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길드 하우스 앞에 나타난 핑 레이.
푹 파인 볼 아래로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이 더덕더덕 붙어 있고.
눈가는 피로감에 절어서 파르르 떨렸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눈동자다.
어느 때보다도 흉흉했으며, 또한 날카롭게 벼려졌다.
“멋진 눈이군.”
“칭찬입니까?”
“응.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이런 걸로 칭찬받을 줄이야, 크큭.”
핑 레이가 쓰게 웃었다.
“한국까지 오느라 고생 많이 했나봐.”
“세 번은 죽을 뻔했죠.”
“오버하기는.”
“두 번.”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이야기를 해 줘야 알지.”
핑 레이는 억하심정이라도 맺혔는지, 한국으로 입국하는 과정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위약금 형식으로 투자받은 돈을 모두 토해 내곤 항구로 향했습니다.”
“항구는 왜?”
“공항으로 갔다가는 바로 구룡방에게 걸렸겠죠.”
다행히 구룡방은 핑 레이가 한국으로 가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구룡방과 경쟁 길드의 수작질이라고 판단.
중국 내 길드들을 견제하는 한편, 자금의 출처인 골드 문과 핑 레이가 접선하는 것을 막으려고 움직였단다.
“전 어선을 타고 한국으로 밀입국했습니다.”
“영화에서 많이 봤는데.”
“직접 해 보시면 느낌이 다를 겁니다.”
“사양하지.”
핑 레이가 분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왜. 나까지 고생할 필요가 있냐.
“어쨌든 웰컴 투 코리아.”
“나는 모든 걸 버리고 길드장님을 따라왔습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약속을 지켰듯이, 나도 지킬 거니까.”
이미 너 하나 영입하겠다고 1억 달러를 태웠단다.
투자한 게 있으니 뽕을 뽑아야 하지 않겠어?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군.”
“뭡니까?”
“일단 좀 씻어라, 어후.”
난 코를 부여잡았다.
밀입국해서 바로 여기로 온 건지, 바다 냄새와 찌든 때가 섞인 비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작은 소란 후.
신준석에게도 핑 레이를 소개했다.
“구룡방의 유망주라고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한국의 권성. 그때 길드장님과의 대련은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핑 레이는 포권지례를 했다.
어째 나보다 더 높게 보는 것 같다?
“소협이 나를 고평가 하는군.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전 압니다. 권성께서 초식을 실시간으로 개변하신다는 것을요.”
“안목이 뛰어나군, 껄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었다.
“흠흠.”
짧게 헛기침하자, 둘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선배님, 저번에 보여 주셨던 무공 중에 천화봉법이라고 있었죠?”
“천화봉법이라. 아직도 가지고는 있지.”
“그걸 이 녀석한테 주십쇼. 값은 제가 치르겠습니다.”
핑 레이가 화들짝 놀랐다.
“봉법이라굽쇼?”
“말했잖아. 너한테 성좌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미후왕.
제천대성.
그 외에도 여러 신명으로 불리는 성좌, 손오공.
신왕은 아니지만 그 위명만 놓고 보면 S급 성좌를 뛰어넘는 강력한 성좌다.
“핑 레이야, 손오공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분신과 여의봉 아니겠소.”
“그래. 대답은 그걸로 된 거 아니겠냐.”
“……진심이십니까?”
“응. 손오공의 환심을 사려면 봉법이 필수야.”
후일 핑 레이와 동일한 [분신] 능력으로 화제가 된 중국의 플레이어 하나가 봉법을 익힌 덕에 손오공과 계약을 맺었다.
핑 레이가 쌍검 대신 봉법을 익힌다고 해서 손오공을 배후성으로 둘 확률이 100%는 아니지만.
손오공이 입질을 물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연결시킬 자신이 있다.
마침 녀석이 세트와 계약하지 않기도 했고.
핑 레이는 얼마간을 고민하더니.
“에이, 난 이미 길드장을 믿기로 했으니, 그렇게 하겠소.”
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야, 그러다가 보증 서 달라고 하면 도장도 찍겠다.
“좋아. 선배님?”
“잠시만 기다리게.”
무공 비급을 가지고 돌아온 신준석.
핑 레이는 조심스럽게 책자를 받아들더니 바로 첫 장을 넘겼다.
푸스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루가 되어 버린 책자.
“어때?”
“요체는 이해했습니다. 숙련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몸에 익으려면 역시 대련이 최고지.”
가볍게 손발을 털었다.
핑 레이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의구심.
“뭐 하시는 겁니까?”
“네 수련 도와주려고. 이론이야 머릿속에 다 있잖아.”
훈련장 한쪽에 비치된 봉을 던져 주자, 핑 레이가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몸으로 배우는 게 제일 빨라.”
나는 씩 웃었다.
적당히 손봐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 * *
구룡방의 길드 마스터, 장 우페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놈이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습니다, 대형.”
“어이가 없군.”
장 우페이는 허허- 하고 마른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집무실 공기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잦아드는 목소리.
“추태다.”
우페이의 눈동자가 뱀처럼 차갑게 길드 간부들을 훑었다.
“핑 레이한테 이적 제의를 한 게 사신이나 중화 길드라고 말한 게 누구였지?”
“저입니다, 대형.”
“왜 아직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흑수(黑手)]
장 우페이의 손으로 홱 당겨진 길드 간부.
손에 힘을 주자 목덜미에 핏줄이 튀어나올 듯이 도드라졌다.
“커, 커흑. 대형!”
“머리가 모자라면 행동이라도 빨라야지. 그렇게 굼떠서 어디에 쓰나?”
“끄으으윽.”
길드 간부가 새빨개진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게 확실한 상황이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장 우페이의 심기를 건드려서 행방불명이 된 사람만 수십 명.
구룡방의 폭군이 분노했을 땐 그 누구도 건들 수 없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간부.
장 우페이는 그제야 손의 힘을 풀었다.
철푸덕- 바닥에 쓰러진 간부가 그의 구두를 붙들면서 애원했다.
“사, 살려 주십쇼, 대형! 부디 자비를!”
“그때의 분석, 다시 읊어 봐.”
“예?”
“나는 기회를 두 번 주지 않아.”
장 우페이가 발에 힘을 주자, 막 목덜미를 붙들렸던 간부가 울먹거리면서 입을 떼었다.
“이번 사건은 핑 레이가 1억 달러를 지불하면서 길드 탈퇴를 선언하는 걸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랬지.”
“그 파렴치하고도 후안무치한 배반자가…….”
“잡설은 빼라.”
“예! 그 배반자가 자력으로 1억이라는 돈을 마련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자금 출처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어디가 나왔었다고?”
“골드 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형께 자금 출처가 사신 길드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신(四神)은 구룡방 다음 가는 길드다.
활동 영역이 겹치지 않아서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뿐.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 가는 사신과 중국 제일 길드의 명성을 지닌 구룡방이 부딪치는 건 필연적이었다.
장 우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움찔거리는 길드 간부들.
정작 그는 상념에 빠져서 간부들의 반응을 살피지 않았다.
‘올바른 판단이다.’
길드 간부의 보고를 곱씹으면서 지난 상황을 떠올려 보아도, 장 우페이의 선택지에서 오답은 없었다.
한국의 신예.
유진호를 희생양 삼아서 길드의 신예를 더 높이려고 무리하게 투자한 것 빼고는 틀린 게 없다.
‘아니. 그렇기에 더 정답인 것이다.’
핑 레이가 아무리 촉망받는 인재라고 한들.
인구 14억의 대국, 중국은 수많은 플레이어가 탄생되고 있다.
바벨탑에서 인구가 많은 나라에는 초대장 발급에 페널티를 부과한다지만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의미가 별로 없었다.
1억 달러를 주고 핑 레이를 가져온다?
‘구룡방에 도전장을 내거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는 짓.’
장 우페이가 손속에 자비를 둔 이유다.
만일 간부의 분석이 틀려서 이런 사달이 벌어졌다면.
흑수로 잡아당긴 순간 간부의 목을 망설임 없이 꺾어 버렸을 것이다.
“더 말해 봐.”
“저희는 사신과 중화에 감시망을 펼쳤고, 또한 미국으로 출국할 것을 우려해서 공항들을 감시했습니다.”
“그랬는데 놈이 한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군.”
“마, 맞습니다.”
“이봐, 러우쉰. 하나만 묻겠네. 핑 레이가 1억 달러를 태울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나?”
“아직은 투자한 금액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더 걸릴 거고요.”
“근데 왜 사신도 중화도, 골드 문도 아니고 역천인걸까?”
집무실이 다시 한번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길드 간부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장 우페이도 마찬가지였다.
“놈의 뒤에 구룡방이 있는지를 뻔히 알면서 골드 문에 투자받은 금액을 모두 핑 레이 영입에 쏟아부었다라.”
허- 비틀어진 웃음이 침묵을 깨트렸다.
‘그럴 리가 있나.’
장 우페이는 방금 전에 내뱉은 말을 부정했다.
진호가 역대급 루키라고 해도 구룡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우선 길드장인 장 우페이부터 중국 1위 랭커이고.
휘하에 쟁쟁한 플레이어들을 수백이나 둔 강력한 길드다.
1차 대침식 이후, 플레이어 길드의 위상이 얼마나 상승한지를 생각하면 거의 한 나라를 적으로 두는 셈!
‘이 판을 설계한 녀석이 있다.’
그게 장 우페이의 결론이다.
“일어나라, 러우쉰.”
“감사합니다. 대형!”
“잘못을 눈감아 주는 건 한 번뿐이다.”
장 우페이의 눈동자에서 스산한 살기가 번뜩였다.
분위기가 한층 풀어지니, 다른 간부들도 입을 떼기 시작했다.
“대형, 역천에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작해야 소국의 길드에 몸을 투신하다니. 멍청한 핑 레이 녀석!”
“역천 길드에서 게이트를 공략할 때에 맞춰 히트맨을 투입하는 건 어떻습니까?”
구룡방은 합법과 불법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길드다.
다른 나라라곤 해도, 작은 길드 하나 정도는 밟아 줄 힘이 있었다.
쯧- 혀를 차는 장 우페이.
“그러면 몸통을 잡을 수 없다.”
“몸통 말입니까?”
“이번 일은 구룡방에게 도전하겠다는 메시지다.”
장 우페이는 머릿속으로 정리한 이야기를 간부들에게 들려주었다.
“과연!”
“그렇군요. 역시 대형이십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소국의 길드 따위가 구룡방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 리가 없죠!”
길드 간부들은 장 우페이의 혜안에 경탄했다.
상식을 뛰어넘은 사태를 접해서 굳어 있던 머리가 장 우페이의 발언 덕에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당분간은 역천 길드를 그대로 둔다.”
향신료 제도의 영웅.
승급전을 치를 때마다 파란을 일으키는 존재.
한창 상승세인 진호를 건들기에는 부담감이 컸다.
“하오나 대형, 이번 사태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겠습니까?”
“2보 전진을 위해서는 1보 후퇴도 필요한 법.”
“존명!”
“아니지. 그렇다고 해서 역천을 가만두는 건 위신이 살지 않아.”
장 우페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콰드득!
산산조각 나는 팔걸이.
아까 목이 붙들렸던 간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이제이라는 말이 있지.”
“역시 대형이십니다.”
“두각을 보인 역천과 경쟁할 길드를 물밑에서 지원해 주면 되겠군요!”
길드 간부들은 장 우페이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나머지는 맡기지.”
“존명!”
장 우페이가 손짓하자, 간부들이 일제히 집무실을 나섰다.
침묵으로 물든 방.
방의 주인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번 사태의 진범을 떠올렸다.
‘수작질을 부릴 놈이야 뻔하다.’
이번 사태에서는 교묘하게 흔적을 숨겼지만.
똑같은 행운이 찾아오지는 않으리라.
장 우페이는 복수하는 순간을 떠올리며 분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