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귀국 과정은 순탄했다.
“갱단의 손에서 구출한 가족을 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니. 역시 향신료 제도의 영웅답습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태클 하나 없이 엔리케 가족의 이민을 승인했다.
여권 발급도 프리패스.
“팀장님의 수완이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습니까?”
“설마요. 전 대사관에 말 한마디 한 게 전부인데요.”
한수창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 양반도 놀라는 걸 보면 진심인 것 같은데?
대사관 측에 물어보니 정부에선 브론즈 등급 플레이어 하나보다 이과수 폭포의 가치가 훨씬 높다고 판단했단다.
“고난이도 게이트가 또 나타날지 모른다고 하네요.”
“뭐, 다행이네요. 별말이 없다니.”
군주의 자질을 가진 녀석을 못 알아보고 내 비위를 맞추는구나.
후일 아르헨티나가 이 판단을 얼마나 후회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참, 대사관에서 게이트 폐쇄 기념 파티를 준비하고 싶답니다만.”
“그냥 가죠.”
“대사관에는 협회 일정이 있다고 둘러대겠습니다.”
악역을 자처하겠다는 한수창의 말.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필요는 없는데 고맙구먼.
엔리케 가족이 모든 수속을 밟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스승님, 그 꼬마는 누구에요?”
“인사해라. 새 길드원.”
나는 엔리케를 슬쩍 떠밀었다.
“꼬마 아니다!”
“와, 너무 귀엽잖아요!”
지영이가 선뜻 다가오더니 엔리케를 안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탓에 지영이의 품으로 쏙 들어가 버린 녀석.
“이, 이러지 마라.”
“몇 살이에요?”
“14살.”
“보기에는 10살 정도인 것 같은데.”
“놔라, 이 아줌마야!”
“아줌마아~? 아무래도 이 누님이 체계를 알려 줘야겠네.”
지영이가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으음, 거절했다간 나한테 엄청 따질 기세군.
“그래. 잘 알려 줘라.”
“이, 이건 아니다, 길드장님.”
“호호, 누나 손만 꼭 잡고 따라와.”
질질 끌려가는 엔리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고개를 돌려서 외면했다.
“우리 아이를 환영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다행히 엔리케의 부모님은 별말 없이 넘어갔다.
지영이가 좀 서글서글한 인상이긴 하지.
“가족이 머무를 장소는 금방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엔리케가 안 비뚤어지게만 해 주세요.”
“그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죠. 오히려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바벨탑이 생긴 이후로 없어져 버린 언어의 장벽.
일에 적응만 하면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도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끌벅적한 신입 소개를 끝낸 후, 엔리케의 스펙을 확인했다.
엔리케 델토로
나이: 14
종족: 인간
능력: 메카닉
직업: 메카 어프렌티스
레벨: 131
*고유 능력 – 메카닉
마도공학 이해가 빠르다. 마력을 부여해서 기계를 강화시킬 수 있다.
*스킬
메카닉 컨트롤[3성]
메카 제작[2성]
메카 업그레이드[2성]
메카닉 트레이스[2성]
메카닉 강화[2성]
스킬이라고는 온통 기계와 관련된 것뿐이다.
일반적인 메카닉 능력 보유자라면 저 기술로만 레벨을 올리는 게 불가능하니 여러 스킬들을 덤으로 익혔을 텐데.
엔리케 녀석은 메카닉 외길만 걸었다.
“대단하군.”
“뭐가요?”
“외골수야, 아주. 메카닉 덕후네.”
“탑의 초대를 받기 전에도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덕후까지는…….”
“칭찬이야. 너무 싫어하지는 마.”
놀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진심이다.
엔리케가 벽과 길가에 배치한 총 중 일부는 구매한 게 아닌, 놈의 손으로 개조한 거다.
단순한 마력 부여에 그치지 않고 메카 개조 스킬로 총탄의 마력을 증폭시킨 것이다.
역시 기계 군주답군.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어.”
“뭔데요?”
“우리나라는 총기가 불법이야.”
엔리케가 어이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장난치지 말고요, 길드장님.”
“진짜라니까. 공기총이나 멧돼지 사냥용 엽총이나 제한적으로 쓸 수 있어.”
말문이 막힌 엔리케.
잠시 후.
“난 뭘로 탑을 오르라고요!!”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자식. 그렇다고 소리까지 지르냐?”
“당신만 믿고 한국으로 오라면서! 이게 뭐야!”
“다 생각해 둔 게 있어.”
2026년만 해도, 메카닉 능력 보유자들은 현대 무기에 마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하지만 기계 군주가 두각을 보인 이후, 메카닉 플레이어들은 다른 전투 방식으로 탑을 오르게 된다.
“갑주에 네 마력을 동기화하는 방식.”
“총기 대신 갑주에요?”
“응. 메카닉 플레이어라고 해서 근접전을 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
“괜찮은 아이디어이긴 해요. 그래도 공격 수단이 없는데.”
“마나 스톤을 건틀릿 같은 곳에 연결해서 집중. 구체 형식이나 일거에 방출하면 되지 않겠어?”
엔리케는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회귀 전.
타이탄이 아닌, 맨몸으로 전투를 벌일 때 기계 군주가 사용했던 장비다.
히어로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지.
“가능성은 있겠네요.”
“그렇지?”
“마석 소모가 엄청나겠지만.”
“소모형 말고 충전식으로 하면 돼. 마나 엔진도 운용하고.”
“그럼 출력이 떨어질 겁니다만?”
“엔진으로 생성 가능한 마나로는 구체형, 일격필살용으로 소모형 마나 스톤을 쓰면 되지.”
“오, 오오오!”
엔리케는 환호성을 질렀다.
내 아이디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정확히 말하면 회귀 전의 엔리케가 사용했던 걸 그럴싸하게 풀어낸 거지만.
“길드장님, 마나 스톤이랑 갑주 좀 얻어 주세요.”
“너한테 빚으로 달아 둘 거다.”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요.”
엔리케의 눈동자 위에 감도는 강렬한 열망.
얘가 빚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먼?
핑 레이를 영입한답시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썼지만, 골드 문에서 투자받은 돈 대부분을 밀어 넣었기에 여유가 있었다.
녀석한테 들어간 금전에 비하면 엔리케가 요구하는 것 정도는 티끌 정도.
“네가 원하는 걸 구해다 주지.”
“고맙습니다.”
“그 전에, 나도 부탁 하나만 하자.”
훈련장 한쪽에 비치된 인형들.
영수 형님이 다루는 인형 병기들이다.
“강화할 수 있겠나?”
“물론이죠.”
어디.
미래의 기계 군주가 어떻게 인형병기를 튜닝할지, 기대가 되는군.
* * *
엔리케의 새 장비를 맞춰 줄 겸,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약 200억.
게이트를 드나들면서 얻은 보상과 정부 지원금.
이과수 폭포와 부루섬에 열린 게이트를 폐쇄하면서 정부 차원으로 준 포상금도 있다.
미션 공략 중에 나온 재화 중 값어치가 낮은 것들을 꾸준히 팔기도 했으니.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을 여럿 구매하고도 이만큼이나 돈이 쌓였다.
분명 엄청난 금액이지만.
“모자라네.”
후- 먼저 한숨이 나왔다.
돈이라는 건 아무리 벌어도 밑 빠진 독처럼 계속해서 새어나가는 느낌이다.
최소 50억.
엔리케의 기량을 살리는 데 들어가는 금액이다.
갑주에 마력을 부여해서 메카닉 능력으로 개조하는 건 총기를 강화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투자 대비 효과야 확실하겠지만.
당장에는 뼈아픈 출혈인 건 부정할 수 없군.
“무얼 그리 고민하느냐?”
닉스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곁으로 다가왔다.
막 보던 드라마가 끝이 난 모양이군.
“돈이 많이 들어서.”
“그대한테 화폐가 더 의미 있는지 모르겠구나.”
“화석 더 모아야지.”
“원시종의 정수는 이미 다 포식한 것이 아니더냐?”
“맞아. 수각룡 정수만.”
수각룡, 혹은 수각아목의 정점에 선 존재, 티라노사우루스.
하지만.
원시종은 수각룡 외에도 여러 종이 있다.
브라키오사우루스 같은 용각룡(龍脚類).
트리케라톱스가 속한 각룡하목 등.
여러 종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의 숫자만 수백이 넘어가니까.”
“그 수백 종의 정수를 모두 포식할 수 있겠구나.”
“아니. 그건 또 아니고.”
각종의 정점에 달한 정수를 포식하면 하위 그룹의 공룡 화석은 쓸모가 없어진다.
원시종이 추구했던 궁극의 육체.
과거 그들이 완성시키지 못했던 최종 진화를 달성한 건, 회귀 전의 나였다.
“필요한 화석만 얻으면 돼.”
여러 공룡들의 화석.
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지.
멈출 생각은 없다.
드래곤하트나 만년설삼 같은 영약은 억만금으로도 구할 수 없다.
오히려 돈으로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 게 싸게 먹힌다고 봐야지.
“이제 쓸 만한 회계사도 구해야겠어.”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플레이어 협회의 도움과 회귀 전의 기억으로 자금을 운용했지만, 이제는 신경 쓸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길드도 설립했겠다.
앞으로는 번거로운 일이 늘면 늘었지, 줄진 않을 테니.
똑똑-.
“들어오세요.”
김영수가 쭈뼛거리면서 내 앞으로 걸어왔다.
“형님, 무슨 일로 오셨는지.”
“제 인형 병기를 손보는 중이지 않습니까?”
“아하, 휴가 좀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그런 건 눈치 보지 말고 말씀하세요.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명색이 길드면 회사랑 같은 거죠.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형수님이랑 따님한테도 안부 좀 전해 주시고요.”
저번에 기념품 사 갈 때도 느낀 거지만, 참 가정적인 사람이다.
마침 인형 병기를 손보려면 며칠 걸린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에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녀오시면 제대로 굴릴 겁니다.”
“허헛, 기대하겠습니다.”
김영수가 웃음을 머금은 채 떠나자, 닉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뭐.”
“그대에게도 가족이 있지 않느냐.”
“아, 할아버지?”
“다른 이들은 가족을 보러 가는데 그대는 늘 고독한 것 같아서.”
“고독은 무슨.”
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지금도 고향 집 근처에 있는 텃밭을 꾸리면서 살고 계신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셔서 건강 걱정할 필요도 없고.
회귀 전에도 2040년까지는 무탈하게 지내시면서 천수를 누리셨다.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 나선 할아버지를 한 번도 안 뵈었네.
연락이야 종종 드렸지만, 조만간 고향에 내려가야겠다.
“내가 안 모셔도 될 만큼 강한 분이야. 가끔 얼굴 비치든 해야지.”
“그대의 조상이니, 얼마나 강할지는 짐작이 가느니라.”
칭찬인지 욕인지 잘 구분이 안 가는군.
“근데 가족은 왜?”
“이 나라에는 고독사라는 무서운 죽음이 있더구나.”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예?”
“그대에게는 늘 가까이에 있어 줄 가족이 필요하니라.”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서 고독사가 언급될 이유가 없잖아!”
“어허, 잠자코 여의 금과옥조 같은 충고를 귀에 새기어라.”
박력 있는 닉스의 말에 강제적으로 입이 꾹 다물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원.
닉스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니 여가 그대의 가족이 되어 주겠다.”
설득력이 전혀 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비약이 심한 것 같은데.”
“불쌍한 계약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여가 봉사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여신님이 무슨 드라마를 본 건지 모르겠군.
“어서 여를 가족처럼 대하여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지금은 닉스의 장단에 맞춰 줘야겠군.
그럼…….
“할머니.”
빠악!
닉스의 극야가 내 뒤통수를 세게 가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