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캉! 캉!
규칙적으로 들리는 금속음.
주황색 피부의 난쟁이는 연신 곡괭이를 휘둘렀다.
-마치 드워프라는 종과 흡사하게 생겼구나.
“드워프 친척쯤 되니까.”
-호오.
닉스가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드워프와 케나즈 드베르그.
둘 다 이미르의 사체를 파먹던 구더기가 지성을 얻어서 탄생한 생물체.
차이점이 있다면 저기서 곡괭이를 쥔 난쟁이는 속살을 파먹다가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점?
그 작은 차이는 두 종족의 향방을 갈라 버렸다.
드워프가 탑과 계약을 맺고 장인 종족으로 명성을 떨쳤다면.
케나즈 드베르그는 이미르의 등뼈에 맺힌 각질을 캐면서 무미건조한 삶을 영유했다.
-저치들도 손재주는 좋단 말이로구나.
“뭐, 그렇다고 하더라.”
연신 곡갱이를 휘두르는 난쟁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작업에 열중인지 일부러 발소리를 냈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군.
“이봐, 난쟁이.”
케나즈 드베르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땡그랑-.
“타, 탑 바깥의 존재다!!”
곡괭이를 떨어트리고는 소리를 크게 질렀다.
이렇게까지 놀랄 거였으면 다가올 때 알아채라고.
“거래를 하자, 난쟁이.”
“내 이름은 코니다. 난쟁이라고 부르지 마라, 외부의 존재!”
잠깐만.
듣던 것과는 좀 다른 걸?
케나즈 드베르그는 대부분 음침한 성격이라고 했다.
드워프하고는 달리, 척박한 탑 지하에서 살다 보니 종족의 성격도 달라진 것.
그런데 이 녀석은 쓸데없이 쾌활하잖아.
“좋아, 코니. 내 이름은 유진호다.”
“이상한 이름을 쓰는군. 형씨는 무슨 거래를 하자는 거지?”
“그 각질 한 덩이. 그리고 너희 마을로 안내해 줘.”
닉스가 어깨 너머로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각질을 쓸 곳이 따로 있더냐?
“탑 지하를 다니려면 이걸 먹어야 해.”
이미르의 등뼈에 손을 뻗자, 처음 탑 지하에 돌입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훅 들어갔다.
탑 지하의 기둥인 이미르의 등뼈를 만지지 못하면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잊힌 자의 땅에서는 그들의 규칙을 따르라. 과연, 이해하였도다.
“그러고 보니 명계도 비슷한 규칙이 있었지?”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가 명계의 음식을 먹은 후로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신화.
내 상황은 정반대이긴 하다만.
[유부의 열쇠]의 지속 시간하고는 별개로 이미르의 각질을 먹어야 제대로 활동할 수 있다.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난쟁이.
“거래 대가로 뭘 줄 수 있지?”
“탑 바깥의 음식.”
욕망의 주머니에서 닉스가 먹다 만 케이크를 꺼냈다.
-그건 여의 것이 아니더냐!
“이번만 참아 줘.”
-통재로다. 여의 공물을 더럽히다니, 천벌을 받을지어다!
울먹거리는 닉스.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면서 난쟁이한테 반 정도 남은 케이크를 내밀었다.
“이거면 어때?”
“형씨, 난 탑 바깥의 음식 따위는 관심 없다.”
말과 달리 난쟁이는 콧구멍을 크게 벌리고는 킁킁거렸다.
케이크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향.
놈의 코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거래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난쟁이를 찾아볼 수밖에.”
“잠깐, 성미가 급하군.”
난쟁이는 케이크를 낚아채더니 한입에 베어 물었다.
-아, 아아아!
닉스의 절규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누가 들으면 하늘이라도 무너진 줄 알겠어.
케이크를 씹던 난쟁이는.
“으, 으오오오오!!!!”
돌연 눈을 번쩍 뜨더니 감탄사와 함께 나머지 케이크를 입으로 마저 넣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미처 씹지 못한 케이크 조각이 튄 것은 덤.
-이 일은 잊지 않겠노라, 절대로!
비탄 섞인 닉스의 음성이 난쟁이의 환호성에 얽혀서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훌륭해. 아니, 그 단어만 가지고는 모자라!”
역시, 회귀 전의 정보대로군.
탑 지하는 삭막한 곳이다.
고신족들이 괜히 다른 차원들을 원하겠어?
저 난쟁이들도 마찬가지.
이미르의 등뼈에서 자라나는 각질만 먹고 살던 녀석들이니, 처음 맛보는 단맛에 문화충격을 느꼈을 거다.
“맛만 보라니까, 다 먹어 버리면 어떻게 하냐?”
“흐음, 흠. 너무나도 황홀한 맛에 그만. 미안하군.”
-후안무치하구나! 여에게 바쳐진 공물을 다 먹어 놓고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닉스의 추임새에 당황한 난쟁이.
“알았어. 아까 말한 거 들어주면 되잖아.”
놈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막 등뼈에서 캔 각질을 내밀었다.
[옛 신의 각질을 먹었습니다.]
[이미르의 통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웩.”
더럽게 맛없네.
이런 걸 먹고 사니까 케이크에 환장할 만하지.
가볍게 혀를 내두르고는 이미르의 등뼈에 손을 얹었다.
딱딱한 촉감.
회귀 전의 정보대로 탑 지하의 기둥 역할을 하는 등뼈가 만져졌다.
“덕분에 문제 하나는 해결했다.”
“형씨, 근데 우리 마을은 왜 가려고 하나?”
“안내인이나 지도를 구하려고.”
탑 지하는 주기적으로 구조가 바뀐다.
안정되지 않은 세계.
타르타로스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탑 지하의 주민들이 일군 것을 파괴한다.
“히히히, 그럼 잘됐군.”
“뭐가?”
“탑 지하 안내, 내가 해 주지.”
난쟁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짓고는.
“거절하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 * *
케나즈 드베르그의 마을로 향하는 길.
“이봐, 형씨! 내가 안내를 해 주겠다는데 왜 그러냐고!”
“난 입만 산 녀석을 믿지 않아.”
“외부인들은 다 형씨처럼 의심이 많은 건가?”
“믿고 안 믿고는 내 자유다.”
회귀자라는 장점을 살릴 수 없는 무대.
탑 지하에서 ‘얻어야 할 것’이 뭔지는 알지만.
막상 그 위치는 모른다.
제한된 시간에 한정적인 정보.
손에 쥔 카드가 별로 없으니, 이번에는 신중해야지.
우선 지도부터 얻어야 한다.
저 난쟁이를 안내역 삼는 건 둘째 문제.
엉뚱한 곳으로 길 안내를 하면 곤란하니, 이정표가 필요했다.
-그대답지 않게 신중하구나.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탑 바깥으로 튕겨나니까.”
나는 대충 둘러댔다.
케나즈 드베르그의 마을은 이미르의 등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주민 숫자는 50명 정도.
빛이라고는 마을 중심부에 있는 화톳불이 전부다.
“외부인.”
“신기하게 생겼다.”
난쟁이들은 살짝 흥미를 보이는 듯하더니 금세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회귀 전의 정보가 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군.
-다른 이들은 그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구나.
“히히히, 나 빼고는 다들 따분하게 산다고.”
난쟁이, 코니 녀석이 히죽거렸다.
그건 자랑이 아닌 것 같다만.
“동족의 과묵함을 배우는 건 어떠냐?”
“히, 저러면 심심하잖아.”
촌장에게서 닉스의 간식으로 챙겨온 쿠키와 탑 지하 지도를 교환했다.
당연히 닉스는 분개한 눈빛을 띠었지만.
어쩔 수 없잖아.
사실은 케나즈 드베르그와 거래를 하려고 넉넉하게 간식을 챙겨 왔으니까.
“돌아가면 케이크 더 사 줄게.”
-그런 것으로 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음, 그럼 솜사탕 5개 더 얹어서.”
-밤의 여신의 분노는 어둡고도 깊으니라!
“알았어. 그럼 10개.”
-케이크는 싱싱한 딸기가 포함된 것으로.
“물론입죠, 여신님.”
극적(?)으로 타결된 협상.
닉스를 진정시킨 후에야 지도를 훑어볼 수 있었다.
총 5계층으로 이루어진 지하 세계.
코니의 부족이 지도에 그려 놓은 것은 바닥, 그러니까 1계층과 2계층뿐이다.
“이봐, 난쟁이.”
“코니라고 했잖아!”
“3계층 이상은 모르는 건가?”
“우리 부족이 거기까지 갈 이유는 없으니까.”
흠-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아쉽게 되었군.
내가 구하려는 게 1, 2계층에 있기를 바라야 하나.
[바벨탑]이 나타나면서 통합된 언어체계.
케나즈 드베르그의 글자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절망의 평원 - 1계층 남서부
*위대한 자들의 묘지 - 1계층 서부
*망각의 우리 - 2계층 남동부
*가시 삼림 - 2계층 북부
운이 좋군.
난 웃음을 삼켰다.
회귀 전, 탑 지하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들이 모두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바쁘게 움직여야겠어.”
“형씨, 지도만 보고 괜찮겠어?”
“방향감각은 탁월하거든.”
동굴인의 정수 덕에 강화된 인지능력.
[초음파]를 사용하면 청각에서 시각으로 필터링되면서 정보를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다.
탑 지하의 어둠 따위는 장애물도 아니야.
“히히히, 그러지 말고. 길 안내 한번 맡겨 보지 그래?”
“더 줄 음식은 없다만.”
원래는 케나즈 드베르그 중 한 명을 길잡이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안내인을 구한답시고 과자를 더 썼다간, 닉스한테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른다.
지금도 내 어깨 위에서 노려보고 있는 걸 봐라.
“보수 같은 건 됐어.”
“난 대가 없는 친절을 믿지 않아.”
“형씨를 따라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거든.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나는 코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 안에 섞여 있는 알 수 없는 감정.
뭐,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만 상관없다.
“위험하면 버리고 간다.”
“히히, 알겠다고.”
녀석이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있든, 방해가 되면 그때 해치우면 그만이니까.
-흐응, 일행이 늘었구나.
“저 위에 있는 건 외지인의 소환수냐?”
-감히 여를 소환수 따위와 비교하다니, 버릇이 없구나!
언쟁을 벌이는 난쟁이와 여신.
“코니라고 했지?”
“그렇다, 외지인!”
“첫 번째로 갈 곳은 절망의 평원이다.”
“히히, 이제부터 내 뒤만 딱 붙어서 와라.”
코니는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앞서갔다.
이미르의 등뼈에서 조금 떨어지자, 어둠이 한층 더 진해졌다.
물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바람.
발걸음을 떼면 흙먼지가 무릎까지 튀어 올랐다.
-여의 기억 속의 타르타로스와 비슷한 풍광이로구나.
“이렇게 삭막한 곳을 거처로 삼았단 말이야?”
-고요하고 어둡지. 밤의 여신에게 어울리는 곳이지 않느냐.
“예예.”
닉스와 잡담을 나누면서 걷던 중.
“쉿. 멈춰.”
앞서가던 코니가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지?”
“이 근처는 공작 감시관들의 순찰 구간이야.”
“놈들의 순찰 구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저 새대가리들은 힘겹게 채굴한 각질을 뺏어 간단 말이야.”
코니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눈을 감고 오감을 확장시키자, 요란한 날갯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500미터 앞에 있네.”
이 녀석.
길잡이로는 쓸 만하잖아?
“뭐야. 무슨 수로 공작 감시관의 위치를…….”
“기다리고 있어라.”
[어둠의 육체를 사용합니다.]
[밤의 장막 - 내장 스킬: 밤의 걸음을 사용합니다.]
어둠에 몸을 일체화시키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는 공작 감시관.
암영추혼검으로 놈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공작 감시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외, 외부인. 감시관의 시선을 무슨 수로 피한 거야?!”
“감시관들 순찰 코스나 말해 줘.”
“제정신이야, 외부인? 그러다가는 공작 감시관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고!”
“넌 무서운가?”
“아니. 너무 신나잖아!”
코니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얼마 후.
근방에 있는 공작 감시관들을 모조리 쓰러트린 뒤에야 놈들의 정수를 100% 포식할 수 있었다.
[공작 감시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고대]
[스킬 - 추적하는 눈 스킬이 추가됩니다.]
[추적하는 눈]
등급: ★★★
분류: 액티브
대상을 지정합니다. 사용자의 다음 마법 공격은 ‘추적하는 눈’의 대상에게로 향합니다.
*지속 시간: 30초
유도 기능을 부여하는 스킬.
회귀 전에는 얻지 못했던 강력한 보조 마법이다.
“역시 내려오기를 잘했어.”
탑 지하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어 갈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