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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78화 (178/300)

178화

한옥풍으로 꾸며진 고급 음식점.

도자기와 놋그릇에 담긴 한정식이 상 위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는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은 방.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이 조금씩 온기를 잃어 가고 있을 때.

“내가 잘못 본 건가?”

한 사내의 음성이 침묵을 깨트렸다.

오장우.

이번 합동 미션의 밑그림을 그린 자이자, 국내 3대 길드 중 하나인 화랑의 길드 마스터이다.

탑 중계 현항에서 떼어질 줄 모르는 시선.

그의 망막 너머에는 박종원을 포함한 연합 길드원들이 솔라 익스플로전에 휘말려서 가루가 된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아직은 초반이니 괜찮겠지.”

불사조 길드 마스터, 양정수가 젓가락을 들었다.

말과 달리 떨리는 손가락.

산전수전 다 겪은 그마저도, 진호와 역천 길드의 압도적인 활약에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패배’라는 두 글자.

역천 길드와 연합 길드원들의 첫 전투를 보는 순간, 세 사람의 상념에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저 숫자가 지겠나.’

‘그렇게 될 리 없다.’

‘이번 미션에 투자한 게 얼만데.’

마음 한편에 드리운 불안함을 감춘 채 중계를 지켜보는 세 길드장.

상 위에 올려진 음식이 모두 치워지고 후식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시선을 중계 화면에서 떼지 않았다.

구릉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만 해도.

-……훈련받은 대로 하면 이길 수 있다!

-와아아!!

박종원의 독려로 사기가 살아난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었다.

세 길드의 전략 분석실에서는 예측 못 한 상황까지 고려해서 여러 대응책을 마련했다.

진호가 여태까지 확보했던 데이터를 상회하는 능력을 선보였지만.

압도적인 숫자를 이길 수는 없다고 자신했다.

후르릅-.

차를 마시는 소리가 방을 요란하게 울렸다.

가라앉은 분위기.

시간이 지날수록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먼저 일어나죠.”

자리를 박차는 미르 길드장.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어두운 조명과 대비되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어딜 가시는 거요?”

“대응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3대 길드도 아니고.”

“허허, 대응이라.”

“이 정도면 인정해야죠. 우리의 패배를.”

“아직 결정적인 실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오장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목소리 끝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분노.

미르 길드장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이번에 많은 것을 걸었습니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도 두 길드보다 크죠.”

“그래서요?”

“위험부담이야 내가 책임질 일이지만 대응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국내 10대 길드.

편의상 화랑과 불사조, 백호 다음가는 길드들이라고 분류했지만, 사실 3대 길드와의 간격은 엄청났다.

불사조와 화랑은 이번 실책을 겪어도 소란을 잠재울 저력이 충분했지만…….

“우린 아닙니다.”

미르 길드장은 굳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옥을 떠났다.

발걸음 소리가 텅 빈 통로를 울릴 때 즈음.

콰아아아앙-!

워 골렘의 다리가 박종원을 짓누르면서 발생한 굉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35층 공략을 마친 직후.

길드하우스 앞은 기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여기가 시장도 아니고.”

나는 로비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전 슬슬 적응이 되는데요?”

“다행이다. 지영이가 인터뷰하고 와라.”

“엑, 그건 사양할게요.”

“적응됐다며.”

“스승님의 업적을 제자가 가로챌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핑계는 잘 대요.

“사부, 그 인터뷰,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넌 파조동이라 안 돼.”

한국으로 국적을 옮기면서 대국 타령을 안 하는 건 기특하다만.

핑 레이 녀석의 언동으로 보아하건대 무슨 폭탄을 던질지 짐작도 안 갔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지영이.

“큭큭, 파조동이래.”

“너, 아무래도 안 되겠군. 대련으로 승부다.”

“싫은데? 에베베.”

“둘 다 조용히 해라.”

신경전을 벌이던 지영이와 핑 레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을 친 기자들을 흘겨보고 있을 때.

연어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누군가가 인파를 뚫고 길드하우스 안으로 들어왔다.

“한수창 팀장?”

저 양반이 웬일이래.

“승리 축하드립니다.”

인파를 뚫고 온 한수창 팀장이 숨을 고르며 인사했다.

“감사하긴 한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에이, 무슨 일이라뇨. 진호 님의 일에 저희가 빠질 수 없죠.”

“아무 데서나 그런 말씀 하시면 곤란합니다. 역천 길드가 협회의 어용 단체는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쇼. 저희는 파트너 아닙니까?”

능글맞게 웃는 한수창.

몇 달 전만 해도 어수룩한 부분이 조금 있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회귀 전의 기억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너무 유능해도 문제야.

“그런데 무슨 일로?”

“직접 뵙고 말씀드릴 게 있어서 말입니다.”

슬쩍 손짓하자, 길드원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자세를 낮춘 한수창.

나는 극야로 반경 4미터 정도를 물샐틈없이 감쌌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최근 국세청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흐름을 파악했습니다.”

국세청?

생각지도 않은 정부 기관이 튀어나왔다.

나는 의문을 표하기보다 묵묵히 한수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위스계 회사가 화랑 길드에 거금을 투자했다고 하던데, 알고 보니 유령 회사더라고요.”

“화랑 길드에 돌려서 투자할 일이 있습니까? 국내 3대 길드인데.”

“투자금 출처를 쫓다 보니 중국의 구룡방과 연관이 있다는 걸 발견했답니다.”

한수창의 말을 듣자, 퍼즐 조각이 머릿속에서 맞춰졌다.

“핑 레이 때문이군요.”

“저희도 그렇게 추측하는 중입니다.”

“이쪽에서 연막을 친 게 효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연막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의문 섞인 한수창의 질문.

난 핑 레이 영입 과정을 짧게 이야기했다.

“1, 1억 달러라니.”

“절반은 핑 레이가 값을 돈으로 달아 두었으니까 마냥 손해는 아니죠.”

“음, 그래도 저 같은 서민한테는 감도 안 잡히는 금액이군요.”

“어쨌든 구룡방에서는 핑 레이 영입 사태를 골드 문의 수작질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예? 거액을 투자하면서 진호 님을 견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구룡방이 나를 제대로 노렸다면 그렇게 어설픈 수는 안 썼을 거예요.”

화랑 길드에 투자를 해서 역천 길드의 위상을 깎아 낸다?

구룡방의 길드 마스터, 장 우페이는 그렇게 물러터진 성격이 아니다.

날 노릴 거였으면 우회 루트로 암살자들이라도 보냈겠지.

아니다.

이젠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니 조심해야겠군.

“그 말씀을 전해 주려고 오신 겁니까?”

“예, 진호 님.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화랑을 부추긴 게 구룡방이라.

꽤 흥미로운 정보다.

“모쪼록,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기자회견 때 신중을 기해 주십사…….”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길드하우스 앞으로 나갔다.

몰려드는 기자들.

찰칵! 찰칵!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가가 멀 것 같다.

“유진호 길드장님! 35층 미션에서 연합 길드원들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셨는데요!”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번 미션에서 특별한 전략이 있으셨…….”

기자들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곤.

흠-.

짧은 헛기침과 함께 내공을 섞었다.

내공과 경지가 모자라서 사자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시장 바닥처럼 온갖 소리로 가득하던 마당이 한순간이지만 고요해졌다.

“거기에 있는 기자님.”

“연맹 뉴스 이한철입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지목을 받은 기자가 재빠르게 말했다.

기자회견의 정석다운 첫 질문.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화랑 길드의 수준. 이번 대결로 잘 알겠더군요.”

“맞붙어 보니 어떠셨습니까?”

“시시했습니다.”

화랑, 그리고 배후에서 이번 사태를 종용한 구룡방.

날 건들면 조용히 넘어갈 수 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려 주마.

* * *

[역천 길드, 세 길드의 연합을 철저하게 뭉개다.]

[초신성들, 한자리에 모이다? 기대받는 유망주들은 손 하나 까딱 못해…….]

[유진호, 화랑 길드의 수준이 시시해서 죽고 싶다는 발언을…….]

[유진호에게 지목당한 화랑, 공식 입장에는 난색.]

이야, 기사들 제목 뽑아내는 거 보소.

“죽고 싶다고는 안 했는데.”

“그러면 곤란하니라. 여와의 계약을 잊었느냐?”

어깨를 감싸는 온기.

가느다란 닉스의 손이 내 어깨를 살짝 눌렀다.

“설마. 그걸 잊을 리 있나.”

“명심하여라. 그대의 목숨은 여의 것이니.”

“계약에서 그런 독소 조항은 없었잖아.”

“후훗, 그대의 생명이 사그라지면 여와의 계약을 못 지키게 되지 않느냐?”

“억지 논리군.”

“여는 본래 제멋대로이니라.”

늘 상전을 모시고 사려니까 피곤하구먼.

나는 인터넷 화면을 껐다.

“한데 왜 화랑을 자극한 것이더냐?”

“당장은 구룡방을 칠 수 없어.”

화랑 길드와 구룡방이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다.

유령 회사를 돌려서 자금 출자하는 정도야, 구룡방의 수법치곤 온건한 편이고.

“중요한 건 메시지야.”

“메시지?”

“화랑 길드를 사주하는 정도로는 핑 레이 영입의 배후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거.”

구룡방도 이젠 알 거다.

날 건들려면 화랑의 손을 빌릴 게 아니라 직접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35층 미션 중계에서 솔라 익스플로전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도 나름대로의 계산이다.

내 힘을 숨기면 적의 계산에 변수를 만들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늦는다.

상대를 끌어내야 빠르게 승부를 볼 수 있지.

“호오, 그렇다면 이미 구룡방을 적이라고 가정하였느냐.”

“구룡방을 생각하고 벌인 건 아니야.”

세 길드 연합의 배후에 구룡방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국내 3대 길드 중 둘이 견제를 했으니, 이쪽도 상응하는 퍼포먼스를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

“중요한 패는 사용하지도 않았잖아.”

“공허의 거울 말이구나.”

“응. 엘렌한테도 한 방 먹인 줄은 모를 거다.”

엘렌은 전 세계를 뒤져 봐도 손에 꼽히는 플레이어다.

정말 목숨을 건 생사투, 혹은 [공허의 거울]의 지속시간을 알았다면 승부가 또 달라졌겠지만.

어쨌든 승리한 건 나다.

구룡방의 장 우페이?

정면 승부라면 놈의 콧대도 뭉개줄 수 있다고.

“참으로 오만한지고.”

“그럴 실력이 있으니까.”

“강자에게는 오만이 허락되지.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도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똑똑똑-.

“저, 한 분이 스승님을 뵙고 싶다는데요?”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올 손님은 없는데.”

“낯이 익은 얼굴이에요. 누구신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요.”

“알았어. 준비할게.”

뭐, 오늘 일정은 수련밖에 없으니 누군지 확인이나 해 볼까.

로비로 나가자 외국인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Oh! 미스터 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붉은 곱슬머리의 사내가 화색이 된 채로 내 이름을 불렀다.

잠깐만.

“토마스 밀러?”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미스터 유!”

토마스 밀러라면 미국 최고의 [육성자]인데.

이 아저씨가 왜 여기를 찾아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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