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아니, 어떻게. 뇌둔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했다고?!」
“하니까 되던데?”
난 장난스럽게 손을 까딱였다.
파지지직!
손가락 끝에서 번쩍이는 뇌전.
뇌신(雷身)이 적용된 상태다.
「허허.」
손오공은 한동안 아무 글자도 띄우지 않았다.
꽤 놀란 모양이군.
그나저나 번개의 힘으로 반사 신경을 강화시키는 선법이라.
민첩이 15% 증가되었고, 몸의 반응 속도도 빨라졌다.
더 중요한 건 [밤의 여신의 축복]이나 [피오르의 가호]와 중복된다는 거지.
발동 원리가 달라서 버프가 온전하게 적용되었다.
보조용 선법만 몇 개 익혀 둬도 전력이 대폭 상승하겠어.
「역시 재미있어.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귀찮지만, 너라면 괜찮을 것 같군.」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필멸자여!」
호쾌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대화의 공백이 너무 길지 않았나.
굳이 그 부분은 따지지 않았다.
손오공이 내기에서 이기면 제 입으로 ‘성심성의껏’ 알려 주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는데.
작은 실수 정도야 넘어가야지.
“어떤 선법을 알려 줄 거지?”
「책자에 스며든 선기를 분석해 보니 뇌(雷)와 화(火). 두 속성이 잘 어울리더군.」
“그렇다면 뇌둔을 하나 더 배울게.”
「1주에 전수 가능한 선법은 둘 뿐이니 신중하게 골라라.」
“생각이 있어서 고른 거다.”
「뭐,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존중해야지. 이번에 알려 줄 선법은 뇌망(雷網)이다.」
타락한 이무기가 사용했던 술법.
넓은 범위에 상당한 위력.
거기다가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강력한 기술이었지.
“여를 노렸던 그물 말이구나.”
닉스도 이무기 레이드 때가 떠올랐는지 혀를 찼다.
「처음 배운 뇌신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난이도의 선법이니 긴장해라.」
얼마 후.
파지지지직!
“되는데요?”
「이런 시부럴.」
책자 위로 궁서체로 적힌 육두문자가 떠올랐다.
* * *
선법은 꽤 유용했다.
내공에서 선기로 전환 시 10:7이라는 교환비가 아쉽긴 하지만.
그 이상의 값어치를 확실하게 했다.
“호오, 여가 볼 때에는 마법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만.”
“재배열과 달리 상대의 기감을 속이기가 좋아.”
마법은 발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력 파동 때문에 은밀하게 사용할 수 없다.
침투 같은 임무에서 마법 계열 플레이어가 힘든 이유.
반면에 선법은 펼치기 직전까진 외부로 파장을 흩뿌리지 않는다.
적을 방심하게 만들고 의표를 찌르기 좋단 말이지.
“버프 스킬은 겹치지도 않고.”
“그대가 익힌 스킬 중에 효과가 감소되는 것도 없지 않느냐?”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중에는 다를걸.”
단점도 있다.
첫 번째로는 앞에서 언급한 치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해.
3할이 사라지는 건 그렇다 쳐도, 선법은 하나같이 소모량이 꽤 컸다.
기초 선법이라는 뇌신도 백수제왕무 1초식에 해당하는 내공을 소모했다.
뇌망은 몇 배에 해당하는 선기를 들이부어야 구현이 가능했고.
[혼원룡의 심장]과 [진여의주]의 효능으로 마나=암흑 마나=내공끼리 치환할 수 있지만.
성질이 다른 에너지를 바꾸려면 세심한 콘트롤이 필요했다.
그냥 진여의주에 기운을 들이붓는다고 해서 마나가 내공으로, 또 내공이 선기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실전에서 활용할 가치는 있어.”
선법에 통달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이 정도 속도면 10년 안에 회귀 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신족 하나둘 정도는 정면 승부 해도 이길 수 있는 경지.
과거에는 30년 이상이 걸렸지만.
이젠 다르다.
아니지.
한둘 가지고 되겠어?
수십을 쓰러트릴 수 있는 힘을 얻을 때까지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나는 수련을 마치고 로비로 올라왔다.
선법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마력 소모가 꽤 컸다.
[혼원룡의 심장] 덕분에 소모된 에너지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정신적인 피로까지 사라지진 않거든.
아직 선기를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기도 했고.
“스승님, 빅 뉴스예요!”
“뭔데?”
지영이가 내 앞에 쪼르르 달려왔다.
“네가 웬일로 뉴스를 보냐.”
“SNS에서 소식 떠서 틀었어요. 그것보다, 저거 보세요!”
TV를 가리키는 지영이.
마침 한 뉴스가 화면 위에 아른거렸다.
[화랑, 불사조, 그리고 미르가 손을 맞잡았습니다.]
[국내 10대 길드 중 셋이 힘을 합쳤는데요. 그들은 유진호 플레이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김영진 기자가 알아보…….]
“녀석들. 이제야 움직이는군.”
“스승님은 이 상황이 벌어질 걸 알고 계셨어요?”
“화랑, 그리고 불사조는. 미르까지 낄 줄은 몰랐다만.”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드장만 랭커인 미르 길드.
이번에 랭커 둘이 역천으로 들어왔으니, 국내 10대 길드에서 밀려날까 두려웠겠지.
화랑 길드는 그 심리를 이용.
미르까지도 이번 판에 끼어들게 만들었을 거다.
“안 봐도 DVD야.”
“스승님도 참. 이젠 VOD 시대거든요?”
“…….”
“이래서 세대 차이란, 에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야, 너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세대 차이를 운운하냐?
“사부님, 말씀만 하시면 제가 밟아 버리겠습니다.”
“사, 사부우우? 스승님, 얘는 언제 스승님을 바꿨어요?!”
핑 레이가 대화에 끼어드니 지영이의 얼굴에서 불편함이 가득했다.
“사범과 사부님은 다르다. 둘은 확실히 구분해라.”
“흥. 그럼 내가 스승님 1번 제자니까 넌 내 후배가 되는 거네.”
입을 쩍 벌린 핑 레이.
손오공이랑 계약할 때도 저러더니. 저러다가 진짜로 턱 나가는 거 아닌가 몰라.
“그, 그건…….”
“중국에서는 사고라고 하던가? 자, 이제부턴 존댓말 깍듯이 해.”
“아니. 난 사부님을 따라 이 길드에 온 거지, 당신하고는 관계없지 않나!”
“내 스승님을 사부라고 부르려면 관계가 생기지.”
핑 레이야.
네가 말싸움으로는 절대로 못 이길 것 같으니까 조용히 있으렴.
“두 사람의 호칭 문제는 나중에 정리하고. 길드원들 좀 여기로 모아봐.”
잠시 후. 길드 하우스에 머무는 단원들이 모두 로비로 모였다.
난 방금 전 뉴스에서 나온 이야기를 공유했다.
웅성웅성-.
영수 형님과 지영이는 부담스러움을 드러냈고.
핑 레이와 엔리케의 경우에는 호승심을 숨기지 않았다.
객원인 카를라는 평소대로였고.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영수 형님.”
“길드장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붙어야죠.”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예상대로군요.”
“형님은 자신 없으십니까?”
“저 개인이라면 모르겠지만 길드장님께서 자신이 있으시면 이야기가 다르겠죠.”
김영수의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굳은 신뢰의 눈빛.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표정이다.
이 형님 저러다가 사기당하기 딱 좋은데, 나중에 월급 내역 한번 물어봐야겠어.
부우웅-!
발신자는 한수창 팀장이다.
적절한 타이밍이군.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뉴스 봤습니다.”
-세 길드가 연합할 줄이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협회의 불찰입니다.
“불찰까지야. 어차피 협회는 길드끼리의 이권 다툼에는 관여하지 않잖아요?”
-다른 분도 아니고 진호 님께서 창설하신 길드인걸요.
“어쨌든 협회에 정식으로 넘어온 거 있습니까?”
-예. 막 공문이 왔습니다. 35층에서 역천 길드와 공략 레이스를 벌이고 싶다고 하더군요.
“다들 들었지?”
휴대전화를 들어서 길드원들에게 보여 주었다.
-지, 진호 님?
“마침 이번 문제로 길드원들이랑 의논 중이었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 의견 조율은 금방 끝날 겁니다.”
휴대전화를 엎어 두고는 길드원들을 쭉 훑었다.
“나 혼자 할까, 아니면 같이할래?”
세 길드에서 키워 낸 유망주라고 해 봐야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젠 ‘유진호’라는 개인의 명성보다 ‘역천’의 이름값을 드높일 때.
“사부님, 20일만 기다려 주십쇼.”
“절대 스승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 없을 거예요.”
“저 사람들, 상대해 보고 싶어.”
“투자한 만큼 반드시 보답할게!”
“전 길드장님만 믿습니다.”
이미 랭커인 신준석과 홍윤수를 제외하면 모두 브론즈 등급.
세 길드에서 도전장을 내민 30층대에 아직 진입하지 못한 이들이다.
다음 승급전까지 보름 정도 남았으니.
핑 레이의 말대로 20일 정도면 충분하겠어.
“들으셨죠?”
-예. 20일 뒤로 날짜를 조정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길드원들.
“후후훗, 모두 그대와 같은 눈이로구나.”
“누구 잡아먹을 눈빛이고만.”
“거울을 한번 보아라. 여의 발언이 이해가 갈 것이다.”
“정중하게 사양하지.”
20일이라.
당분간 탑을 오르긴 틀렸군.
길드원들도 모자란 레벨을 올리려면 훈련보다 게이트 공략 위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타이밍이 적절하겠어.”
“스승님,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10일 정도 자리를 비우려고.”
“예?”
길드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다음 날.
영수 형님한테 한수창 팀장의 연락처를 알려 주고는 탑에 접속했다.
-33층이면 이미 클리어한 곳 아니더냐?
영체로 변한 닉스가 내 어깨에 달라붙었다.
33층 미션은 암벽등반.
정확히는 등반이라기보다 하산이다.
수백 미터 아래의 바닥에 도달하는 미션.
“아, 갈 곳이 있어서.”
묘한 웃음을 짓고는 암벽을 능숙하게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때때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바람길]로 가볍게 흘려보냈다.
산책 나온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다 보니 금세 절벽 아래에 도달했다.
클리어 보상은 3천 cp.
최초 공략 보상은 이미 챙겼기에, 최고 기록을 갱신해도 추가 cp 보상이 전부였다.
진짜는 이제부터지.
허리에 달아 놓은 욕망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는 기다란 금속 열쇠.
‘이매망량의 구덩이’에서 얻은 아이템, [유부의 열쇠]다.
-그대여, 그 열쇠는 탑 지하로 가는 문을 여는 데 사용한다 하지 않았더냐?
“맞아. 그 문이 여기거든.”
탑 곳곳에 숨겨진 문.
숨겨진 문의 공통점은 천장단애의 절벽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필멸자들이 생각하는 지옥의 위치는 땅 아래.
하늘에서 멀고 빛이 닿지 않는 장소야말로 별빛을 잃고 영락해 버린 고신족의 거처와 어울린다는 말이겠지.
-전에는 골드 등급 이전에는 도전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랬었지.”
-괜찮겠느냐?
“다른 능력을 많이 얻었으니까. 해볼 만해.”
선법과 공허의 거울, 그리고 융합기공.
회귀 전에 얻지 못했던 강력한 스킬들이다.
본래의 내 능력만으로는 원하는 걸 얻기 힘들겠지만…….
여러 기연이 겹쳐지면서 탑 지하에서 생존 가능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켰다.
그리고.
“나한테는 여신님도 있잖아.”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전력이자 동료.
내 친구인 닉스가 있다.
-후후훗, 결국 그대가 의지할 것은 여뿐이로구나.
“예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대를 해하려는 자는 여의 적이기도 할지니. 여에게 맡기어라.
닉스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팡팡 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작한다.”
보라색 열쇠를 바닥에 쭉 뻗는 순간.
작은 구멍이 나타나면서 열쇠를 절반 이상 삼켰다.
철커덩-!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나는 열쇠를 쥔 오른손에 힘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