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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64화 (164/300)

164화

잊힌 자들의 회랑.

이미르의 등뼈 최상층에 위치한 공간이다.

주기적으로 재조립되는 탑 지하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장소.

“문이 열렸다.”

외눈의 거인이 중얼거렸다.

감겨 있는 눈꺼풀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이한 빛.

포보르 일족의 수장이자 사안(邪眼)의 주인인 발로르가 이변을 감지했다.

“또 유부의 열쇠인가?”

“1차 대침식이 일어나면 지하에 기어들어 오는 놈들이 하나씩 있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몇몇 고신들.

유부의 열쇠는 고신족들이 의도해서 만든 아이템이 아니다.

탑과 세계가 동기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

프로그램으로 치면 버그 같은 것이다.

“와서 얻을 것도 많지 않은데 왜 기어오는 건지.”

“보물을 찾아가는 놈들도 있지 않나.”

“대부분은 낭패만 보고 가지만.”

탑 지하는 애초에 클리어하라고 만든 공간이 아니다.

패배한 과거의 신들.

고신족들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추락한 감옥.

탑 지하에는 따스한 햇볕도, 대지를 적시는 비도 오지 않는다.

척박함으로 가득한 세계.

곳곳에 고신족들의 힘이 담긴 성유물이나 강력한 무기가 숨겨져 있긴 해도, 그걸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놈이 탑 지하를 들쑤시면 감시관들도 난동을 피우겠구려.”

“빌어먹을 성좌들.”

“언제쯤 이 굴욕을 갚아 줄 날이 오려나.”

케르베로스.

공작 감시관.

그 외에도 여러 성좌들의 눈과 귀가 탑 지하를 감시했다.

혹여 유폐된 고신족들이 신들의 사회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감시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건 고신족들한테도 고역이었다.

탑 지하를 휘젓는 플레이어들도.

이를 감시하는 신들의 사회도.

고신족 입장에서는 모두 다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이걸 얻어 왔지.”

쿵! 쿵!

발로르에 비견되는 덩치의 거인이 회랑 안으로 들어섰다.

푸른 피부 주위로 감도는 한기.

서리거인의 왕, 우트가르트 로키가 시커먼 목검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검 주위에 흐르는 강력한 파동.

고신족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 불길한 검은 대체?”

“성좌의 별빛마저도 지워 버릴 만한 칼이라고?”

“미, 미스틸테인이다.”

“대체 그 무기는 어디서 난 것이오, 요툰의 왕이여!”

우트가르트 로키는 히죽 웃었다.

“로키.”

기만과 사기의 신.

서리거인의 왕과 동명이인의 존재다.

“참으로 불길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구려. 한데, 이 검을 어디에 쓰려고……?”

“플레이어에게 주는 거지.”

“지하에 들어온 플레이어를 가리키는 거요?”

“맞다.”

종말의 마검 미스틸테인.

사용자에게 강한 힘을 부여하지만, 광증으로 정신을 물들여서 검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독한 마검이다.

오딘의 후계자로 알려진 발두르를 빈사 상태로 만든 검.

그 이후로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했지만, 실은 원 소유주인 로키가 보유하고 있었다.

“필멸자에게 마검을 줘서 어찌 하려는 건지.”

“뭐긴. 간단한 술식을 추가할 거다.”

우트가르트 로키는 칼날에 룬 문자를 새겼다.

추종의 룬.

미스텔테인의 여파로 광인(狂人)이 된 사용자는 무의식적으로 고신족을 추종하게 될 것이다.

“오, 탑과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날이면 우리의 수족이 되겠구려.”

“과연 요툰의 왕. 그 지혜가 대단하오.”

고신족들은 감탄했다.

탑 지하로 들어오는 플레이어를 배척하는 게 아닌, 고신족들의 패로 활용하는 방안.

여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였다.

“기대가 되는군. 이 검을 쥐게 될 플레이어가 누구일지.”

우트가르트 로키는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 * *

[데스 나이트의 정수를 포식했습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고대]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암흑 투기가 추가됩니다.]

[암흑 투기]

등급: ★★★

분류: 액티브

암흑 마나를 사용자의 의지대로 유형화한다.

푸스스-.

데스 나이트의 두개골이 가루로 화했다.

바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괴물의 정수.

이왕 탑 지하에 왔으니 그냥 가면 서운하잖아?

그런데.

막상 데스 나이트의 정수를 포식하면서 생성된 스킬은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암흑 투기라.”

손가에 아른거리는 흑색 기운.

막 쓰러트린 데스 나이트가 다루었던 암흑 투기 그대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걸?

난 미간을 찌푸렸다.

회귀 전에는 포식하지 못했던 언데드의 정수.

그러니, 데스 나이트의 정수에서 스킬을 추출한 것도 최초다.

한데 [암흑 투기]를 얻을 줄이야.

“그대여, 문제라도 있느냐?”

“음, 문제라기보단…… 호재라서 말이야.”

암흑 투기는 오러, 혹은 검기상인처럼 기운을 유형화하는 스킬이다.

아니지.

정확한 표현으로는 스킬보다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겠어.

기를 유형화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현시대에 무공 사용자가 일반적인 근접 계열 직군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받는 이유.

무공의 위력을 극대화하려면 깨달음이 필수다.

암흑 투기나 오러도 마찬가지.

근접 계열 플레이어 중 기 발현과 동급으로 여겨지는 ‘오러 마스터’의 경우, 그에 상응하는 깨달음을 얻어야 오러를 펼칠 수 있다.

한마디로 스킬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암흑 투기는 그냥 전개가 된다는 거야.”

회귀 전의 나도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기를 유형화하거나 강기를 펼칠 수 있었다.

포식으로는 깨달음과 관련된 스킬을 얻지 못했거든.

데스 나이트의 [암흑 투기]는 그 틀을 벗어난 커다란 변수였다.

“이상하구나.”

“그렇지?”

“여가 짚고자 하는 건 그대의 생각이니라.”

“갑자기 내 생각은 왜.”

“그대조차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면서 왜 한계를 재단하느냐?”

제가 회귀자니까 당연히 알고 있죠.

하마터면 속마음을 그대로 꺼낼 뻔했다.

“맞는 말이네.”

닉스한테 대충 얼버무리고는 마음속에 떠오른 의구심을 접었다.

지금은 타이밍이 안 좋아.

데스 나이트의 정수를 포식하면서 알아낸 새로운 ‘포식’의 가능성.

탑 지하를 빠져나가면 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었다.

포식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낸 것과 별개로.

[암흑 투기]는 큰 쓸모가 없었다.

권기상인의 경지.

이미 기를 유형화시킬 수 있어서 암흑 투기와 포지션이 겹쳤다.

권기를 펼친 상태에서는 암흑 투기가 구현되지 않았으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내공이다.

파괴력은 권기가 한 수 위.

진(眞) 여의주도 있으니 내공이 모자랄 일은 거의 없다.

방어 용도라면 모를까.

[암흑 투기를 사용합니다.]

파츠츠츠!

암흑 투기가 은회색 갑주 위를 뒤덮었다.

“나름대로 장점은 있네.”

[호신강기]처럼 제한된 형태로만 방어형태로 운용 가능한 기.

암흑 투기는 내 의지대로 구현이 가능했다.

편리성에서는 암흑 투기가 한 수 위야.

“호오, 성질이 다른 기운을 동시에 운용하려면 힘들지 않겠느냐?”

“또 수련해야지.”

암흑 투기를 펼치려면 마나에서 암흑 마나로 치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메탈 반사 장갑과 암흑 투기를 동시에 전개하려면 마나/암흑 마나를 동시에 운용해야 한다는 말이지.

그뿐이랴.

전투 중에 무공을 펼치면 내공까지 운용해야 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성질이 다른 세 기운을 완벽하게 다루려면 무던히도 노력해야겠어.

포식으로 스킬이 추가되었다 한들, 발동하는 건 내 의지니까.

또 한 가지 얻은 게 있다면 [어둠의 육체]의 또다른 활용 방법이다.

정수 갈취의 범위 증가.

그 ‘정수’라는 건 포식 능력도 포함되는 말이었다.

어둠의 육체로 동화한 극야로 포식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

“덕분에 사체를 일일이 만질 필요가 없어졌네.”

동시다발적으로 포식 사용이 가능해지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전투 중에 전략적으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이번 탑 지하행에서 많은 것을 얻어 가는군.

그러면.

슬슬 다프네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 볼까?

* * *

이미르의 등뼈.

탑 지하를 유지해 주는 기둥이다.

“나리, 여기에 손을 대 봐.”

“이렇게?”

코니가 시키는 대로 기둥에 손을 얹었다.

옛 신의 각질을 먹은 덕에 만지는 것까지는 무리가 없었다.

“다음은 뭐냐.”

“머릿속으로 숫자를 떠올려. 3층이라면 3.”

3…….

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미르의 등뼈에서 환한 빛이 솟구치면서 전신을 휘감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각.

이미르의 등뼈에 삼켜진 직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이동했다.

공간 도약 같은 게 아니라 물리적인 이동이라니.

일반인이라면 이동 과정에서 전신이 짓눌려서 으깨졌을 거다.

잠시 후.

강력한 반탄력이 등을 밀었다.

나는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탑 지하 3층.

1층과 마찬가지로 어둠으로 감싸져 있는 삭막한 공간이다.

“케헥!”

코니가 위액을 쏟았다.

치유 주문으로 기운을 북돋아 주자, 녀석이 나를 괴물 보듯 바라봤다.

“나리는 괜찮아?”

“속이 좀 울렁거리는 거 빼곤.”

“으으으, 이래서 등뼈를 타기 싫다.”

탑 3층에 도달하자 잎사귀 위로 초록색 기운이 감돌았다.

화살표 모양을 한 기운은 어둠 너머를 가리켰다.

“코니, 넌 마을로 돌아가도 좋다.”

“왜 그러나?”

“안내야 화살표를 따라가면 되니까. 위험해지면 너까지 보호해 줄 수 없어.”

다프네가 건 미션 때문에 2층을 들르지 않고 왔다.

이 녀석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길안내를 받을 수가 없잖아.

“히히. 그런 이유라면 반대한다.”

의외의 대답.

나는 의문 섞인 눈빛으로 코니를 흘겨보았다.

“나리를 따라다니는 게 꽤 재밌거든.”

“좋아. 그 대신 네 안전은 스스로 챙겨라.”

“히히히. 나도 이곳의 주민이야. 그건 기본이라고.”

일행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동 중, 간혹 공작 감시관과 마주치기도 했다.

한 마리는 숨을 것도 없이 정면으로 격파.

다수가 있으면 [어둠의 육체]와 [밤의 걸음]을 동시에 운용.

기습으로 쓰러트렸다.

하지만.

[케르베로스]

“저건 못 쓰러트리겠다.”

지저세계의 감시자.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발견했을 땐 숨죽인 채로 이동했다.

영물을 넘어선 신수.

S급 성좌에 버금가는 강력한 괴물이다.

미션을 내린 다프네도 케르베로스한테는 상대가 안 될걸?

얼마 정도를 걸었을까.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 눈앞에 나타났다.

뱅글뱅글.

제자리에서 도는 화살표.

다프네가 말한 ‘아포피스’의 영역이 여기인 듯했다.

“그럼 뱀 사냥을 시작해 볼까.”

태양을 먹는 뱀.

이번 지하행에서는 생각도 못 했던 괴물의 정수를 포식할 수 있겠어.

내 눈동자가 탐욕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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