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드드득!
굵어지는 뼈.
변화한 골격에 맞춰 근육이 팽창을 거듭한다.
쭉 늘어나는 턱과 꼬리.
다리는 두꺼워지고, 그에 대응하듯 팔이 짧아진다.
이때.
[공허의 거울이 오크의 정수를 비춥니다.]
오크의 정수를 투영하면서 육체에 다시 한번 변화를 주었다.
쭉 늘어나는 팔.
이족 보행을 하는 괴물의 정수가 반영되면서 생긴 변화다.
문제는.
“카오오오오!!”
이거, 눈물 나게 아프다!
누군가가 있는 힘껏 내 팔을 쭉 잡아당기는 기분.
“끝이 없군요, 미스터 유의 능력은…….”
엘렌은 감탄조로 중얼거리면서 오른팔을 휘둘렀다.
큼지막한 주먹.
변신 중에는 공격 안 하는 게 국룰 아니던가?
시답잖은 생각과 함께 꼬리를 휘둘렀다.
팔이 2차 변형을 일으켜서 그렇지, 꼬리는 이미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으니까.
[괴력을 사용합니다.]
[암흑 투기를 사용합니다.]
원시종의 육체로 변하면서 수배나 강해진 힘.
거기에, 암흑 투기로 꼬리를 감싸고는 괴력으로 엘렌의 오른팔을 후려쳤다.
충돌 순간에 퍼지는 힘의 파동.
엘렌은 꼬리에 실린 강력한 힘을 해소하지 못하곤 20미터 이상 밀려났다.
“내가 밀리다니.”
놀란 듯이 주먹을 힐끗 보는 엘렌.
오크의 정수를 반영한 2차 변이가 끝났다.
3배 정도 길어진 팔.
여전히 주먹을 뻗을 만한 구조는 아니지만, 일부 무공을 구현할 수 있었다.
내 노림수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육체에 오크처럼 이족 보행을 하는 형태였는데.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가 베이스이고, 두 정수의 수준 차이가 심하다 보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하지만.
지속 시간 2분을 날릴 만큼의 성과는 있었다.
[근력·민첩·체력·맷집이 500% 늘어납니다.]
[신체의 구조가 변형되었으므로 일부 스킬이 사용 불가능해집니다.]
[두 영혼의 흔적을 동시에 구현했습니다. 봉인된 스킬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막대한 스펙으로 펼치는 무공.
어느 정도의 위력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마침 내 전력을 받아 낼 정도의 실력자도 눈앞에 있으니 손속을 아낄 필요도 없고.
충만한 내공으로 지면을 강하게 찼다.
출렁거리는 섬 일대.
여태 잘 버텨 오던 결계가 진각 한 번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어, 어어어?”
“스승님, 우리도 좀…….”
대련 장소에서 거리를 둔 이들조차 백택군림각의 충격파로 중심을 가누지 못했다.
충격의 진원지에서 가까이에 있는 엘렌.
두 다리에 힘을 주면서 백택군림각의 파동을 버텨 냈지만.
“크읏.”
딱 충격파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여태까지 쌓아 놓은 충격.
두드러지는 외상은 없지만, 상당한 피로감을 느낄 거다.
내가 이 타이밍에 승부수를 건 이유이기도 하고.
[악귀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아껴 두었던 마지막 스킬도 사용했다.
넘쳐나는 에너지.
이 상태는 오래 유지할 수 없어.
원래의 내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
스킬 지속 시간이 아니어도 오래 유지하면 육체가 붕괴될걸?
그러니까.
“이 승부, 1분 안에 끝낼 겁니다.”
엘렌이 백택군림각의 충격을 해소하는 동안, 벌려 놓았던 거리를 바로 좁혔다.
원시종의 영향으로 더 예리해진 손톱.
[메탈 반사 장갑]을 손톱 위에 코팅해서 절삭력을 더 높이고.
탐욕의 가호로 위력을 증대시켰다.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곡선으로 휘어지는 손톱.
수라마령심공의 영향으로 검어진 기가 대량으로 방출되었다.
덩치가 커진 만큼 방출하는 내공의 양도 많아졌다.
막 몸을 가눈 엘렌은 양팔에 깍지를 끼었다.
[기간틱 프레셔]
깍지 낀 주먹 위로 맺힌 푸른 기파.
오러가 소용돌이치면서 위력을 증폭시킨다.
방어용으로 두른 오러마저 모두 공격으로 되돌리는 비장의 기술.
주먹에서 방출된 오러의 폭풍이 정면으로 휘몰아친다.
까득! 까드득!
오러와 유형화된 기의 충돌.
손가락이 정면으로 몰아치는 힘에 부러질 것 같지만.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면서 내공을 더 밀어 넣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엘렌.
[공허의 거울]로 능력치를 뻥튀기했지만, 오러 대 기의 총량을 비교하면 엘렌이 한 수 위였다.
근데 밀리거나 피하기는커녕 더 전진하니까 놀랄 만하지.
“으그그그.”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간틱 프레셔.
회귀 전에는 지겹도록 본 기술인 만큼 약점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오러의 회전 축.
그곳에 힘을 주면.
서걱!
잘려 나가는 오러의 폭풍.
흑색 기를 두른 손톱이 엘렌의 목덜미에 닿았다.
엘렌은 내 손톱을 힐끗 보더니.
“……제가 졌네요.”
손을 위로 올리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한 랭커가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
[공허의 거울을 해제합니다.]
변이 과정부터 전투, 그리고 엘렌의 항복을 받아 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45초.
하지만.
“우웨에엑.”
공허의 거울을 사용한 반작용은 엄청났다.
내 수준을 벗어난 힘을 구현한 대가.
스킬의 원주인인 내샨 대공은 지속 시간이 다 될 때 즈음에 몸뚱이가 붕괴되었으니.
감당하지 못할 힘을 다룬다는 건 이렇게 위험한 거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걱정하…… 우욱.”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닉스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취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부탁이니까 가만히 내버려 둬.”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하곤 다시 한번 속에 있는 걸 게워 냈다.
[악귀의 분노]를 안 썼으면 좀 나았으려나.
엘렌한테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었다면, 엘렌도 숨겨 둔 수 하나를 썼을 테니까.
이 시점에도 그 기술을 깨달았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변수를 없애려면 엘렌이 마지막 수단을 꺼내기 전에 밀어붙이는 게 최선이었다.
“미스터 유, 훌륭했어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엘렌이 다가왔다.
몰골만 놓고 보면 승자와 패자가 반대로 보이는구먼.
이긴 건 난데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호호호, 칭찬이라뇨. 저보다 강한 분한테 그런 표현은 맞지 않죠.”
“운이 좋았죠.”
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보던 엘렌.
“좋은 승부였어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공룡 화석. 역시 미스터 유의 힘과 관련이 있었네요.”
“덕분에 엘렌 상무님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죠.”
“그럼 제 패배를 스스로 도운 꼴이네요.”
말하는 것과 달리, 엘렌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뒤끝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네.
“근데 괜찮겠습니까?”
“카를라 말인가요.”
“골드 문이 반기지 않을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길드 마스터는 제가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저한테 질 걸 예상이라도 하셨습니까?”
“호호, 설마요. 그렇지만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마스터를 설득할 명분도 생겼죠.”
엘렌은 나를 가리켰다.
“미국 랭킹 1위를 꺾은 실버 등급 플레이어를 척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패배마저 거래 재료로 활용하겠다니.
“참, 이번 일은 아시죠?”
“비밀로 부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엘렌이 패배했다는 게 알려지면 골드 문도 곤란해진다.
골드 문의 길드 마스터, 윌리엄 록펠러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건 나쁘지 않지만.
엘렌의 입장이 난처해지니 이번에는 참아 줘야겠지.
“후배, 정말 대단하군!”
“대단한 싸움이었습니다.”
두 랭커가 화색을 띠며 가까이 왔다.
눈가에 아른거리는 호승심.
신준석이야 그렇다 쳐도, 늘 한 발 물러서 있는 홍윤수마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내기에 진 대가로 길드에 가입한 홍윤수.
평소 내 말을 듣긴 해도 감복했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엘렌하고 겨룬 걸 본 뒤로는 눈까지 반짝였다.
“홍윤수 랭커님이 주신 천년설삼 덕분이죠.”
“잠깐, 언제 그런 걸 후배님한테 줬나?”
“예전에 길드장이 내 동생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보답이었지.”
홍윤수의 코가 하늘 위로 치솟았다.
“더 분발해야겠군.”
아니, 이 선배님은 엉뚱한데서 경쟁심을 가지네.
“확신이 섰습니다, 길드장.”
“어떤 확신요?”
“옐로우 스톰. 저희 팀 전원을 길드에 입단시키겠습니다.”
팀 옐로우 스톰.
홍윤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5인 팀이다.
랭커인 홍윤수에 미치지는 못해도, 국내에서 유명세를 떨친 실력자들로 구성되었다지.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신준석의 팀, 무극(武極)도 마찬가지다.
전원이 무공 사용자.
팀 옐로우 스톰보다는 한 수 아래로 평가받지만, 현 시대에는 페널티로만 여겨지는 무공을 익혀서 강해진 만큼 쓸 만한 인재들이다.
“좋습니다. 다만, 팀원들은 두 분에게 맡길게요.”
모든 길드원들의 훈련을 봐줄 수는 없다.
지금까지 모은 이들을 단련시키기도 벅찬데, 더 늘릴 수는 없잖아.
“알겠네.”
“그리합지요.”
두 랭커는 눈을 반짝였다.
보아하니 나랑 대련하고 싶어 하는 눈치군.
신준석이나 홍윤수, 두 사람 다 강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진짜니까.
내가 두 랭커한테 시달리는 동안 엘렌도 카를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를라, 내 명예를 걸고 길드 이적 건을 해결할게.”
“엘렌 상무님.”
“그렇게 말하지 말고. 전처럼 편하게 말해 줄래?”
“……사부님.”
“또, 네 마음에 진 응어리를 늦게 알아줘서 미안하고.”
“아니에요.”
말문이 막힌 카를라.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눈동자에 습기가 감돌았다.
“카를라야, 정말 잘됐어!”
옆에 끼어든 지영이가 눈치 없이 카를라를 끌어안았다.
“아니. 난, 그게…….”
“앞으로도 나랑 같이 다니자. 핑 레이는 싫단 말이야.”
“나도 소저가 싫소.”
“흥. 그래도 야나 빵즈보다는 낫네.”
어느새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길드원들.
늦게 합류한 엔리케가 쭈뼛거리긴 해도 제법 동료애가 쌓인 모습이다.
길드원 문제도 해결됐겠다.
“남은 건 35층 미션인가.”
“겁 없이 그대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들 말이더냐?”
“응. 이쪽도 준비는 끝났으니 날짜를 잡아야겠어.”
“후훗, 어리석은 자들이로고.”
닉스가 슬며시 웃었다.
“여신님.”
“무슨 일이더냐?”
“웃음이 꽤나 음흉해 보여서.”
“아, 몰랐구나. 그대가 짓는 미소를 따라 해 본 것이니라.”
“…….”
사람 물 먹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간식 3일 압수.”
“이건 계약 위반이니라!”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치는 건 계약에 안 들어가 있거든?”
“그대여, 여는 이번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도다.”
“예예. 잘 기억해 두세요.”
난 혀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