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엔리케와 핑 레이를 영입하고 한 달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미션 하나 진행하지 않고 길드 하우스에서 수련에 매진했다.
팡!
기다란 봉이 쭉 뻗어진다.
회(回)의 묘리에 따라 빙글빙글 도는 봉 끝.
스치기만 해도 마주한 상대의 피부를 찢어발기는 힘이다.
“꽤 늘었네?”
곧게 편 손바닥으로 봉을 가볍게 쳐 낸다.
비익대붕장.
대붕(大鵬)의 날갯짓을 따서 만든 장법은 봉의 궤적을 옆으로 틀어 버렸다.
이를 악무는 핑 레이.
방향이 틀어진 봉대를 크게 휘두르면서 내 옆구리를 노렸다.
꽤 무리하는군.
현무제암고로 봉을 밀치자, 그 여파로 핑 레이의 몸까지 휘청거렸다.
“그만. 여기까지.”
“훅, 후욱.”
거칠게 숨을 내쉬는 핑 레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대련, 감사합, 니다.”
“뭘. 나도 무공 수련하고 좋은데.”
이전처럼 대련을 빙자한 구타(?)보다는 조금 더 심도 있게 핑 레이의 무공을 봐주었다.
손에 익지 않은 봉법을 익혔는데도 빠르게 성장하는 핑 레이.
중국의 암흑가를 지배했던 ‘죽음의 손’답다.
그나저나.
[백수제왕무의 성취가 4성에 도달했습니다.]
이건 예상 못 했군.
핑 레이와 대련을 할 때에는 무공 외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녀석이 천화봉법에 익숙해지려면 주먹을 맞대는 게 가장 효율적일 테니.
한데, 그 덕분에 백수제왕무의 성취가 빠르게 올랐다.
난 잠깐 눈을 감았다.
백수제왕무의 요체야, 회귀 전에 12성에 도달했기에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육체가 그 지식에 적응하는 건 별개의 일.
생각했던 것보다 4성에 도달하는 속도가 빨랐어.
핑 레이한테 맞춰서 대련을 한 게 나한테도 득이 된 셈이다.
우우웅!
수라마령심공으로 빚어낸 패도적인 내공이 주먹에 깃든다.
“길드ㅈ…… 흡.”
입을 틀어막는 핑 레이.
깨달음을 얻는 중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하긴.
갑자기 손에 권기를 형성시키면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하지.
팡! 파팡!
허공을 가르는 주먹.
유형화된 흑색 기(氣)가 공기에 닿자,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진다.
나는 응룡황권에 이어 백수제왕무 전반주 초식을 물 흐르듯이 이어서 펼쳤다.
변화무쌍한 기의 형태.
장법, 각법, 조법 할 것 없이 원활하게 기가 발현되었다.
백수제왕무는 몸뚱이로 펼칠 수 있는 모든 무공을 집대성하여 한데 묶어놓은 기예.
권·장·각·조법 등 각 초식의 기(氣) 발현 방식이 다르지만, 난 어렵지 않게 유형화시킨 기를 다루었다.
회귀 전에 다 해 봤으니까.
깨달음은 충분했지만, 무공 성취가 낮아서 펼치지 못한 것뿐이다.
전반부 초식을 쭉 펼치고 나니, 핑 레이 녀석이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야, 징그러우니까 그렇게 보지 마.”
“역시 길드장님을 따른 건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갑자기 웬 비행기를 태워 주냐?”
“무공을 익힌 지 반년 만에 권기상인의 경지라니. 제가 안 놀라게 생겼습니까!”
응. 회귀자라서 되는 거야.
부족한 건 무공의 성취일 뿐.
백수제왕무의 성취, 즉 내 몸뚱이가 무공에 더 익숙해지면 강기를 뿜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엔리케, 장비를 다루는 건 좀 익숙해졌나?”
“좀 어렵긴 한데, 괜찮아요.”
푸른 갑주로 완전무장을 한 엔리케.
또래보다도 신장이 작은 편이라서 위압적이기보단 귀엽게 보였다.
마나 전도율이 높은 레어메탈로 제작한 갑주.
중심부에는 [고대의 마력 코어]를 세팅해 두었고, 양팔과 다리에는 일회성 마나 스톤이 박혀 있다.
[메카닉 컨트롤]
[동조화]
고대의 마력 코어가 선홍색 빛을 토해 내면서 갑주에 마력을 공급했다.
엔리케의 능력으로 강화된 갑주.
손을 앞으로 펼치자, 응축된 마력탄이 쏘아졌다.
「5등급에 해당하는 충격입니다.」
「그 이상의 공격은 방어막에 영구적인 파손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훈련장 벽에 닿자 방어막에 상쇄돼서 사라지는 푸른 구체.
엔리케는 그 뒤에도 허리에 부착된 마력 부스터를 사용, 지면에서 살짝 떠올랐다.
“이제 좀 적응이 됐나 보군.”
“비행은 좀 어려운데 그래도 괜찮아요.”
“전에 썼던 총기랑 비교하면 어때?”
“최고예요!”
엄지를 척 드는 엔리케.
한 달 전만 해도 총기를 쓰네 마네 하면서 징징거리더니.
이제는 새로운 장비에 익숙해졌는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나저나 길드 하우스도 다시 얻든 해야겠네.
나름 비싼 돈을 주고 설치한 방어 마법인데도 길드원들의 힘을 버티질 못했다.
최근에는 전력으로 훈련한 적이 없을 정도.
랭커인 홍윤수나 신준석은 아예 길드 하우스에서 대련을 하지 않았다.
“후배님, 여긴 툭 치면 날아갈 것 같은걸.”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나랑 대련 한번 해 주시죠, 길드장님.”
두 랭커는 길드 하우스에 올 때마다 아쉬운 기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엔리케의 장비를 맞춰 주는 데만 수십억이 들었는데.
나중에 받아 낼 생각이지만 당장에 돈 쓸 곳이 많다 보니 아랫배가 아파 왔다.
“길드 하우스는 알아보고 있으니 좀만 기다려 주시죠.”
새 멤버들을 영입.
그들을 훈련시킬 겸, 나도 새로 얻은 능력들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을 쭉 보냈다.
“이제부터는 길드원들끼리 팀을 꾸려서 탑에 도전한다.”
“길드장님도요?”
“난 실버 등급이잖아. 너희랑 못 어울려.”
“와아, 진짜 못됐다, 스승님.”
지영이가 볼을 부풀렸다.
“아니꼬우면 빨리 실버 등급 올라오든지.”
“금방 따라갈 테니 기다리세요!”
지영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다른 길드원들도 말은 안 했지만 눈가에 호승심이 아른거리는 게, 같은 생각인 듯했다.
“모두의 분투를 기대하지.”
실버 등급부터는 팀 단위 미션이 여럿 있다.
나 혼자서도 난관을 돌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보험이 있으면 좋으니까.
팀 단위로 최고 기록이 경신되기에, 보상이 나누어질 염려도 없다.
길드원들에게 목표를 제시하곤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올라가려느냐?”
“응. 나름대로 준비를 했으니까.”
나는 욕망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아른거리는 기다란 열쇠.
탑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는 아이템, 유부의 열쇠다.
바벨탑 곳곳에는 옛 신들이 유폐된 공간과 맞닿은 장소가 있다.
국내 랭커와 맞붙어도 패배하지 않을 정도로 기량을 끌어올렸지만.
탑 지하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긴 나도 이야기만 들었지, 가 보지는 못했거든.
“도전은 해 봐야지.”
“후훗, 그대의 실력이라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탑 지하라는 말을 생략해서인지 닉스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혼자서 가는 것도 아니고.
내 옆에는 여신님이 있으니까.
* * *
[바벨탑 - 31층]
[불굴의 황무지에 진입했습니다.]
[미션 - 분노의 질주]
래피드대시는 불굴의 황무지에서 가장 빠른 생물입니다.
불굴의 황무지에서 녹색의 땅으로 가려면 래피드대시를 쫓아야 합니다.
래피드대시의 발자취를 쫓아서 녹색의 땅으로 향하십시오.
▶목표: 녹색의 땅에 도달.
▶특이 사항
-래피드대시의 발자국은 30분 뒤에 사라짐.
둥글게 말린 엉겅퀴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황무지.
마른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히히힝-!
말의 울음소리.
전신에 불을 휘감은 백마, 래피드대시가 푸르릉거린다.
“플레이어, 내 뒤를 따라와라.”
“호오, 미물 주제에 말도 하다니. 제법이구나.”
“미물? 히히힝! 나는 페가수스의 피가 섞인 영물이다.”
래피드대시가 콧김을 불자, 불길이 나오면서 지면을 검게 태웠다.
“영물이라.”
할짝.
입술로 혀를 핥자, 닉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왜. 내가 뭐라고 했는데?”
“구태여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라.”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둘이 대화를 나누자, 래피드대시의 눈동자에서 쌍심지가 켜졌다.
“날 두고 떠들다니. 건방진 플레이어군.”
투쾅!
래피드대시는 성을 내듯 지면을 박차면서 황무지를 질주했다.
놈의 발자국 위로 이글거리는 화염.
불꽃을 휘감은 말답게 족적에는 뜨거운 화염이 남는다.
튜토리얼에서 흡수한 정수, ‘파이어 웜’의 [블레이즈]보다 상위 호환격인 불꽃.
“쫓아올 수 있겠나?”
말이 히죽거렸다.
저 구강 구조로 비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군.
닉스는 바로 영체화를 했다.
-여는 신경 쓰지 말고 달리기만 하여라.
정말이지.
역시 최고의 파트너, 아니 친구라니까.
[메탈 반사 장갑을 사용합니다.]
전신을 휘감는 은회색 갑주.
나도 지면을 박차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족적에서 솟구치는 화염이 몸을 휘감았지만, 열기가 메탈 반사 장갑을 뚫진 못했다.
“히힝. 제법이군.”
조금씩 속도를 올리는 래피드대시.
놈의 발자국에서 솟구치는 불길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를 사용합니다.]
래피드대시의 속도에 맞춰서 스킬을 하나씩 사용.
메탈 반사 장갑만으로는 열기를 방어할 수 없자, 극야로 불길을 지워냈다.
-차라리 저 말보다 앞서가는 것이 어떠느냐?
“목적지가 늘 바뀌거든. 저 녀석을 따라가는 게 정답이야.”
설상가상으로 래피드대시는 질주하는 동안 [무적] 판정을 받는다.
제압도 불가능하니 무작정 달리는 수밖에.
내 속도가 떨어지지 않자, 래피드대시가 대놓고 방해 공작에 나섰다.
몸에서 불을 더 뿜어내서 길을 엉망으로 만드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고.
뒷발질로 지면을 세게 차서 인근의 땅거죽을 모두 헤집거나 근처에 있는 오크들을 호출하기도 했다.
쯧, 나는 혀를 찼다.
-귀찮게 하는구나.
“아니. 이왕이면 오크 말고 못 만난 괴물이나 호출할 것이지.”
스스슷!
달려드는 오크들은 극야로 제압.
화풀이하듯이 사체를 포식했다.
[혼원룡의 심장] 덕에 마력 스텟이 올라가니 한 마리도 놓치기가 아까웠다.
“히히히힝!!”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한 푸르른 초목들.
목적지인 ‘녹색의 땅’이다.
결승이 멀지 않은 것을 인지한 래피드대시가 있는 힘껏 달렸다.
[초고속 질주]
[어질 업]
[블레이징 소울]
여태 아껴 둔 보조 마법과 질주 스킬, 그리고 전신에 두른 화염을 강화했다.
한층 더 강력해진 불꽃.
이 정도 화염은 나도 맞고만 있기가 부담스러운데?
-여기가 승부처구나.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녹색의 땅이 나타난 이상, 결승점이 바뀌지는 않는다.
굳이 지금처럼 래피드대시의 속도에 맞춰 줄 필요가 없다는 뜻.
-후후훗, 그렇다면 여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밤의 여신의 축복이 적용됩니다.]
[피오르의 축복이 스며듭니다.]
여태 아껴 둔 버프를 사용.
운류보와 전력 질주까지 병행하면서 래피드대시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녹색의 땅.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응. 아니야.”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축지를 사용.
래피드대시보다 한발 앞서서 녹색의 땅에 진입했다.
다가닥-.
제자리에 멈춰선 래피드대시.
놈은 멍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패배는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너를 죽임으로써 이번 승부를 없던 일로 만들면 그만!”
[31층의 숨겨진 요소가 충족되었으므로 미션 내용이 변경됩니다.]
[히든 미션 - 래피드대시의 분노]
래피드대시는 달리기에 자부심을 가진 영물입니다.
플레이어에게 짓밟힌 마음을 회복하려면 이번 승부를 없던 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 목표: 래피드대시 사냥.
-설마.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더냐?
“당연하지.”
나는 다시 한번 혀로 입술을 촉촉하게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