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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71화 (171/300)

171화

“앞으로 단 한 번. 어떤 요구든 들어드리죠.”

검지를 쭉 펼치는 엘렌.

“그 부탁.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미스터 유, 그리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요.”

재미있군.

엘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상대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다.

회귀 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거든.

나중에 듣기로는 그녀가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셋뿐이라고 했다.

뭐, 여기서 이상한 제안을 했다가는 기껏 쌓은 호감이 날아가 버리겠지.

“골드 문 대신 역천에 가입해 달라고 하면, 몸값을 요구하겠죠?”

“오. 미스터 유, 제 생각을 들여다본 것 같네요.”

입을 가리면서 웃는 엘렌.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엘렌이 말한 ‘요구’를 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 제안이 터무니가 없으면 상응하는 대가 또한 줘야 한다는 것.

“참고로 제 몸값은 꽤 비싸답니다.”

미국 랭킹 1위.

전 세계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플레이어다.

플레이어가 치안 유지에 필수불가결이 된 사회.

엘렌의 몸값을 매기는 건 불가능할 거다.

뭐, 나도 엘렌을 우리 길드에 넣으려고 하진 않았다.

그녀는 장차 ‘군주’가 될 재목.

미국에서 여러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멸망의 시대에 전선을 맡아 줄 중요한 동료다.

원 역사대로 한국 말고 북미 대륙에서 자리를 잡는 게 유리하단 말.

그렇다면.

이 ‘부탁’을 어떻게 써먹을까?

“실은 엘렌 상무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잘됐네요. 뭔가요?”

“대련입니다.”

“호호, 그 정도는 부탁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는데.”

“평범한 대련이라면 이런 말씀을 안 드리죠.”

의미심장한 말.

엘렌의 눈가가 살짝 휘었다.

“저는 엘렌 상무님의 진심을 보고 싶습니다.”

“진심이라니.”

“둘의 전력으로 맞붙는 대결. 제가 이기면 카를라를 저희 길드원으로 두는 걸 묵인해 주시는 조건으로요.”

엘렌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네요. 이런 요구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이 부탁. 들어줄 겁니까?”

“그럼요.”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플레이어.

엘렌과의 대결이 성립되었다.

* * *

“골드 문에서 결계 담당자들을 모두 불렀어요.”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랭커.

엘렌이 전력을 내면 트레이닝 센터의 방어 마법 수준으로는 버틸 수 없다.

둘의 등급 차이가 원체 많이 나다 보니 동시에 입장 가능한 게이트도 마땅치 않고.

“고맙습니다.”

“뭘요. 제대로 힘을 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엘렌이 대련을 준비하는 동안 길드원 전원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허허! 후배님. 전에도 느낀 거지만 참으로 과감해.”

“진호 길드장. 괜찮겠습니까?”

박장대소하는 신준석.

홍윤수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닌걸요. 괜찮겠죠.”

“길드장님은 참 무모하시군요.”

홍윤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바벨탑이 생긴 이후 늘 정상에 머무르던 플레이어.

내가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라고 생각하겠지.

“두 분께는 특별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보시게. 후배님.”

“엘렌 상무와의 대련을 지켜봐 주시죠.”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나? 이렇게 재미있는 걸 놓칠 수 없지.”

신준석은 호탕하게 대답했다.

반면 홍윤수의 표정에서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비쳤다.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참. 그리고 이번 대결은 대외비입니다.”

다이아몬드 등급 랭커가 갓 실버에 오른 나하고 목숨을 건 대결을 한다?

결과를 떠나 엘렌한테 좋게 작용하지는 않겠지.

“예. 길드장님.”

길드원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대결 장소는 충남 서산에서 조금 떨어진 무인도로 정했다.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고른 장소.

-정부에는 협회 차원에서 훈련을 한다고 둘러댔으니, 섬을 날리지만 말아 주십쇼.

한수창 팀장은 애원하듯 말했다.

역시.

행정과 관련된 문제는 협회에 맡기는 게 최고라니까.

“골드 문에서 결계를 맡아 줄 인원들도 오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 진호 님만 믿겠습니다.

며칠 후.

미국에서 온 결계 전문가들과 길드원들을 대동한 채 무인도로 향했다.

“상무님. 결계를 전개하겠습니다.”

“네. 충격이 좀 셀 거니까 빈틈없이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미국의 길드들은 탑 바깥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훈련을 자주 했다.

훈련 때마다 지형지물을 망가트릴 순 없으니, 파괴를 막는 결계 전담반도 있었다.

“와. 스승님, 결계 구조가 신기해요.”

결계 고유 능력을 보유한 지영이가 두 눈을 반짝였다.

구축 과정은 상이하게 다르지만.

여러 결계가 덧대어지는 과정을 연구하다 보면 지영이의 수준도 한 단계 올라가겠지.

“열심히 관찰해 봐.”

“네!”

결계 전담반이 펼친 마법들의 배열은 기업 비밀 같은 거다.

알려 달라고 해도 욕이나 듣고 말 테니, 눈대중으로 살피는 게 최선.

지영이의 눈썰미와 재능, 그리고 마력 운용 감각이라면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마 후.

우우우웅-!

푸른 막이 섬 전체를 휘감았다.

복원과 충격 흡수.

대련 중에 힘 일부가 새어 나가도 결계가 받아 낼 테니 주변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준비가 끝났어요. 미스터 유.”

“그렇군요.”

저벅- 저벅-.

엘렌은 무장을 갖춘 채로 나타났다.

헐거워 보이는 갑주.

군데군데에 틈이 나 있고, 오우거의 힘줄처럼 탄성이 강한 재질로 엮어 놓았다.

핑 레이가 손을 흔들었다.

“길드장님. 형편없이 지지나 마십쇼.”

“오냐. 넌 이따 보자.”

신준석과 홍윤수는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게 기세를 가다듬었다.

두 사람이 나설 일은 없을 거라고 해도 저러네.

“엘렌 상무님. 시작할까요?”

“네. 무운을 빌죠.”

“대련 시작은 선배님이 해 주시죠.”

신준석은 내 말을 듣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셋.”

후욱-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몸의 긴장을 풀었다.

“둘.”

수라마령심공을 운용.

내공을 전신에 순환시켰다.

“하나.”

마주하고 있는 상대.

엘렌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향한 이미지를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시작.”

신준석의 입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인크레더블]

엘렌의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팍이 부풀어 올랐다.

드드드득!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굵은 핏줄들.

벌크업을 한 보디빌더, 아니 그 이상으로 확장된 근육이 마구 꿈틀댄다.

신장은 4미터까지 늘어났고.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이 전신을 꽉 채웠다.

엘렌의 고유 능력, 인크레더블.

전 세계를 통틀어서 최상위로 평가받는 강력한 재능이다.

변신까지 걸린 시간은 약 0.5초.

나도 가만히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욕망의 주머니에서 꺼낸 책.

단탈리온의 힘이 깃든 페이지를 펼치고, 마력을 부여했다.

퍼엉!

엘렌이 발을 뗀 건 저주가 완성되기 직전.

0.1초 만에 서로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르스 게티아 - 내장 스킬 : 단탈리온의 환영을 사용합니다.]

돌처럼 단단한 근육이 내 몸뚱이를 짓이기기 직전에 완성된 주문.

72마신 중 하나.

단탈리온의 힘을 구현한 암흑 마나가 엘렌을 휘감았다.

동시에 백 스텝으로 거리를 벌리자, 짓쳐 들던 엘렌의 몸이 한순간 휘청거렸다.

휴.

뒈지는 줄 알았네.

저주 하나 먹이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신준석과 겨룰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디버프 스킬을 연이어 전개했다.

바라보는 것으로 발동하는 [검은 눈빛]과 [약화의 문장]을 동시에 전개.

엘렌의 발에는 [분노의 족쇄]가 채워졌고, 화염 영혼의 낙인이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머드 트랩을 사용합니다.]

[스컬 핸드를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로 위력을 증대시킨 광역 디버프 스킬이 반경 10미터를 뒤덮었다.

모든 디버프를 전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

그 순간.

“이렇게 강력한 저주는 처음이네요.”

엘렌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나를 바라봤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동공.

[단탈리온의 환영]을 완전히 떨쳐 내진 못했지만, 내 위치를 분간할 정도는 되는 모양이다.

디버프 저항력은 이때도 무식하게 셌구나.

통나무처럼 두꺼운 다리를 슬쩍 들더니, 늪으로 변한 땅을 그대로 짓밟았다.

탐욕의 가호도.

재배열한 마력도 진각 한 번에 으깨져 버렸다.

참 쉽게도 박살 내는군.

신준석 때처럼 3수라도 양보를 받았어야 했나?

발을 묶고 있던 마법을 모두 깨트린 후, 엘렌은 다시 정면으로 돌진했다.

전차가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 같은 압박감.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중압이 내 영혼을 짓누른다.

걱정하지 마라.

불리한 싸움은 회귀 전에도 지긋지긋하게 벌여 봤거든.

이런 감각은 익숙했다.

확연하게 느려진 엘렌의 돌진 속도.

[단탈리온의 환영]을 비롯해서 여러 디버프 스킬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그래도 저 속도에 겨우 반응하는 게 고작이군.

스스스슷!

극야의 힘이 지면에서 솟구친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요.”

“과연 그럴까.”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엘렌의 눈동자.

극야로 구현한 건 무기가 아닌, 내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극야로 만든 ‘나’들은 모두 시커멨다.

누구라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당신이라면 가능할까?”

쾅! 쾅!

엘렌의 돌진 궤도가 지그재그로 변했다.

단탈리온의 환영은 대상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구현하는 강력한 저주다.

신준석도 대련을 벌이는 중에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저주.

엘렌의 수준이 조금 더 높긴 해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단탈리온의 환영을 완전히 무효화하진 못했을 거다.

그러니까.

형태만 비슷하면 어설프게 구현한 내 모습이라도 환영의 대상이 된다는 거지.

극야로 시간을 버는 동안 버프 스킬을 전개했다.

[피오르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뇌신(雷身)을 사용합니다.]

끓어오르는 힘.

선법으로 구현한 번개의 힘이 반응 속도를 늘려 주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정면으로 붙어볼 만하지.

운류보를 전개.

단탈리온의 환영에 흔들리고 있는 엘렌에게 접근했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바닥에서 솟구친 내 형상.

“잔재주 하나는 대단하군요.”

엘렌이 분기 섞인 목소리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펑! 형태를 잃고 부서지는 극야.

엘렌의 시선이 극야로 만든 허상을 향했을 때.

운류보로 돌진 방향을 급격하게 꺾어서 등 뒤를 점했다.

수라마령심공으로 쌓은 내공이 팔뚝을 뒤덮고.

[마룡의 분노]가 더해지면서 비늘처럼 실체화가 되었다.

백수제왕무 1초식.

응룡황권을 내지르는 순간.

“거기 있었군요.”

엘렌이 등을 홱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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