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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52화 (152/300)

152화

닉스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분노.

“다시 말해 보아라.”

“생각해 봐. 여신님 나이가 몇 살이야?”

“이 세상에 밤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이니, 헤아릴 수 있겠느냐?”

“우리 조상님이 유금필이라는 분인데, 돌아가신 지 1천 년이 좀 넘었거든요.”

할머니도 정말 많이 봐준 거다.

사람이 배려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구먼.

“누나. 그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불허한다.”

“이ㅁ…….”

“그 주둥이를 더 나불거려 보아라.”

“누님.”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닉스는 이제야 만족한 듯 노한 표정을 거두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족 타령을 하는 거야?

그녀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힐끗거리니 [드라마타운]이라는 영상이 비쳐져 있었다.

단편 드라마 위주로 편성된 프로그램.

영상의 주제는 고독사였다.

…….

드라마가 한 건 해냈군.

“그럼 가자꾸나.”

“어디를 가?”

“우리가 가족이 된 것을 기념해야 하지 않겠느냐.”

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와 바람이나 쐬러 가자꾸나.”

“생각해 둔 곳은 있어?”

“후후훗, 여는 모든 것을 안배해 두었느니라.”

“그 잘난 안배가 뭔지나 들어 봅시다.”

“처음 갈 장소는 탑이니라.”

순간적으로 두 귀를 의심했다.

“바벨탑?”

“그러하니라. 온갖 신성이 엮인 곳이자, 여러 차원의 질서가 교차하는 곳.”

“……참 거창하게 부르네.”

내 입장에서는 씹어 먹고 싶은 원수들의 거처인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난 쓴웃음을 지으며 닉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갑작스러운 외출.

튜토리얼 이후 바벨탑에 온 건 처음이다.

데스크탑, 전화기, 태블릿 등 탑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저것 많으니까.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나 직접적으로 탑에 입장하는 방식을 쓴다고 하던데.

나도 멸망의 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탑에 접속해 본 적이 있었다.

“바벨탑을 직접 본 소감은 어때?”

“직접 보니 색다르구나. 그야말로 바벨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건축물이니라.”

바벨.

고대 메소포타미아어로는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뒤섞어 놓았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다.

“신에게로 향하는 문.”

“혹은 여러 신들의 권능을 섞어서 올린 탑, 이라고 불러도 되겠구나.”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뜻은 맞으니까.”

바벨탑을 가까이에서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욕지거리를 꾹 참은 채, 닉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갈색 벽돌을 훑는 닉스.

“여신님.”

“누나.”

“……예. 누님, 벽은 왜 만지는 거야?”

“그대는 모르겠지만, 여에게는 느껴지는구나.”

닉스가 벽돌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웅-.

가벼운 노크에 공명하는 벽돌.

회귀 전에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모습이다.

“벽을 구성하는 힘 중에 여의 근원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고신족들이 미워?”

“여는 그들을 동정하느니라.”

닉스의 목소리에 처연함이 스며들었다.

“그 아이들은 숭배받는 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대원칙마저 잊어버리고 쇠락해 버렸구나.”

“대원칙?”

“신성의 근원인 필멸자들을 지키는 것이니라.”

글쎄.

올림포스의 신왕, 제우스만 해도 필멸자를 벌레 보듯이 하던데.

내기에서 졌다고 분노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닉스가 말한 대원칙이 전혀 연상되지 않았다.

동정심이라.

“이거 하나만 하자. 여, 아니 누님.”

“무엇을 말이더냐?”

“내 복수를 방해하진 마.”

고신족들이 어떤 사연을 가졌든 알 바 아니다.

닉스가 그들을 안타까워해서 느슨하게 행동한다면…….

“걱정하지 말거라. 여는 그대의 행보를 막을 생각이 없느니라.”

“방금 전에는 안타까워하지 않았어?”

“그 아이들은 선을 넘었느니라. 성좌의 긍지를 잃은 이들이 심판당하는 것 또한 순리일 터.”

담담하게 말했지만, 닉스가 진심이라는 게 마음으로 와닿았다.

나랑 만나지 않았었어도 수백 년 후에는 깨어났을 터.

닉스의 마음가짐이 저렇다면, 힘을 되찾은 후에 어떻게든 고신족들을 처벌했을 것이다.

고신족 놈들.

너희가 모르는 사이에 무서운 적을 만들었군.

“이제 다음 장소로 가자꾸나.”

“정말로 코스를 짠 거냐?”

“여는 늘 진심이거늘.”

“후, 그래. 어디든 갑시다.”

닉스는 내 손을 잡고는 바벨탑 근처 건물로 향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와, 연예인인가?”

“저런 배우도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옆에 있는 사람 유진호잖아.”

“향신료 제도의 영웅!?”

“헐, 대박!”

처음에는 눈부신 닉스의 외모에 시선이 끌리더니, 다음으로 나를 알아챈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멀리서 사진을 찍는 건 기본이요.

“저, 진호 님 팬이에요! 사인 좀 해 주세요!”

“옆에 계신 분은 혹시 연인인가요?”

과감하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하나둘 있었다.

닉스는 도도한 표정으로 행인들을 쭉 훑어보더니.

“가족이니라.”

라고 짧게 대답했다.

잠깐만요.

그 가족이라는 말에 포함되는 의미가 굉장히 많거든요?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은 닉스의 말뜻을 이해하느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하군.

“빨리 좀 가자.”

“후후훗, 보채는 사내는 여의 취향이 아니다만.”

“다음부터 노력할 테니 지금은 좀 이쪽에 맞춰 주시죠.”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았다.

이래서 너튜브가 문제라니까.

닉스의 손에 이끌려서 간 곳은 디저트 카페였다.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페를 가리켰다.

“여기가 목적지야?”

“그러하니라.”

“의외로 정상적이라서 놀랍군.”

“여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러느냐?”

실눈으로 흘겨보는 닉스를 못 본 척하며 카페로 들어섰다.

빈 좌석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붐비는 내부.

“유명한 곳인가 보네.”

“여긴 쌀 케이크로 유명한 곳이라고 하더구나.”

“진짜로 조사한 거야?”

“실은 지영이에게 미리 추천을 받은 것이니라.”

아주 작정하고 왔네.

케이크 2조각을 주문하고는 겨우 자리를 잡았다.

웅성웅성-.

카페에 있던 손님들도 우리를 인식하고는 목소리를 낮춰서 속닥거린다.

말 그대로 ‘여신’님인 닉스.

나도 꽤 유명 인사가 된 탓인지, 주위의 이목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해 봐. 가족은 핑계고 바람 쐬고 싶었지?”

“후훗, 반은 정답이니라.”

눈부시면서도 다른 각도로 보면 서글퍼 보이는 미소.

어떻게 두 가지 느낌이 공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여의 계약자여.”

“응?”

“그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게 타인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도다.”

닉스의 두 눈이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그녀에게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언제나 답을 꿰뚫어 보며 경험하지 않은 일조차도 안다는 것.”

설마,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알아챈 건가?

섣부르게 대답하는 대신 닉스의 두 눈동자를 직시하기만 했다.

“너무 경계하지 말거라. 여도 혜안의 비밀을 알지는 못하고 있으니.”

“……그런데?”

“하나, 여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느니라.”

닉스는 입가의 미소를 거두었다.

“그대의 어깨 위에 얹어진 짐의 무게.”

“난 그런 거 없어.”

어깨를 살짝 올리면서 능청을 떨었지만.

“가벼운 언동으로 여를 기망하려 하지 말거라.”

닉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오늘따라 진심이군.

바벨탑에서도 그랬지만, 여신님이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들어 봐야겠다.

그녀와 나는 파트너니까.

“26층, 수라도를 기억하느냐?”

“뭐. 지긋지긋하게 싸웠던 거라면.”

“탑에서 구현한 모조품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적의와 악의만큼은 진짜였느니라.”

짧게 한숨을 쉬는 닉스.

여신님조차도 꺼려지는 곳이었나보군.

“한데 그대는 죄인들의 악의에 짓눌리지 않더구나.”

“문제가 될 건 없잖아.”

“아니. 그대의 영혼은 어딘가가 마모되었느니라.”

쓴웃음이 입가를 물들였다.

마모라.

탑의 경쟁에서 패배한 인류가 맞이했던 비극을 보고 오면 나사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마모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없어.”

“아니. 문제이니라.”

닉스의 표정이 무너질 듯이 슬픔으로 가득 찼다.

보는 이들조차 처연함으로 물들이는 얼굴.

아, 이제야 깨달았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후, 줄곧 감정을 싣지 않았다고 생각한 닉스의 표정.

사실은 저 슬픔을 참기 위해 감정을 참고 있었던 거구나.

백 마디 말보다 닉스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절로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가족 핑계를 댄 거야?”

“아니었으면 그대의 솔직한 감정을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도다.”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까지 닉스가 나를 생각했을 줄은.

내가 ‘회귀’까지는 아니어도 무언가 비밀을 품고 있다는 걸 짐작한 건 둘째치더라도.

수라도에서 보인 감정의 결락을 곱씹으면서 고민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건 너무 반칙이잖아.”

우리는 비즈니스적인 파트너 관계 아니었어?

날 이렇게나 생각해 주다니.

마른 웃음으로 울컥한 감정을 숨겼다.

“그 말이면 대답은 충분하구나.”

닉스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충분한데?”

“그대가 짊어진 것의 무게감과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만으로도 만족하느니라.”

“……오늘은 한 방 제대로 먹었네.”

“언젠가, 여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즐겁게 기다리마.”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주문하신 케이크 나왔습니다.”

쌀로 만든 케이크가 테이블 앞에 놓였다.

“저기요, 여신…….”

“누나.”

“아, 그러니까 누님.”

“지영이에게 추천받은 케이크나 맛보아라.”

닉스는 포크로 집은 빵과 크림을 내 입에 쏙 넣었다.

오물오물.

냠냠.

“맛있네.”

“과연. 여도 맛봐야겠구나.”

닉스는 내 입에 넣어 주었던 포크를 그대로 사용해서 케이크를 쿡 집었다.

저, 저기요?

그대로 케이크를 입에 넣더니.

“흐으으으음-!”

하고는 황홀한 목소리를 냈다.

리액션이 좀 과한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확 집중되자, 더 말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참으로 맛있구나. 지영이의 말이 과장되지 않았도다.”

“그럼 먼저 사 달라고 하지 그랬어?”

“이곳의 케이크는 그대와 처음으로 맛보고 싶어서 참았느니라.”

“별거에 의미를 부여하시네.”

나는 투덜대면서도 빠르게 포크를 쥐었다.

이대로 있으면 케이크가 닉스의 배 속으로 다 들어가게 생겼다.

채앵!

허공에서 얽혀지는 포크 끝.

“거 적당히 드시죠.”

“그대의 나라에는 장유유서라는 말이 있더구나.”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먹어 보고 괜찮은지 알려 줄게.”

“맛봤는데 문제는 없더구나. 안심하고 먹어라.”

“또 모르지. 안쪽에 독이 있을지도.”

나는 닉스와 신경전을 벌이면서 남은 케이크를 빠르게 입속으로 넣었다.

“분하구나. 저 극악무도한 자가 여의 간식을 다 가로채다니.”

“그러게 누가 욕심내라고 했나.”

나는 포크를 내려 두었다.

“말해 둘 게 있어.”

“무엇이더냐?”

“여신님과 갑자기 가족이 될 수는 없어.”

입술을 비죽 내미는 닉스.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친구로 시작하는 건 어때?”

“친구, 라.”

“비즈니스 파트너보다는 훨씬 인간적이잖아.”

닉스는 잠깐 동안 두 눈을 깜빡이더니.

“그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로구나, 친구여.”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친구.”

우리는 처음 계약했을 때처럼 손을 마주 잡았다.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이렇게나 힘이 날 줄이야.

코너를 돌아서 길드 하우스 입구를 들어가려는 순간.

“길드장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핑 레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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