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카오오오오오-!!!!
은회색 금속 장갑을 뒤집어쓴 공룡이 울부짖었다.
[공허의 거울]로 구현한 원시종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
나는 굵어진 두 다리를 움직이면서 전진했다.
“키르륵, 키륵!”
“키륵!”
집채 만한 개미들이 발에 달라붙는다.
거대 개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약 5미터, 신장은 2미터에 달하는 괴물이다.
크기가 원체 크다 보니 거대 개미들이 일제히 달라붙자 몸이 휘청거렸다.
“어, 어어어!”
“진호 플레이어님!!”
등 뒤에 탄 플레이어들이 허둥댔지만.
“호들갑 떨지 마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갈하곤 그 자리에서 발을 세게 굴렀다.
백택군림각.
지면과 맞닿은 발을 타고 막대한 내공이 대지를 뒤흔든다.
원시종의 강력한 힘.
갖가지 버프를 걸어서 근력을 한계까지 끌어낸 후 내공까지 방출하니, 반경 200미터가 초토화되었다.
콰득! 콰드득!
백택군림각의 충격에 휩쓸린 거대 개미들이 터져 나간다.
땅을 물들이는 개미들의 체액.
초록색 피로 범벅이 된 땅을 밟으면서 나아갔다.
[바벨탑 - 34층]
[히아스 산]
[미션 - 여왕이여. 영원하소서.]
히아스 산 아래에 위치한 개미 왕국.
거대 개미가 이곳에서 무리를 지은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기존의 생태계를 파괴하여 다른 생물들의 경계를 사고 있습니다.
이에 숲의 엘프들은 당신을 고용, 여왕개미를 암살하고자 합니다.
▶ 목표 : 여왕개미 사망.
어느새 34층. 미션 목표는 개미 왕국에 침투해서 여왕을 쓰러트리는 것.
개미들의 수가 원체 많기에, 정석적인 공략은 왕궁으로 향하는 샛길을 찾는 것이다.
늘 정석대로 할 필요는 없지.
“향신료 제도의 영웅이라더니. 이건 너무하잖아.”
“공룡으로 변신 가능한 스킬은 처음 들어 봐.”
“이게 실버 등급이라고?”
등 위에 올라탄 플레이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버스 탑승감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
난 공헌도를 몰아서 얻고, 남은 플레이어들은 쉽게 미션을 클리어하니 일석이조다.
전력 질주로 왕궁까지 일직선 거리로 나아가자, 거대 개미들이 모여들었다.
등에 날개를 단 놈들은 하늘 위로 올라오더니 두 턱을 들썩이며 훤히 드러난 위를 노렸다.
“계약자에게 손을 대려면 여의 허락을 맡아라.”
내 머리 위에 올라탄 닉스가 극야를 조종했다.
수십 갈래로 흩어진 극야.
문어가 발 여덟 개로 먹잇감을 낚아채듯, 여럿으로 나누어진 검은 가닥이 접근하던 비행 타입 개미들을 휘감았다.
“역시 여신님. 든든하다니까.”
“그대의 등 뒤는 여에게 맡기어라.”
끊임없이 몰려드는 개미들.
나는 연신 백택군림각을 전개해서 몰려드는 적들을 몰살시켰다.
[포식을 사용합니다.]
[포식을…….]
먼 거리에 있는 적들까지는 포식하지 못했지만, 꼬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최대한 포식 범위를 넓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석대로라면 최소 몇 시간, 운이 나쁘면 며칠을 투자해야 진입 가능한 왕궁.
[공허의 거울] 덕에 3분 만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여기에도 엄청나게 많군요.”
“천, 아니 만 단위?”
“이렇게 많은 개미들을 상대해야 하다니.”
“진호 님이 다 해치우실 건데 무슨 걱정이야?”
등 위에 올라탄 플레이어들은 걱정과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궁을 감싼 수많은 개미들.
여왕개미는 궁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 내려라.”
중후해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예?”
“변신 풀 거니까 내리라고. 아니면 내 등 위에 올라타 있던지.”
당황한 기색을 띤 플레이어들.
내가 티라노사우루스의 형태를 유지한 채로 왕궁에 돌진할 줄 알았나 보다.
“그렇게 있으면 다 떨어트린다.”
“아, 알겠습니다.”
낯빛이 어두워진 플레이어들이 허겁지겁 땅에 내리자, 바로 [공허의 거울]을 해제했다.
내 곁으로 다가오는 닉스.
“그대여. 괜찮으냐?”
“응. 아직 여유는 있어.”
지속 시간을 상당히 남겨 두고 스킬을 종료해서 그런가, 타격이 크진 않았다.
“여신님.”
“몇 초면 되겠느냐?”
“30초.”
“후훗, 어렵지 않겠구나.”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수라마령심공을 전개.
[공허의 거울]을 사용하느라 진탕된 속을 진정시켰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10초.
대지모신의 가호 덕분에 내상 회복 속도도 매우 빨랐다.
“진호 님. 어떻게 해 주십쇼.”
“돌아갈 필요 없이 당신만 믿으라고 했잖아요.”
거참.
성미도 급한 양반들 같으니라고.
버스 태워 준다고 하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데모닉 파워를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욕망의 주머니에서 아르스 게티아를 꺼냈다.
파라라락- 바르바토스의 진명과 그 힘을 빌리는 페이지를 펼치고는 마나를 암흑 마나로 치환했다.
공격력만큼은 솔라 익스플로전보다도 한 수 위인 최강의 마법 주문.
검은 안개가 내 주위를 감돌자 뒷걸음치는 플레이어 무리.
자식들.
이 정도로 겁먹기는.
“바르바토스의 철퇴.”
마법 이름을 외치는 순간, 재배열된 암흑 마나가 실체화되어서 커다란 철퇴로 구현되었다.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휙 내리는 순간.
콰아아아앙-!
암흑 마나로 빚어낸 철퇴가 왕궁을 통째로 짓이겼다.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철퇴 한 방에 무너진 왕궁.
무덤이 되어 버린 왕궁에서 아까보다 더 많은 체액이 흘러나왔다.
“이걸 진짜로 혼자 클리어할 줄이야.”
“향신료 제도의 영웅은 달라도 다르구나.”
“대박! 이거 34층 최고 기록 경신 확정 아니야?”
기뻐하는 플레이어 무리.
난 담담하게 클리어 보상을 확인했다.
▶34층 최고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보상으로 걀라르호른이 주어집니다.
[걀라르호른]
등급 : 레전드
분류 : 소모품
내구도 : 1/1
종말을 알리는 데 사용되는 뿔피리.
어느 때든지 원하는 성좌를 한 명 지목해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단, 지목한 성좌한테는 어떤 구속력도 지니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30센티 크기의 작은 뿔피리.
역시.
회귀 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걀라르호른을 얻었다.
공허의 거울과 데모닉 파워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한 보람이 있어.
“호오. 신묘한 힘을 품고 있는 피리로구나.”
“성좌를 마음대로 호출할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
“그럼 여기서 얻을 건 다 얻었느냐?”
“아니지.”
오른손으로 무너진 왕궁을 가리켰다.
왕궁의 주인, 여왕개미의 정수를 포식하지 않았다.
“한결같은 사내로다.”
고개를 젓는 닉스.
나는 가볍게 웃은 후, 무너진 왕궁 터를 뒤져서 여왕개미의 정수마저 포식했다.
* * *
[굴파기]
등급 : ★
분류 : 액티브
손으로 구멍을 판다.
스킬 활성화 시에 땅을 만지면 물러진다.
[지배자의 존재감]
등급 : ★★★
분류 : 패시브
사용자를 포함, 주종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능력치가 3% 증가한다.
거대 개미, 그리고 여왕개미한테서 얻은 스킬이다.
굴 파기야 당장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지배자의 존재감은 바로 혜택을 보았다.
상시로 발동하는 광역 버프.
여태 포식한 정수 중 소환 계열 스킬이 없기에, 혜택을 받는 건 나랑 닉스뿐이다.
하지만.
여러 정수를 포식하고 소환 계열 스킬들이 추가되면 그때 빛을 발하겠지.
능력치 3% 상시 추가 옵션도 절대 낮지 않은 수치이고.
[오늘 도전 가능 횟수를 모두 채웠습니다.]
[바벨탑에 도전하려면 한국 기준으로 00시 00분이 되어야 합니다.]
탑 어플에서 접속을 종료한 후, 곧바로 핑 레이를 찾았다.
“길드장님. 부르셨습니까?”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야.”
“때…… 라고 하심은.”
“손오공과 계약할 준비.”
핑 레이는 입을 틀어막더니 감격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징그러우니까 시선 좀 돌려라.”
“가,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네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기회를 주는 거다.”
“더 분발하겠습니다!”
등 뒤에 선 닉스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뿔피리를 얻은 지 얼마…….”
쉿- 짧게 바람을 불자 닉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여신님은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
“한 가지만 당부하지. 넌 계약 과정에서 절대로 입을 열지 마.”
“성좌님께서 저한테 말씀하셔도요?”
“그때는 말해도 돼.”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걀라르호른을 입에 대었다.
부우우우우-!!!
웅혼한 소리가 길드 하우스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걀라르호른을 사용했습니다.]
[호출할 성좌의 이름을 말씀하십시오.]
[이때 해당 성좌의 진명으로는 대상을 소환할 수 없습니다.]
“화과산의 미후왕.”
손오공의 성좌명을 외치는 순간, 나팔에서 뭉게구름이 솟구쳤다.
구름 사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
하늘이 주저앉는 것 같은 느낌이다.
“크으으읏.”
“이 악물고 버텨.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성좌랑 계약은 턱도 없으니까.”
윗니로 입술을 누르면서 버티는 핑 레이.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손오공이 응답하기를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크크크. 어느 놈이 나를 불러냈냐?』
걀라르호른에서 뿜어져 나온 뭉게구름이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원숭이와 사람을 반 정도 섞은 모습이지.
“내가 당신을 불러냈다. 손오공.”
『이 차원에서도 내 성좌명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있다고?』
“당신의 전설이야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크크. 날 안다면 제천대성이라는 성좌명으로 불렀어야지.』
“어쨌든 이 자리에 나왔잖아?”
제천대성.
필마온.
화과산의 미후왕.
손행자.
투전승불.
그 외에도 여러 호칭으로 불린 전설의 화신.
걀라르호른으로 불러낸 성좌, 손오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손오공은 돌연 코를 킁킁거리더니.
『너. 꽤 재밌네. 가이아 할망구의 냄새에 건방진 제우스, 음흉한 바알의 냄새도 나고.』
라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제법이군.
걀라르호른으로 불러낸 화신체에 불과한데도 성좌들의 가호를 알아채다니.
“역시 제천대성은 달라.”
『크크크. 마음에 든다. 인간. 나랑 계약하자.』
“그건 사양하지.”
『왜? 나를 부른 건 계약하자는 의미잖아.』
“너랑 계약을 맺는 건 다른 사람이다.”
가까스로 서 있는 핑 레이를 가리키자, 구름으로 빚어낸 손오공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네놈. 필멸자 주제에 날 기만하려 하냐?』
걀라르호른이 파르르 떨린다.
아이템을 매개체로 불러낸 성좌의 단말이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실내에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기자재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닉스가 나서려 하자 오른손으로 제지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얘를 잘 봐 봐. 분신 능력에 봉까지 쓴다니까.”
『자질만 놓고 보면 괜찮은 놈이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녀석이 있는데 왜 쟤를 선택해야 하지?』
“내가 당신을 배후성으로 두면 재미가 없어질 테니까.”
날 주시하는 신왕 급 성좌만 셋.
악연까지 포함하면 제우스도 넣어서 넷이다.
여기서 손오공을 선택하면?
『제길. 일리가 있잖아.』
“그 대신 당신한테 제안을 하나 하지.”
『좋아. 들어 보지.』
“천리안의 계약을 하는 거다.”
탑 바깥, 그러니까 지구에서도 내가 보는 것을 공유하는 계약이다.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색다른 유흥거리를 좋아하는 손오공한테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일 것이다.
『거기. 너. 이름이 뭐냐.』
“예, 예! 핑 레이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아쉽지만 너도 쓸 만해 보이니 계약이나 하자. 아니면 너도 쟤처럼 튕길래?』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제천대성이시여!”
핑 레이는 부복하더니 머리를 땅에 찍었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인데.』
손오공은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봤다.
『천리안의 계약도 나름 대가는 있어야지. 넌 원하는 게 뭐냐?』
그래.
핑 레이한테 손오공을 배후성으로 두게 한 것도 목적이지만.
진정한 목적은 하나가 더 있었다.
손오공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다고.
“기초 선법 비급을 원합니다.”
진(眞)여의주로 다룰 수 있게 된 선력.
회귀 전에 걸어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길, 선법을 손에 넣을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