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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80화 (180/300)

180화

1908년 6월 30일.

소행성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퉁구스카강 상류에 충돌,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여기서 ‘추정’이라고 언급된 건 낙하 물질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만한 충격파.

기묘하게도 러시아 전역이 백야현상을 느낄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충격 부위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20세기에 벌어진 기현상.

“실은 그 낙하 물질, 이계의 파편이거든.”

“이계의 파편?”

“바깥, 그러니까 아우터 갓들의 세계.”

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초의 혼돈.”

“혼돈?”

“여를 탄생시킨 존재이니라.”

난 두 눈을 깜빡였다.

“개념신에게도 아버지가 있어?”

프로토게노이.

차원을 구성하는 ‘섭리’, 혹은 개념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한 세계의 시작과 함께 있다고 알려진 성좌가 누군가에 의해 탄생했다라.

“그대가 생각하는 필멸자들의 관계는 아니니라.”

“여신님을 탄생시킨 존재. 혼돈이라는 것 좀 더 이야기해 줘.”

“혼돈이 하늘과 땅, 그리고 어둠을 인지하는 순간에 눈을 뜬 것이 여이니.”

카오스가 ‘세상’을 자각하는 순간, 흑암하던 세상에 빛이 들어왔다.

모든 생물의 탄생과 살아갈 장소를 주관하는 가이아.

에너지를 주관하는 에로스.

그리고 밤을 주관하는 닉스.

프로토게노이라고 명명된 세 개념신은 텅 빈 세계를 자신들의 색으로 채워 나갔다.

“그래서?”

“혼돈이라고 하면 여를 자각한 카오스 말고 떠오르지 않는구나.”

“동일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잖아.”

“실은 카오스가 우리를 자각한 후의 행보가 묘연하니라.”

카오스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다.

그 존재감은 하늘과 땅을 메울 정도로 강대하며, 밤 그 자체인 닉스조차도 범접할 수 없다고 한다.

“이상하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탑 100층.

만신전에 있는 여러 성좌들의 성유물도 접해 본 나다.

닉스가 말한 ‘카오스’라는 신이 있다면 성유물이나 흔적을 발견했을 터.

그게 아니어도 가이아 이상의 존재감을 지닌 대성좌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회귀 전에도 몰랐던 정보.

“한번 알아봐?”

“너무 신경 쓰지는 말려무나. 그대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느니라.”

“무리하지는 않을게.”

닉스의 가설대로라면 카오스가 외우주에 머무는 아우터 갓들과 연관이 있을 거다.

외우주의 신들은 탑과 연관된 세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니.

너무 깊게 알아보지 않는 한,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거다.

난 한수창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진호 님.

“이번에 10대 마경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그 문제로 골치가 아픕니다. 타국에서 지원 요청이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요?”

-우리나라는 플레이어 전력도 탄탄한 편이고, 마경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피해도 안 봤지 않습니까.

피곤감이 가득한 한수창의 목소리.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 같은 강대국들도 마경 출현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

퉁구스카 강 상류 부근이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받았다고 한다.

워싱턴주 대부분을 잃어버린 미국.

중국은 고비 사막에 나타난 마경으로 간접적인 피해를 입는 중이라고 한다.

-협회 요원들이 얼마나 됩니까? 저희는 현장 통제도 어려운걸요.

이 아저씨 엄살 부리는 거 보소.

플레이어 협회는 1차 대침식 이후 규모를 급격하게 불려 나갔다.

게이트 출현 정보.

바벨탑에서 각 정부의 수장에게 전달한 게이트 레이더를 활용, 여러 길드에게 게이트를 분배했다.

위험과 기회의 땅.

게이트의 이름과 등급만 미리 알아도 어떤 위협이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협회 소속이 된 요원도 많이 늘었고.

“듣자 하니, 이번에 특무대가 정원이 되어서 지원자들을 돌려보냈다고 하던데요.”

-아이고, 특무대원들이야 어차피 외부 인원 아니겠습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지원자들을 보면 진호 님 같은 분이 없어요.

한수창은 앓는 소리를 냈다.

뭐, 이 정도면 생색은 충분히 낸 것 같으니.

“그 고민,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정말입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마경. 제가 토벌대로 참여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진호 님!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한수창.

플레이어 협회에 달아 놓은 빚이 하나 더 늘었다.

* * *

나는 길드원들에게 퉁구스카 강에 자리를 잡은 마경 토벌을 알렸다.

“게이트에 이어 마경입니까?”

“왜, 가기 싫으면 말고.”

“아닙니다. 사부께서 가시는 길, 불초 모자란 제자가 보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핑 레이 녀석.

원래부터 저렇게 입바른 말을 잘했던가.

“혀에 기름칠 좀 했냐?”

“사부님에 대한 존경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헛소리 말고.”

손을 휘휘 저은 후, 다시 입을 떼었다.

“이번에는 혼자 갈 겁니다.”

“스승님, 그 위험한 마경을 홀로 가신다고요?”

“그럴 순 없어요. 난 아직 길드장님한테 배울 게 많아요.”

두 여인이 곧바로 지적을 했다.

“위험하니까.”

미국 1위 랭커, 엘렌 테일러도 이긴 몸이다.

비공식이지만.

길드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승부하면 신준석과 홍윤수도 쓰러트릴 수 있는 전투력.

“최소 다이아몬드 등급. 너희는 아직 무리다.”

“그래도…….”

“이번에는 길드장님의 의견에 따르죠.”

“영수 아저씨!”

“우리는 길드장님이 올 때까지 기량을 갈고닦으면 됩니다.”

지영이가 섭섭하다는 눈빛으로 영수 형님을 바라봤다.

하지만 입술을 질근 깨물고 있는 김영수의 모습을 보자, 시선을 홱 돌렸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길드원들의 사기를 깎아 먹었네.

“잘됐군, 후배님.”

“예?”

“다이아몬드 등급이 최소인데, 그런 사람이 둘이나 있잖나.”

등 뒤에서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권성 신준석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생각이 나랑 통했군, 친구.”

“홍윤수 랭커도 선배님과 의견이 같으십니까?”

“마침 길드장과 팀워크를 맞춰 보고 싶었거든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팀 옐로우 스톰의 리더.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무공 사용자.

두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끄응.

마경에서는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한데, 생각도 못 한 팀원이 붙어 버렸군.

“그러니까 길드장의 안전은 걱정하지 마, 후배님들.”

신준석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면서 호쾌하게 외쳤다.

두 사람이라면 마경에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겠지.

“미스터 유.”

“말씀하시죠, 토마스.”

“저도 마경이라는 곳을 눈으로 담고 싶습니다.”

“변수가 너무 많은 곳입니다만.”

“제 능력이 모자라는 건 알지만 무리해서라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밀러는 고개를 숙였다.

[분석] 능력을 소유했을 뿐, 토마스의 전투력은 높지 않다.

바벨탑을 적극적으로 공략한 게 아니기에, 탑 등급은 골드이지만 길드원 중 한 명도 못 이길 정도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제 말을 꼭 따라 주세요.”

“아무렴요. 미스터 유, 아니 길드장님의 명령을 지키겠습니다.”

포식이 여러 정수들을 삼키면서 업그레이드되듯.

분석 능력은 더 많은 ‘현상’을 목격할수록 강해진다.

토마스를 제대로 부려 먹으려면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야겠어.

“여신님.”

“후훗, 여에게 맡기어라.”

어깨에 올라탔던 닉스가 실체화했다.

휘둥그레 커진 토마스의 눈.

“이, 이분은?”

“분석 능력으로 보니 무언가 다르죠?”

“Wonderful!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입니다. 미의 화신, 예술 작품 같아요!”

“…….”

저기요, 선생님.

분석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니라 닉스의 외모에 반한 겁니까?

“안목이 제법이구나, 아이야.”

“아, 고명하신 레이디. 괜찮으시다면 제게 이름만이라도…….”

“나랑 계약을 맺은 존재입니다, 토마스.”

가라앉은 목소리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시 한번 놀라는 토마스.

“결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미스터 유.”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손사래를 치며 민망해진 분위기를 털어 냈다.

“출발은 내일 아침. 협회에서 사람이 나올 테니 준비해 주세요.”

한자리에 모인 길드원들을 해산시킨 후, 무언가에 쫓기듯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대여, 안색이 안 좋구나.”

“나쁠 일이 없는데.”

“혹, 아까 그 아이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이더냐?”

“내가 뭐 하러.”

퉁명스레 대꾸하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닉스의 아름다움이야 늘 인식하고 있었지만, 토마스의 칭찬에 불현듯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 단어로 정의가 되지 않는 미묘한 감정.

마음속에 스며드는 불쾌감에 방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다음 날.

두 랭커와 분석관을 포함한 일행은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호 님.”

“한수창 팀장님, 바쁘다면서요?”

“이번 일은 협회 공식 차원으로 움직이는 거라서요. 특무대 담당인 제가 빠질 수 없죠.”

껄껄거리면서 웃는 한수창.

이 아저씨.

저번에 아르헨티나행도 그렇고, 나 따라서 해외여행 하는 게 취미가 된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이동 경로가 어떻게 됩니까?”

“이르쿠츠크 국제공항까지는 비행기로 이동, 그 뒤는 차량을 이용할 겁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요?”

“뭐, 한국의 원조에 감사하다고 형식적인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렇군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한수창은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러시아 플레이어들은 배타적입니다. 두 랭커 분이야 모르겠지만, 진호 님한테 시비를 걸 수도 있습니다.”

암요.

알다마다.

그 녀석들이 얼마나 타국 플레이어들을 무시하는지는 회귀 전에 지긋지긋하게 겪어 봤다.

여섯 군주 중 하나인 세르게이도 러시아 출신이니.

그 녀석과 팀을 맺기 전, 몇 번이고 콧대를 부러트렸다.

주먹으로 대화를 하지 않으면 매번 기가 살아나서 목을 바짝 세우거든.

“허허, 조심해야겠군.”

“권성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죠?”

“그자들이 후배님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요.”

한수창은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모쪼록 너무 튀는 행동은 삼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10대 마경도 생겼는데 별일이 있겠어?

러시아 플레이어들의 배타적인 성향이야 이미 알고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3시간 후.

나는 스스로의 안이함을 후회했다.

“동양인, 너희 실력으로는 우리를 못 도우니까 꺼져.”

얼굴에 피어싱 몇 개를 달아 놓은 험악한 사내.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 세르게이가 일행 앞에서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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