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핑 레이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선법요?”
“그래.”
“제천대성께서는 무공에 능하신 것이…….”
“멍청하긴.”
나는 혀를 찼다.
“손오공의 성유물이 뭐냐.”
“여의봉이랑 근두운 아닙니까?”
“하나만 맞았어.”
내 이럴 줄 알았지.
근두운(觔斗雲).
여러 영상 매체나 만화의 영향 때문에 ‘성유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건 최상급 선법이다.
구름을 타서 축지보다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예.
핑 레이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근두운이 선법이라고요?”
“오냐. 손오공은 단순히 무력만 강한 성좌가 아니다.”
손오공은 분신과 근두운 외에도 여러 선법을 통달한 실력자다.
선법을 전투에 활용하는 실력은 선계 전체를 통틀어도 손오공을 넘어서는 성좌가 없을걸?
『킁. 이 녀석도 헛다리를 짚는군. 계약하는 게 맞나 모르겠어.』
“아닙니다. 제천대성이시여! 제 무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머리를 쿵쿵 박는 핑 레이.
저러다 피 나겠다.
『그래도 쓸 만한 녀석이니. 가호를 내려 주마.』
뭉게구름이 손처럼 변해서 핑 레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배후성 계약.
플레이어에게 가호를 내려 줌으로써 후원자가 되는 계약이다.
핑 레이는 고개를 조아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이로써 계약은 완료되었다.』
“제천대성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보다 재미있는 일을 벌여봐.』
“예?”
『어디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럼 재미가 있어야지.』
역시 손오공답군.
저 녀석의 관심사는 오로지 재미다.
따분하다고 선계를 뒤집어 놓아서 옥황상제의 저혈압까지 치료(?)해 준 놈이니.
“길드장님, 아니 대형!”
“넌 또 무슨 얼어 죽을 대형이야?”
“이제부터는 대형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날 우러러보는 건 좋은데요.
대형이라는 발음이 우리나라에서는 욕으로 들리거든?
바벨탑이 생긴 이후로 각 민족의 고유 언어가 해석이 되어 들리긴 해도 일부 발음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예를 들면 욕 같은 거.
“그거 말고 다른 거 없냐.”
“절 이끌어 주시니 사부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스승에 이어 사부라.
그래.
짜, 아니 그것보단 사부가 낫다.
“우리도 계약해야지?”
『더 재미있어 보이는 건 이 녀석이지만 어쩔 수 없지.』
손오공은 한탄하더니 다시 한번 손으로 변했다.
[화과산의 미후왕이 당신과 천리안 계약을 맺고자 합니다.]
[천리안 계약 시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화과산의 미후왕과 시야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이 원할 경우, 당신의 허가 없이도 시야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지속 시간은 3시간입니다.]
[허가를 구하지 않고 시야를 공유할 경우,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화과산의 미후왕은 계약 대가로 당신에게 ‘원숭이도 배울 수 있는 선법의 기초’ 아이템을 선물합니다.]
[계약을 진행하시겠습니까?]
독소 조항은 없군.
내 프라이버시 보장도 되고.
손오공이 강제로 시야를 공유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땐 페널티가 부과된다.
다음에 강제로 시야 공유를 하기까지 딜레이.
계약 위반에 대한 수수료까지.
이 정도면 성좌와의 계약치곤 과분했다.
『어때, 마음에 드나?』
“훌륭하군.”
『참, 선법 책을 잘 보는 게 좋을 거야.』
손오공의 히죽거리는 면상이 점점 희미해진다.
[걀라르호른의 지속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해당 성좌와 대화를 종료합니다.]
산산조각 난 뿔피리.
레전드 등급 아이템이 부서졌지만 아쉽진 않았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으니까.
[원숭이도 배울 수 있는 선법의 기초]
등급: 레전드
분류: 책
제한: 손오공이 인정한 자.
내구도: 100/100
손오공이 자신의 힘을 부여해서 저술한 선법 저서입니다.
기초 선법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좌가 자신의 영성과 존재력을 소모하면서까지 만든 비급.
일반적인 선법 책자가 아닌 건 확실했다.
손오공 녀석, 무슨 꿍꿍이인지.
“핑 레이야. 손오공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냐?”
“예, 사부님. 빨리 탑으로 와서 자신의 힘을 전수받으라고 합니다.”
“그래. 선법에 대해서는 놈한테 배우는 게 빠를 거다.”
“존명.”
핑 레이는 포권을 했다.
손오공과 계약을 마친 후, 곧장 훈련장으로 내려왔다.
“그대의 진정한 목적은 그 비급이었구나.”
눈웃음을 치는 닉스.
“내가 남 좋은 일만 하겠나.”
아무렴.
손오공을 불러내는 데 무려 레전드 등급 아이템을 사용했다.
고작 핑 레이한테 다리 놔주겠다고 걀라르호른을 쓸 이유가 없잖아?
“후후훗, 뱀같이 지혜롭도다.”
“그건 욕 같은데.”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책자에 손을 얹었다.
타락한 이무기의 정수를 포식함으로써 완벽한 모습이 된 진(眞)여의주.
선법은 진여의주의 성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원숭이도 익힐 수 있는 선법의 기초] 책자를 펼쳤다.
하얀색으로 가득한 책자.
뒷장을 펼쳐 봐도 글자 하나 적혀져 있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꽤 당황했겠지?」
하얀 종이 위로 떠오르는 검은 글자.
“손오공인가.”
「크크, 조금은 당황할 줄 알았는데 재미없군.」
책자의 글자가 내 말에 대꾸했다.
자기 힘을 불어넣었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나.
천리안의 계약은 시야를 공유하는 것뿐, 대화를 나누진 못한다.
성좌의 후원 메시지는 전할 수 있지만, 감정을 표하는 정도가 최선.
손오공은 ‘선법이 기록된 책자’라는 계약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제 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재밌는 짓을 벌여 놨네.”
「나만큼 선법을 잘 아는 성좌는 없으니까.」
자신만만하구먼.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뭐지?”
「아무 조건 없이 알려 주면 재미가 없잖아.」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손오공의 초상화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알려 주는 방법까지는 계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
「선법을 알려 주는 방법은 내 마음이니까.」
“혀가 길군. 본론이나 말하지 그래?”
「크크큭, 이제부터 제시하는 기초 선법을 3일 내로 익히지 못하면 책이 불타 버릴 거다.」
“과연. 나름대로 테스트를 한다는 건가.”
「시시한 녀석한테 내 선법을 알려 줄 수는 없다. 그건 시간 낭비지.」
그 수작질을 벌이려고 존재력과 영성을 소모했다는 건가.
손오공답다.
여태 페이지를 가득 채웠던 글자들이 사라지고, 선법에 대한 묘리를 담아 둔 글귀가 하나둘 나타났다.
마지막에는.
「이 시험을 통과하면 친절하게 선법을 알려 주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글귀를 남기기까지.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걸 보면, 회귀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대를 시험하려 들다니. 건방진 작자로구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난 손오공이 남겨 둔 선법의 기초를 천천히 읽었다.
* * *
「선법(仙法)이란, 자연과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친 이들에게 허락된 도술이다.」
「선법을 다루려면 먼저 선기(仙氣)를 깨쳐야 한다. 이지를 얻은 축생들이 수백 년 동안 수행하는 것은 선기를 깨치기 위함이다.」
「나는 300년 동안 자연과 노니면서 그 이치를 터득하였고, 선기를 다룬 후에는 수보리에게 선법을 배웠다.」
「이쯤 되면 알아챘겠지? 선기를 깨친 자만이 선법을 다룰 수 있다.」
「아, 수보리에게 배운 것은 비밀이라고 했으니 혼자만 알아라.」
그 뒤로는 선기를 깨칠 당시 손오공의 심득(心得)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책을 덮었다.
“안 봐도 괜찮겠느냐?”
“심득이라고 해 봐야 지 잘난 맛에 가득 찬 글이야.”
“후후훗, 그 표정을 보니 이미 대책을 마련해 두었구나.”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닉스의 말에 대꾸하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림 소설에는 ‘우화등선’이라는 표현이 있다.
산속에서 고고하게 도를 닦던 선인이 깨달음을 얻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
도가의 무공은 필멸자의 틀을 벗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화등선을 해야 다룰 수 있는 힘이 선기(仙氣).
이제 막 권기상인의 경지에 도달한 입장에서는 저 힘을 깨칠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런데 어쩌나.
[진(眞)여의주의 힘으로 내공을 선기로 치환합니다.]
[치환 과정에서 내공 일부가 손실됩니다.]
여의주에 스며든 내공이 이질적인 힘으로 변화된다.
회귀 전에는 다뤄 보지 못한 힘.
선기다.
암흑 마나가 폭발적이면서도 끈적거린다면, 선기는 땀을 식혀 주는 가을바람처럼 시원한 느낌이다.
진여의주가 지닌 진정한 힘.
여태까지는 선기를 다룰 일이 없어서 써 보지 않았지만.
훌륭한(?) 스승도 있겠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선기 일부를 손에 집중시키고는 다시 책을 펼쳤다.
「뭐야. 벌써 선기를 깨쳤다고? 말도 안 돼!」
「내가 그 힘을 깨치려고 벼락도 맞아 보고 불구덩이에도 들어가 보고. 어!? 근데 어떻게!!」
“거 군소리 말고 선법이나 알려 주쇼.”
책자를 두드리자, 글자가 이리저리 헝클어지더니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는 써졌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손오공 녀석.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군.
“이미 다룰 줄 알았던 게냐?”
“말했잖아. 쓸모없는 정수는 없다니까.”
“과연. 그 뱀이로구나.”
닉스는 훗, 하고 짧게 웃었다.
잠시 후.
낙서장처럼 글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책자가 안정(?)을 되찾았다.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제시한 조건은 기초 선법을 터득하는 것이니.」
「네가 선기를 다룰 줄 안다면 이제부터 기초 선법을 알려 주겠다.」
「선법의 기초는 오행(五行). 자연을 이루는 다섯 가지 속성을 모두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각 선인이 잘 다루는 분야는 존재한다. 이 몸조차 오행을 모두 잘 다루지는 못하니.」
「하지만 어느 속성이든 최소한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행의 조화가 무너져서 다른 선법조차 다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
「네게 처음으로 알려 줄 선법은 뇌둔이다.」
「이 선법의 이름은 뇌신(雷身). 번개를 몸에 휘감아서 반응 속도를 끌어올려 주는 선법이지.」
「만약 뇌신을 3일 안에 익힌다면 나머지 선법들도 성심성의껏 알려 주마.」
「번개의 힘이 가장 까다롭긴 하지만, 크크크크. 힘내 보라고.」
3일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군.
그 제안이 스스로의 목을 조일 줄도 모르고 말이야.
다음으로 나오는 인체 해부도.
선기를 운용하는 방법이 친절하게 그려져 있다.
“호오, 이 기운은 무공처럼 혈도를 사용해서 발현되는구나.”
“그러게. 덕분에 쉽게 익히겠어.”
혈도를 따라 움직이는 선기.
운용 방법만 놓고 보면 무공과 일맥상통했다.
마법이 신체 바깥에 마나를 재배열해서 세계의 법칙을 뒤튼다면.
선법이라는 개념은 사용자의 육체를 소우주로 삼아 내부에서부터 법칙을 개변, 내 의지로 자연의 힘을 다루는 기예다.
더 쉽게 말하면 마법진을 내부에 새긴다는 거지.
신기한 건 선기와 내공은 같은 통로를 이용하는데도 섞이지 않아서 동시에 운용도 가능했다.
“꽤 어렵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책자에 나온 해부도대로 선기를 운용해 보았지만, 바로 [뇌신(雷身)]을 구현하진 못했다.
손오공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이유가 있었군.
그때.
[번개 속성이 감지됩니다.]
[뇌신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번개의 돌을 포식하면서 얻은 [뇌신의 가호]가 혈도를 돌고 있던 선기에 반응했다.
뇌신(雷身)을 구현하진 못했어도, 선기를 번개로 치환하는 건 성공했다는 거잖아?
제우스의 가호 덕분에 번개를 다루기가 한결 쉬워졌다.
잠시 후.
[선법 - 뇌신을 습득했습니다.]
시스템의 알림에 비로소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