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게 맞는 건가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지영이의 목소리.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어.”
“아니. 제가 실수하면 다 죽는 거잖아요.”
“죽기야 하겠어? 위험이야 하겠지.”
바다를 걷는 일행.
워터 워크 스킬이나 튜토리얼의 [워터 마크] 같은 소모품을 사용한 게 아니다.
일행의 몸을 지탱해 주는 건 지영이의 진동 결계.
프리즘처럼 빛나는 육각형 타일이
촤아아악! 높이 솟아오른 파도가 진동 결계 바닥을 강타한다.
가볍게 흔들리는 결계.
지영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스, 스승님, 더 이상은…….”
하얗게 질린 얼굴.
눈에는 습기가 가득 찬 게, 금방이라도 넘쳐 버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몸을 돌이켜서 주저앉은 지영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지영아, 난 너를 믿는다.”
“스승님?”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고 해도, 내가 대책 하나 준비 안 했겠어?”
사실은 그런 거 없다.
바다에서 심해인들과 전투를 벌이는 건 나도 부담스럽거든.
홀로 싸우는 거라면 괜찮지만, 팀원들까지 지키면서 섬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일행을 데리고 해변으로 돌아가는 것 정도겠군.
하지만.
“저도 스승님을 믿어요.”
지영이는 내 말을 믿고 다시 일어섰다.
여전히 떨리는 두 다리.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면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했다.
“후욱, 훅.”
그럼에도.
호흡을 고른 지영이는 침착하게 결계를 이어서 전개했다.
“킥킥.”
“키키킥.”
심해인들이 파도를 뚫고 도약. 결계 위로 올라왔다.
“겁도 없이 어디에 오는 거냐?”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촤아악!
날선 손톱이 심해인들을 찢어발겼다.
[메탈 반사 장갑]은 내 육체로 인식되는 손톱에도 적용되었다.
원래는 방어용 스킬이지만, 날카로운 손톱에 덧씌우니 예기와 내구도 모두 올라갔다.
한층 더 강화된 손톱으로 펼친 무공.
결계에 올라탄 심해인들은 수십 갈래로 찢겨져서 바다로 추락했다.
“아, 힘이 과했네.”
“그놈의 정수 타령은 여전하구나.”
“원래 근본을 잊으면 안 돼.”
“참 일관적인 사내로다.”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닉스.
그녀의 손짓에 맞춰 움직인 극야가 바다로 낙하 중인 심해인들의 살점을 휘감았다.
“칠칠맞은 계약자를 보살피는 것도 여의 책무일 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난 웃음기를 드러낸 채로 심해인의 사체를 포식했다.
[프리 워터]
등급: ★★
분류: 패시브
물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심해인의 정수에서 추출한 스킬.
물에서 호흡도 가능해졌으니, 수중 전투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어졌다.
팀원들이 문제라서 그렇지.
쿵! 쿵!
결계를 공격하는 심해인들이 늘어났다.
물 위로 머리를 내밀더니 아래에서 삼지창을 찌르거나.
결계 위에 난입해서 지영이를 노렸다.
“너희는 지영이를 지켜 줘.”
나는 그 말을 꺼낸 직후, 바다에 뛰어들었다.
[프리 워터가 적용됩니다. 물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가미가 적용됩니다. 물에서 호흡이 가능합니다.]
수면 아래에는 심해인이 바글바글했다.
툭 튀어나온 흰 눈자위 수백이 나를 바라본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군.
탐욕의 가호로 발바닥 근처의 물을 굳혔다.
튜토리얼 때 네스를 상대했던 요령과 비슷하지만.
이젠 마력 양이나, 가호를 다루는 솜씨 모두 일취월장해 있었다.
심해인들은 내 주위를 빙빙 돌 뿐,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날 상대로 간을 보시겠다?
“멍청한 놈들.”
[아르스 게티아 - 내장 스킬: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사용합니다.]
바다를 뒤흔드는 암흑 마력의 파동.
심해인들의 결계도 내부 타격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수백 단위로 찢겨 나간 심해인들.
“물고기 새끼들아, 와라.”
되다 만 외신 추종자 새끼들이.
네놈들이 누굴 간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나?
“킥킥킥!”
“키키키킥!”
몰려드는 심해인들을 보며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 * *
심해인의 거처는 해변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팀원 모두 평범한 사람의 신체 능력을 초월한 플레이어들.
평지였으면 1시간 안에 도달했겠지만, 바다 위에 결계를 치고 전진하느라 몇 시간이나 걸렸다.
“지영, 괜찮으냐?”
“으, 으응. 멀쩡해.”
지영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넌 쉬어라. 영수 형님이 백업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전 괜찮아요.”
“네가 제일 애썼어. 그러니까 좀 쉬어 둬.”
진동 결계가 아무리 가성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걸 장기간 유지하려면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된다.
거기에 바다라는 생소한 환경까지 겹쳤으니.
당장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끝이 없군.”
핑 레이가 이를 갈았다.
해변가의 전투.
바다를 건너면서 천 단위로 몰려드는 심해인을 쓰러트렸다.
말이 브론즈 등급이지, 놈들의 전투력은 실버 등급 플레이어나 무난하게 쓰러트릴 정도로 높았다.
팀원들의 기량이 뛰어나서 망정이지.
한데, 안개를 뚫고 섬에 도달하니 지금까지 도륙한 심해인들과 비슷한 숫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적, 많아.”
카를라도 보기 드물게 피로감을 표출했다.
[심해의 주술사]
[쇼거스]
붉은 망토를 두르고 오른손에 든 지팡이로 중심을 잡은 심해인.
그 앞에는 사슬로 묶어 놓은 이계의 괴수, 쇼거스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일행을 노려보았다.
심해인들은 훈련받은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진형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이러니까 클리어를 못 했지.”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평범한 브론즈 등급 플레이어라면, 이 섬에 도달하긴 커녕 해변에서 몰살당했을 거다.
유망주들이라고 해도 바다에서 전멸했겠지.
“하던 대로 하자.”
탁 트인 공간.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물속에서야 화염과 빛 속성 마나를 재배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불 맛부터 보여 주지.”
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곧바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구현.
심해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위에서 폭발시켰다.
[외신의 기운이 마법에 간섭합니다.]
[솔라 익스플로전의 위력이 40% 감소합니다.]
해변이나 바다에서 전개했을 때보다 줄어든 위력.
데모닉 파워도 사용하지 않았기에, 폭발 진원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심해인들은 즉사하지 않았다.
“키키키킥. 제물에 어울리는 자다.”
“키킥. 산 채로 잡아라.”
심해의 주술사가 나를 가리켰다.
“누가 잡혀 준다고 했나.”
멍청한 놈들.
전력 차이도 모르고 제물 운운을 하다니.
나를 제물로 쓰려면 치명상은 못 입힐 거 아니야?
“잘됐군요. 팀장님이 앞서시죠.”
“너를 제물로 던져 주는 방법도 있다만.”
“진심이십…… 아닙니다.”
핑 레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걸 아직도 모르나 보네.
“Tekeli-li!!”
심해인들은 사슬에 매여 있던 쇼거스를 해방했다.
보라색 몸뚱이에 초록색 눈 여러 개를 달아 놓은 괴물.
둥근 입 안쪽에 소용돌이 형태로 자리를 잡은 이빨이 맹렬하게 회전한다.
두 팔로 지면을 뜯어 버릴 것처럼 붙들고는 앞으로 나오는데, 슬라임을 닮아서 점액질로 된 몸뚱이가 지면에 기다란 선을 그었다.
치이익!
놈이 움직인 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쇼거스와 밀착하지 않게 조심해. 산성 액체니까.”
“그러면 원거리 공격으로 쓰러트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녀석이 나를 그대로 둘 것 같지는 않은데.”
심해의 주술사가 지팡이를 하늘 위로 추켜세운 채 입술을 끊임없이 달싹였다.
솔라 익스플로전의 파괴력을 감소시킨 것도 저 녀석 소행이겠지.
천안(千眼) 너머로 비쳐지는 마력의 양이 심상치 않다.
전면에는 쇼거스와 심해인들.
그 뒤에서는 강력한 스킬을 준비 중인 주술사라.
위력이 감소된 솔라 익스플로전으로는 저 벽을 뚫어 내고 심해의 주술사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바르바토스의 철퇴는 쿨타임이 몇 시간이나 남았고.
“어쩔 수 없군.”
“네?”
“여기서 좀 버티고 있어.”
나는 지면을 박찼다.
운류보와 전력 질주를 동시에 운용, 심해인들 집단 근처까지 거리를 좁혔다.
“Tekeli-li!!!!”
쇼거스의 몸뚱이가 좌우로 갈라지더니 비상식적으로 큰 입이 되었다.
촘촘히 박힌 이빨.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쇼거스의 몸뚱이를 스쳐서 지나갔지만 뒤이어 2파, 그리고 3파가 쏟아졌다.
“저 팀장이라는 작자가!”
핑 레이가 한발 늦게 도약하면서 날 커버하려 했고.
카를라는 묵묵히 낫을 휘둘렀다.
좀만 버티고 있으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는구먼.
[축지(縮地)를 사용합니다.]
융합기공으로 만든 두 번째 스킬.
발을 내딛는 순간, 100미터 넘게 떨어진 심해의 주술사와의 거리가 1미터로 좁혀졌다.
[공허의 장막이 축지에 간섭합니다.]
[마법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축지에 대한 간섭이 무효화됩니다.]
[정상적으로 이동됩니다.]
축지는 공허의 영역에 닿은 힘도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키키키킥!?”
“내가 그렇게까지 반갑나.”
한 걸음 만에 심해의 주술사 곁으로 이동.
놈이 지팡이를 휘두르려는 찰나, 내 손톱이 먼저 번쩍였다.
백수제왕무 2초식.
산군파랑조가 주술사의 지팡이와 몸뚱이째로 찢어발겼다.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갑작스러운 침묵.
심해인과 쇼고스, 그리고 팀원들마저도 당황 섞인 눈빛을 보냈다.
“왜. 머리부터 치는 게 전쟁의 기본이잖아.”
심해의 주술사는 까다로운 적이다.
회귀 전에도 몇 번 상대해 봤는데 온갖 주술에 능하며 외신의 힘을 빌린 마법도 다룰 줄 안다.
원거리 공격을 퍼부으면 족족 반격하고.
아주 더러운 놈이란 말이지.
공허의 장막 때문에 [블링크] 같은 스킬을 사용했다가는 역으로 당했을 거다.
현 수준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기예, 축지.
융합기공 덕분에 아무 페널티 없이 펼칠 수 있어서 주술사를 쉽게 쓰러트렸다.
[심해의 주술사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고대]
[포식한 정수: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체력 + 7]
[마력 + 20]
[스킬 - 마엘스트롬이 추가됩니다.]
[마엘스트롬]
등급: ★★★
분류: 액티브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든다. 물이 있는 장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장소 제약이 있지만, 위력만큼은 4성급 스킬에 버금가는 강력한 수계 마법.
바다에 있는 심해인들을 이미 몰살시킨 터라 실전에서 활용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주술사를 쓰러트린 직후.
“Tekeliii???”
“Tekeli-li!!!”
쇼거스 무리가 눈을 좌우로 돌리면서 기괴한 소리를 내뱉었다.
주술사의 암시가 사라졌으니 당황했겠지.
쇼거스라는 종족은 지성체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특정한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기에, 심해의 주술사가 고유 음파로 쇼거스를 지배했던 것.
그 당사자가 죽었으니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최면이 깨진 쇼거스는.
“Tekeli-li!!!”
콰직- 옆에 있는 심해인을 집어삼켰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난 제단에 걸터앉은 채, 심해인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섬의 안개가 모두 걷히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