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스스스슷!
극야의 힘이 뭉친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쉼 없이 나온다.
대형 텐트를 꽉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옥상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정도면 50, 아니 120에 해당하는 출력이다.
총 200스텟 중 60%에 해당하는 엄청난 극야의 힘.
“역시 그대는 모두 계획이 있었구나!”
아니요.
그런 거 아닌데요.
내 몸뚱이를 극야와 일체화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큰 변화가 올 줄이야.
방출한 극야는 내 육체의 연장선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유자재로 형태를 변형하는 극야.
육체에도 적용이 가능할까, 했지만 형태가 변하지는 않았다.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기제군.”
억지로 극야를 퍼트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랬다가는 위험할 것 같아서 관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득을 봤어.
“상시 그 상태를 유지하면 극야를 마음껏 다룰 수 있겠구나.”
“그러면 물리력을 쓸 수 없어.”
[어둠의 육체]도 만능은 아니었다.
이매망량의 정수에서 추출한 스킬, [유체화]처럼 이 모습으로는 물리력을 쓸 수 없다.
스킬을 해제하자, 방출되었던 극야 중 상당수가 회수되었다.
수치상으로는 40 정도.
[어둠의 육체]를 사용하지 않아도 배 이상 늘어났지만, 조금은 아쉬웠다.
“이 감각을 잊지 말아야겠어.”
전신이 극야와 일체화되는 감각.
푹신푹신한 쿠션에 몸을 맡기는 느낌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밤이라.
닉스가 여신인데도 왜 저렇게 따뜻한 성정을 지녔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40에 해당하는 극야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또 수련을 해야겠군.”
예리함이 사라진 암흑 칼날.
극야의 방출량이 늘어나면서 컨트롤 난이도도 올라갔다.
“아직 멀었구나. 여의 힘은 그렇게 무르지 않도다.”
“말 안 해도 알거든?”
어휴.
난 한숨을 쉬었다.
실버 등급 승급전을 치르고 2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늘도 수련을 할 셈이더냐?”
“응.”
“게이트를 공략하거나 탑을 공략해야 강해지는 줄 알고 있건만.”
실버 등급에 올랐지만, 막상 31층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게이트 공략도 마찬가지.
바알과의 내기에서 이기려고 무리하게 게이트를 드나들었던 때가 무색하게도, 2주 동안 한 번도 게이트에 출입하지 않았다.
“지금은 얻어 낸 걸 소화할 시간이 필요해.”
공허의 거울.
몇 배로 증폭된 극야.
그리고 융합기공으로 만든 축지까지.
하나같이 ‘초월’의 영역에 맞닿은 강력한 힘이다.
회귀 전에도 이런 기예를 터득했더라면, 고신족을 하나라도 더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레벨을 하나 올리는 것보다 새로운 이능을 수련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스슷!
가볍게 손짓하자 파도치듯 전진하는 극야.
손가락을 퉁기자, 바닥에 깔려 있던 극야에서 칼날 10개가 솟구쳤다.
“호오, 이제 열까지 분화시킬 수 있게 되었구나.”
“다 수련의 성과지.”
극야의 출력이 늘어나면서 컨트롤이 어려워졌지만 나름대로 장점도 있었다.
이전에는 최대 다섯까지 나눌 수 있던 극야가 더 쪼개졌다.
막상 실전에서 활용하려면 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수련에 매진하던 중, 한수창한테서 연락이 왔다.
-저번에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자료 정리가 끝났습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뭘요. 메카닉 계열 플레이어는 많지가 않아서 어렵진 않았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플레이어를 조사하는 일.
한수창의 말과 달리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뻔히 예상이 되었다.
난 협회에서 넘겨준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얘는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빠르게 넘어가는 화면.
“무얼 찾는 게냐?”
“새 길드원.”
“꽤나 본격적이로구나. 한데 굳이 다른 나라에서 찾을 이유가 있더냐?”
“메카닉 능력 보유자는 많지가 않아서 말이야.”
[메카닉]은 마도 병기의 한계를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는 고유 능력이다.
현시점에서야 메카닉 능력이 크게 각광받지 못하지만.
마도 병기의 궁극이라고 불리는 ‘타이탄’이 지구에 보급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엔리케 델토로는 메카닉 능력을 극한까지 발전시킨 플레이어이자, 여섯 군주이기도 했고.
“그대가 흥미를 가질 정도의 인재라.”
“뭐, 잘될지는 몰라.”
엔리케 델토로는 고신족의 편에 선 인류의 배신자다.
회귀 전에 놈의 숨통을 끊었던 게 나였거든.
성공적으로 갱생(?)의 길에 들어선 핑 레이의 예시도 있으니.
다른 군주급 플레이어와 달리, 이 녀석은 나랑 비슷한 시기에 각성했던 후발 주자라서 설득의 여지가 있다.
르네 데이비스처럼 인간 말종이라면 모를까.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
“무엇이 말이더냐?”
“아, 인재를 다른 곳에 빼앗기면 곤란하잖아.”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대충 둘러댔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엔리케가 탈선하게 된 계기가 부모님의 죽음이었다.
아직은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일 터.
한참 동안 자료를 훑던 중.
-엔리케 델토로
나이: 14
거주 지역: 푸에트로이과수
고유 능력: 메카닉
각성 시기: 2025.4.21.
마도 병기 제작 및 운용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재. 산타페 갱단과 연관이 있다고 함.
“찾았다.”
익숙한 이름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 * *
갑작스럽게 정해진 아르헨티나 행.
“스승님, 저도 데려가야죠!”
“실버 등급 제한이 걸린 게이트잖아. 혼자 다녀와야지.”
대외적인 방문 목적은 아르헨티나의 유명 관광지인 이과수 폭포 근처에 생긴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이다.
마침 공략에 난항을 겪는 게이트가 하나 있더라고.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내 방문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지면 마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가면서 최소 몇 개월은 접근할 수 없으니.
아르헨티나에서 손꼽히는 관광지 운영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카를라가 입을 떼었다.
“그럼 훈련은요?”
“나 없는 동안 실버 등급 승급전이나 준비하고 있어.”
“알겠어요.”
“카를라야, 그렇게 납득하면 어떻게 해!”
“약속했으니까. 지키겠지.”
감정 없는 목소리.
저 말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데.
“스승님, 근데 핑 레이는 어디로 갔어요?”
“내가 시킨 일이 있어서.”
“아, 난 또, 저랑 훈련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줄 알았죠.”
헤헤, 하고 웃는 지영이.
대련할 때마다 핑 레이한테 졌으면서 말은 잘해요.
지영이의 능력은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
진동 결계를 포개어서 계수를 증폭, 공격용으로 써먹으려면 갈 길이 멀었거든.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현시점에서는 지영이가 핑 레이한테서 승리하긴 좀 어려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걸 보면 회귀 전의 아군이었던 ‘통곡의 벽’과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호호, 덕분에 기회가 생겼네요.”
엘렌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카를라의 마음을 돌이킬 만한 시간이 생겼다는 거겠지.
“뜻대로 하시죠.”
카를라를 영입하는 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다.
오히려 엘렌과 카를라 사이에 있던 앙금이 풀어지는 기회가 되면 좋겠군.
이번 아르헨티나행에는 생각지도 못한 동행자가 붙었다.
“현지의 안내는 제가 맡겠습니다.”
평소 입고 다니던 정장 대신, 가벼운 복장으로 찾아온 한수창.
“팀장님, 안 바쁘세요?”
“이번 아르헨티나행. 저번에 부탁하신 자료 조사와 관련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거야…….”
나는 뒷말을 삼켰다.
“진호 님이 귀찮아하실 일은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그거야 감사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밀린 일이야 다녀와서 야근 좀 하면 금방 해결되겠죠.”
한국에서 아르헨티나까지는 비행기로 약 25시간.
직행이 없어서 경유지를 한번 들러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많이 들었다.
돈 많이 벌면 전용기부터 하나 사든 해야지.
첫 번째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향신료 제도의 영웅을 환영합니다.”
한국 대사관에서는 내 방문을 듣고 환영회까지 마련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아르헨티나 고관들도 날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나.
귀찮은 건 질색이지만, 아르헨티나의 인재를 빼 가야 하는 입장이니 얌전하게 환영회에 참여했다.
“이과수 폭포는 아르헨티나의 자랑이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껄껄! 향신료 제도의 영웅이 나섰으면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지.”
“다 같이 건배나 합시다!”
게이트를 공략한 것도 아닌데 환영회라.
‘향신료 제도의 영웅’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내 유명세를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고 하는 수작질이 훤히 보였다.
아르헨티나 관료 일부는 닉스에게 관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레이디. 부디 에스코트할 기회를 제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손을 내미는 사내.
닉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여신님한테서 흘러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춤을 신청했던 사내들은 한두 마디를 더 꺼낸 후에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여신님,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뭐가 말이더냐.”
“에스코트한다잖아.”
“후후훗, 여를 모실 영예는 오직 그대에게만 허락되었느니라.”
나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 영예는 저 친구들한테도 좀 나눠 주고 싶은데.”
“여를 배알하려면 공물이 필수이거늘.”
닉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치들을 보아라. 빈손으로 여의 앞에 나아오지 않았더냐?”
나는 한숨을 짧게 쉰 후, 연회장에 비치된 케이크 조각을 내밀었다.
“보아라. 이 자리에서 예의를 아는 것은 그대뿐이지 않느냐.”
“부탁이니까 조금 작게 말해 줘.”
닉스의 아우라와 갭이 느껴지는 발언.
누가 들으면 어쩔까 걱정이 되었다.
대사관에서 준비한 일정을 소화하고는 곧바로 푸에트로이과수로 넘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수창은 만리타향에서도 쉽게 길을 찾았다.
내 목표는 장차 ‘기계 군주’라는 이명으로 불릴 플레이어, 엔리케 델토로.
엔리케가 머무는 곳은 푸에르토이과수에서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
렌트한 지프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중.
한수창이 떨떠름한 기색을 띠었다.
“이쪽 길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지도랑 다릅니까?”
“아뇨. 저걸 좀 보십쇼.”
비포장도로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는 총들.
막대 위에 세워 둔 총들은 마치 장식품처럼 쭉 늘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요.”
“예?”
“총에서 마력이 느껴집니다.”
후일 기계 군주라고 불리는 플레이어.
엔리케의 손길이 닿은 무기들이 분명했다.
그 순간.
“거기까지. 더 이상 접근하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