능숙한 종족 특성 때문에 실제 사냥 난이도는 한 단계 더 높았다.
그러니까.
“내 상대는 아니야.”
나이트건트를 상대로는 바람길로 충분했다.
굳이 날개를 꺼낸 건 공중전에 적응하기 위함이었다.
훌륭한 실전 상대가 나타났는데 이 기회를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
“키이이이!”
나이트건트가 기다란 손톱을 휘둘렀다.
갈고리처럼 파인 손톱.
몸에 닿기 전, 날개를 접으면서 수직 하강 했다.
한 치 차이로 스친 나이건트의 공격.
곧바로 날개를 펴면서 비상, 비어있는 나이트건트의 하체를 노렸다.
광서지에 심장이 뚫린 나이트건트.
망설임 없이 놈의 사체를 바로 포식했다.
“초전부터 배 좀 채우겠어.”
-그대는 이 상황에서도 긴장감이라는 게 없구나.
닉스의 한탄이 귓가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