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식은땀이 등허리를 축축하게 적신다.
작은 산처럼 커다란 나무.
중심부에는 여인의 상을 한 얼굴이 박혀 있다.
군단장 다프네.
현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다.
“코니.”
“왜 그러나?”
“내가 전투를 시작하면 반대로 뛰어라.”
“나리는 어떻게 하고.”
“저 녀석의 발을 묶어야지.”
고귀한 희생 같은 게 아니다.
탑 지하에서 사망해도 추방당하는 게 전부.
유부의 열쇠를 하나 더 얻으면 그때라도 코니를 안내역으로 써먹어야지.
좀 시끄러운 게 흠이지만 능력은 괜찮은 녀석이니까.
“나리!”
-후후훗, 그래야 여의 계약자 아니겠느냐.
이 양반들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날 앞에 두고 떠들다니. 여유가 넘치나 봐, 필멸자?』
다프네가 팔짱을 낀 채로 일행을 오시했다.
강렬한 살기.
[냉혈이 발동됩니다.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냉혈이 발동······.]
눈이 핑핑 돈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튜토리얼 때 바알을 마주했던 때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알싸한 고통.
잠시 후, 비릿한 피 맛이 입에 감돈다.
이제야 살 만하군.
나는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용맹을 사용합니다.]
[공포 상태가 해제됩니다.]
냉혈 스킬도 만능은 아니다.
등급이 3성인 만큼 저항하는 것도 한계가 명확했다.
정신계열 디버프를 해제해 주는 용맹의 증표.
냉혈 덕에 거의 쓸 일이 없었지만, 오래간만에 사용하니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너, 탑 지하의 존재가 아니네.』
“맞아. 탑 밖에서 왔다.”
나는 암암리에 수라마령심공으로 내공을 전신에 순환시켰다.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게끔.
꿀꺽- 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네놈도 빌어먹을 뱀 새끼의 의뢰를 받고 온 거니?』
잠깐만.
빌어먹을 뱀이라.
나는 회귀 전의 지식을 최대한 떠올려 보았다.
다프네와 사이가 안 좋으면서 ‘뱀’이라고 불릴 만한 군단장은 한 명뿐.
이 상황.
잘만 하면 이용할 수도 있겠어.
“아포피스가 당신을 귀찮게 하나 보군.”
『뭐야. 넌 뱀 새끼랑 연관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하려는 거야?』
“그렇다. 스틱스강에 걸고 맹세하지.”
스틱스강을 건 맹세.
올림포스 신족, 혹은 그에 기원을 둔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기어스(제약)이다.
[스틱스강에 걸고 맹세했습니다.]
[당신의 발언이 거짓일 경우, 망각에 집어삼켜집니다.]
시스템의 경고.
바깥이라면 모를까.
탑 지하에는 스틱스강이 흐르고 있기에, 나 또한 제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대번에 지른 거고.
『필멸자 주제에 스틱스강을 알고 있구나.』
“당신들의 신화는 우리 세계에도 전해지고 있거든.”
『신화는 무슨. 저 찬란한 별빛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된 줄 알아?』
경멸조로 내뱉는 다프네.
그녀 또한 신화의 희생자이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여러 세계를 멸망시킨 죄를 면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회귀 전.
서유럽을 짓밟은 엔트들의 물결을 떠올리면…….
이미 몇 개의 차원이 그들에게 멸망당하지 않았던가.
다프네 역시 올림포스 신족들과 마찬가지였다.
후-.
짧게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제 믿어 주겠나.”
『그렇다고 해서 내 아이들을 해친 일이 사라지지는 않아.』
“날 죽인다고 해도 탑 바깥으로 추방당하는 게 끝인데?”
『호호,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있는 법이란다, 필멸자야.』
자애로운 얼굴로 섬뜩한 이야기를 내뱉는 다프네.
그래.
10일 동안 양분만 쪽쪽 빨리는 건 이쪽도 사양하고 싶다.
“아포피스가 당신을 많이 귀찮게 하는 것 같은데.”
『그 빌어먹을 뱀 새끼는 왜?』
“당신이 원한다면 아포피스의 영역에서 깽판을 쳐 주지.”
또르륵- 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제5 군단장 아포피스.
어둠을 주관하는 신이었지만 태양신 라에게 퇴치당해서 모든 격을 잃어버린 고신족.
회귀 전의 기억에 따르면 아포피스와 다프네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포피스는 유부의 열쇠를 얻은 플레이어들에게 미션을 주었을 거다.
절망의 평원을 뒤흔드는 것.
그리 보면 다프네가 뱀을 운운하면서 분노하는 게 모두 이해가 갔다.
고신족에게 미션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지만.
탑에 들락날락하는 종족이 인류만 있는 건 아니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내가 직접 책임을 물어도 되는데. 왜 귀찮게 그래야 하지?』
좋았어.
반은 넘어왔다.
여기서 ‘대화’의 여지를 남겨 두는 것 자체가 마음이 흔들린다는 방증.
“아포피스가 플레이어들을 움직이는 데엔 다 이유가 있잖아.”
짐짓 고신족들의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호호호, 필멸자야. 네가 내 검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니?』
“이쪽에서 실례를 저질렀으니.”
『좋아. 다른 필멸자들에 비해 약해 보이긴 하지만 손해 볼 건 없겠어.』
[바벨탑 - ???]
▶서브 미션 - 군단장의 신경전
제3 군단장 ???는 태양의 향이 난다는 이유로 자기를 미워하는 제5 군단장 ???의 시비 때문에 화가 나 있습니다.
3군단장의 대리자가 되어 5군단장의 영역을 혼란하게 하십시오.
▶목표: 태양을 먹는 뱀 100마리 사냥.
[제한 시간 - 72:00:00]
잎사귀 하나가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그건 내 대리인이라는 증거.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와 보렴.』
다프네는 농염한 미소를 입에 띠었다.
“제5군단의 영역은 어디지?”
케나즈 드베르그한테 받은 지도에는 아포피스의 영역이 나와 있지 않았다.
3계층 이상이라는 것.
『흥. 그 잎사귀가 길을 안내해 줄 거야.』
“실망하진 않을 거다.”
나는 입꼬리를 일그러트리면서 진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프네는 절망의 평원 안쪽으로 돌아갔다.
털썩, 묵직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코니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안 도망가고 뭐 했냐?”
“낙성좌를 두고 어떻게 도망칩니까.”
“갑자기 웬 존댓말.”
“나리께서 절 구하려고 위험도 무릅썼는데. 당연한 거죠.”
“웃긴 녀석일세.”
멋대로 오해를 하고 있군.
굳이 정정해 줄 필요도 없겠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프네 저 아이도 낙성좌가 되었구나.
“뭐, 저 경우는 스스로 별빛을 포기했다고 봐야지.”
아폴론을 피해 나무가 된 다프네.
그녀의 이야기는 현시대에도 전해지는 중이다.
다프네가 영락한 건 아폴론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 터.
“휴. 뒈지는 줄 알았네.”
숨을 몰아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
[용맹의 증표]와 [냉혈]을 중복으로 사용했는데도 다프네의 영압을 모두 떨쳐 내지 못했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말았구나.
“아냐. 오히려 좋아.”
-이 또한 그대의 계획이었단 말이더냐?
“다는 아니다만.”
-계약자의 혜안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는 건지 참으로 두렵구나!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다프네한테서 미션을 얻어 낸 건 여러 우연과 회귀 전의 정보가 겹쳐져서 얻어 낸 성과였다.
3군단장과 5군단장의 불화.
아포피스는 다프네에게 남은 아폴론의 향을 증오했다.
그 정보와 다프네의 발언에서 몇 가지 힌트를 얻었는데 용케 먹혀들었어.
“나리. 그러면 바로 3층으로 갈 겁니까?”
“천천히 가자고. 시간은 있으니.”
“너무 태연한 거 아닙니까? 상대는 3군단장인데요.”
“안내나 해.”
“알겠습니다.”
두 번째 행선지는 ‘위대한 자들의 묘지’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쓸었던 군단장, 데스 로드 제논의 영역.
[현재 당신의 위치는 ??? ??의 ??입니다.]
[환각 Lv 70]
[죽은 자의 원한 Lv 120]
오한이 몸을 잠식한다.
26층에서 경험했던 니플헤임하곤 다른 냉기.
망자의 원한이 빚어낸 영적 한기가 내 혼을 잠식하면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이다.
이러니까 고신족 새끼들이 탑 바깥으로 나가려고 아등바등하는 거 아니겠어?
-불결한 곳이로구나.
닉스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감돌았다.
“에휴, 우리는 여기에 오지도 않는데 어쩌다가.”
“싫으면 네 마을로 돌아가든가.”
“그건 아니지, 나리.”
“또 말을 놓네?”
“에이, 성격에 안 맞는 존대 쓰려니까 이상하더라고.”
제멋대로구먼.
핑 레이와 달리 밉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두고 있지만.
반말이나 존댓말 중 하나로 통일을 해 주지.
끼아아-!
귀곡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이매망량의 구덩이]를 떠올리게 하는 스산한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에 깃든 영기는 잡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네.”
“조심해, 나리. 여기서 죽으면 영혼도 못 빠져나가니까.”
난 플레이어라 괜찮은데.
쓴웃음을 짓고는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덤’이라는 말대로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는 관들.
유령의 비명 소리를 시작점으로 관 뚜껑들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앙상한 뼈.
앙상한 해골들은 죽음의 기운으로 갑주를 형성, 곧바로 무장을 갖추었다.
[데스 나이트]
눈가에 아른거리는 푸른 귀화 너머로 내 모습이 비쳐진다.
“이 녀석들은 아니었는데.”
-노리는 것이 따로 있었더냐?
“응. 조금 깊이 들어가야 하나 봐.”
-하나 전투를 피하기는 틀린 것 같구나.
“귀찮은 적한테 물렸어.”
데스 나이트는 ‘귀찮다’라고 말할 정도의 적이 아니다.
검기와 동일한 개념인 암흑 투기를 다루는 기사.
암흑 마법과 사령술까지 다루며 부상을 입어도 마력으로 금세 회복해 버린다.
근거리 딜러 겸 마법사 겸 힐러를 겸하는 괴물!
초전부터 그런 강적을 다섯이나 마주쳤다.
「죽은 자의 율법.」
「산 자는 이곳에 올 수 없나니.」
「그대도 죽거나. 아니면 떠나거라.」
꼴에 기사랍시고 무턱대고 공격하지 않는군.
그 덕분에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오른손에 편 아르스 게티아로 주문을 영창.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사용합니다.]
72마신의 힘을 빌린 주문이 데스 나이트 무리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저주받은 땅에 있던 관들이 충격파에 휩쓸려서 가루로 화했다.
-해치…….
“여신님?”
-흠, 알겠도다.
닉스의 입을 막은 보람도 없이, 데스 나이트 다섯이 안광을 불태우며 달려들었다.
“진짜 난이도 더럽네.”
플래티넘급 미션이나 게이트에서도 ‘네임드’급으로 등장하는 몬스터.
데스 나이트를 다섯이나 만나다니.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다.
이 땅에서 얻으려고 했던 정수는 따로 있지만, 데스 나이트의 정수도 괜찮겠지.
회귀 전에는 얻지 못했던 언데드의 정수.
[프레데터]로 전직하면서 놈들의 정수까지도 먹어 치워야겠다.
“여도 가세해야겠구나.”
“조심해. 저놈들의 암흑 투기는 내 검기만큼 날카로워.”
[바르바토스의 철퇴]로 큰 피해를 입혔다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마력으로 파손 부위를 복구했다.
엔트하고는 다른 의미로 소모전을 벌어야 한다는 것.
[마룡의 분노]를 섞은 응룡황권이나 암영추혼검 외에는 데스 나이트의 투기를 뚫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의 육체를 사용합니다.]
[암영추혼검을 사용합니다.]
나는 과감하게 승부수를 꺼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극야의 힘을 여러 개의 검으로 구현.
검 하나마다 내공을 불어넣어서 데스 나이트 무리에게 휘둘렀다.
채채챙!
암흑 투기와 검기가 허공에서 부딪친다.
빠르게 소모되는 내공.
진(眞)여의주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아직은 버틸 만해.
한데 놈들과 검을 부딪치는 순간, 시스템의 알림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버림받은 엔트의 정수가 어둠 지배에 공명합니다.]
잠깐만 .
나는 뒤이어 나온 메시지에 데스 나이트와 사투를 벌이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