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환한 빛이 사그라진 후.
바닷물로 가득했던 공간이 움푹 파였다.
물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크레이터 위로, 까맣게 타 버린 심해인의 사체가 널려 있다.
“보다시피 적을 해치웠지.”
“이건 상식을 넘어선 위력이잖아요.”
“어리석군. 여자, 언제부터 저 팀장이라는 자가 상식 안에서 판단이 되었지?”
핑 레이의 힐난에 지영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근데, 저거 욕하는 거 아닌가?
“불결한 암흑 마법에 버금가는 위력이로구나.”
“아니, 미리 결계를 타격해서 이만큼인 거지. 바르바토스의 철퇴가 좀 더 세.”
심해인들의 바다에는 강력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
쿨타임이 12시간인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먼저 전개한 건, 암흑 마나가 심해인의 결계에 더 효과적이라 그렇다.
솔라 익스플로전만 사용했으면 이만큼 효과가 안 나왔을걸?
“적들의 공세는 이제 시작이다. 마음 놓지 마.”
푹 파인 크레이터로 진입하는 심해인들.
폭발에 휘말린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키킥.”
“킥킥킥.”
기분 나쁜 웃음소리군.
동족들이 숯덩어리가 되었는데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그거지?
부스럭- 해변에 있는 나무들이 마구 흔들린다.
“키키킥.”
“킥?”
등 뒤로 나타난 심해인들.
“흉물들에게도 지혜가 있구나.”
“팀장님, 후방의 적은 많지 않을 것 같으니, 제가 맡겠습니다.”
김영수가 인형들을 후방으로 배치했다.
과연.
심해인은 바다가 더 친숙하다.
놈들의 생김새를 보고 전략적인 판단으로 이어 가다니.
[군단 지휘] 재능 소유자는 역시 다르구먼.
심해인들이 크레이터를 넘어서는 순간.
[공간 압축]
[더블 대시]
카를라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심해인들 앞에 쇄도했다.
“비린내는 싫어.”
그녀의 손에 들린 낫이 기다란 궤적을 허공에 그렸다.
서걱!
초록색 피가 은색 궤적을 따라 허공을 수놓는다.
“얕아.”
뒷걸음치는 카를라.
삼지창 여러 개가 간발의 차이로 그녀가 서 있던 곳을 쑤셨다.
“킥킥킥킥.”
목이 반쯤 베인 심해인이 히죽 웃었다.
“상대는 외신 숭배자다. 공간 계열 스킬에 저항력이 있어.”
“……확인.”
카를라의 능력도 만능은 아니다.
공간 조작으로 ‘삭제’하거나 흘려보낼 수 있는 에너지도 무한하지는 않았다.
외우주의 존재들한테는 위력이 반감되기도 하고.
“미제의 후예답게 잔재주 따위에 의존하니 그런 것이다.”
핑 레이가 입술을 비죽였다.
“국가 비하 금지.”
“아, 아니. 이건…….”
“거기서 한마디만 더 꺼내 봐.”
으으- 하고 신음을 흘린 핑 레이가 분신들을 전개했다.
난 팔짱을 낀 채 전투를 지켜보았다.
심해인들은 강하다.
외신의 가호 덕에 속성 마법에 강한 저항력을 보유했고.
언데드처럼 머리나 심장을 확실하게 부수지 않으면 재생까지 했다.
브론즈 등급에 어울리지 않는 강력한 괴물.
이 게이트는 공략 중에 팀원들의 안위를 살필 만큼 만만하지 않다.
심해인들을 상대하는 걸 보면 견적이 나오겠지.
[초열검&당랑검]
길이가 다른 검 두 자루가 번뜩인다.
이글거리는 화염.
그리고 초록색 바람.
극양(極陽)의 기운을 지닌 초열검, 그리고 베는데 특화된 당랑검의 힘을 극대화시켜 줄 마법검이다.
마법으로 강화된 두 검이 심해인들을 도륙한다.
치이익!
초열검의 열기가 심해인의 재생을 가로막고, 바람 속성으로 절삭력이 강화된 검은 심해인의 목덜미를 깔끔하게 베었다.
“하압!”
“합!”
분신들의 연계도 깔끔했다.
원본의 1/3.
각 개체의 능력은 심해인보다 조금 떨어졌지만, 합격술로 다수의 적을 몰아냈다.
“으으, 정말이지. 개구리는 질색인데.”
지영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유 능력을 전개했다.
다방면으로 펼쳐진 진동 결계.
심해인 무리의 움직임을 원하는 대로 유도.
괴물들이 삼삼오오 흩어지자, 진동 결계를 양옆으로 포개었다.
서로의 영역 안에 들어가자 증폭되는 진동.
“키키킥?”
“킥킥!”
심해인들은 뒤늦게 병장기를 휘둘렀지만, 공명 현상을 일으킨 결계를 깨트리진 못했다.
우드득-!
살점과 뼈가 짓눌리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진 심해인 무리.
역시 통곡의 벽은 달라도 달라.
태세를 정비한 카를라가 재빠르게 빈자리를 메웠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액셀러레이트]
[공간 압축]
서걱!
하늘 위로 떠오르는 심해인들의 머리.
낫에 마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심해인들의 등 뒤에 공간을 조작.
압축시켰다가 해방하면서 파생된 힘으로 심해인들이 낫 앞에 스스로 목을 내밀게 만들었다.
“공간 조작 능력을 저렇게 활용할 줄이야.”
“다 팀장님한테 배운 것.”
응? 나는 그런 거 안 알려 줬는데.
정면으로 몰려드는 괴물들은 세 사람의 공세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해변 측 괴물들도 마찬가지.
[인형 조종술]
[분대 지휘 – 방어진]
인형들은 진을 형성한 채로 심해인들의 공격을 버텨 냈다.
“후훗, 바람직하구나.”
닉스의 손짓에 맞춰 출렁이는 극야.
진한 어둠은 심해인의 목덜미에 파고들더니, 내부에서 퍼지면서 신체를 파괴했다.
일격으로 심해인을 쓰러트릴 화력이 안 나오니 다른 방법으로 바꿨구나.
사시나무처럼 떨던 심해인이 풀썩, 하고 쓰러졌다.
내공 안배까지 확실하군.
암영추혼검을 펼치면 심해인쯤이야 일격에 두 동강 낼 수 있지만, 다음 전투를 대비해서 아끼는 모양이다.
한 시간 넘게 지속되는 전투.
“빌어먹을. 끝이 없어.”
핑 레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카를라도 꽤 체력을 소모한 듯, 움직임이 느려진 상태.
“후욱, 훅.”
능력 효율이 높은 지영이도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유일하게 지치지 않은 건 닉스 뿐.
“참으로 유해한 족속들이로다.”
닉스에게 있어, 극야를 다루는 건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극야를 이렇게나 장시간 동안 다루면 상당히 피로도가 쌓였겠지.
이 정도면 심해인과의 전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으니.
“끝을 내야겠군.”
“스승님, 그게 가능해요?”
“게이트야 못 끝장내도. 공격 정도는 멈출 수 있지.”
[데모닉 파워를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강화된 마력.
솔라 익스플로전을 시전하니 마나가 재배열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더블 스펠 같은 스킬을 익히면 딱인데, 아쉽구먼.
완성된 구체를 바다 위로 투척하자 콰아아앙- 하고는 폭발을 일으켰다.
첫 공격보다 2배가량 넓어진 폭발 면적.
위력은 훨씬 강했다.
직접적인 폭발 범위에 있던 심해인들은 아예 잿가루로 화했고.
충격의 여파에 휩쓸린 놈들도 피떡이 되었으니.
[레벨이 올랐습니다.]
충격에 휩쓸린 심해인들이 원체 많다 보니, 경험치가 확 올라갔다.
“이제 시작이야.”
난 연달아 솔라 익스플로전을 시전했다.
폭발의 여파로 피어난 연기가 해변 근처를 시커멓게 물들였으니.
지속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즈음에는 심해인의 그림자조차도 찾기가 어려웠다.
“팀장님, 적들이 물러납니다.”
카를라가 담담한 투로 이야기했다.
지영이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저걸 보고도 달려들었으면 미친 거야.”
“왜 그렇게 한숨을 쉬냐?”
“스승님 때문이죠. 우린 그렇게 죽어라 힘냈는데, 스승님 혼자 정리했잖아요.”
“나 혼자는 무리였어.”
“빈말하시기에요?”
“리스크를 동반한 기술을 사용해서 가능한 거다.”
모든 능력치를 한 스텟으로 전환하는 스킬, [데모닉 파워].
강력한 만큼 단점도 명확하다.
마력으로 모든 능력치를 치환하면 방어가 취약해지거든.
“다 팀원들을 믿어서 할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이런 수는 쓰지도 못했어.”
“스승님께서 나를 그렇게까지 믿어 주시다니!”
지영이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렇게까지 감동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베이스캠프부터 만들자.”
짝짝짝!
나는 손뼉을 마주치며 지시를 내렸다.
* * *
게이트 공략은 꼭 하루 안에 끝나진 않는다.
플레이어들이 입장한 순간부터 임계치가 올라가지 않기도 하고.
[심해인의 거처]처럼 규모가 넓은 게이트는 단기간에 공략이 불가능해서다.
공략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베이스캠프 구축이 필수.
깡! 깡!
김영수의 인형들이 능숙하게 천막을 설치했다.
“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뭘요.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죠.”
김영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핑 레이 녀석한테 시켰으면 “흥, 그런 하찮은 일 따위를!” 하고 말했을 거다.
나머지 두 사람은 요령이 없고.
“형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자동 알람과 결계석 설치까지 마치고는 본격적으로 게이트 내부 탐사에 나섰다.
먼저는 내륙을 먼저 탐색했다.
“여긴 막혀 있네.”
지영이가 낭패감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안가에서 안쪽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다란 절벽이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그럼 뒤로 돌아온 심해인들은 어디서 나온 걸까?
해안가를 탐색하다 보니 금세 답이 나왔다.
“팀장님, 여기 자국.”
카를라가 낫으로 모래사장을 가리켰다.
물갈퀴 모양으로 난 발자국.
꽤 많은 숫자다.
“후방으로 돌아온 녀석들인가 보군.”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향신료 제도의 비극’의 원인인 [심해인의 거처] 게이트.
내 기억에도 이 게이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부루 섬이 전 세계에 알려진 건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였으니.
이번에는 직접 부딪치면서 알아내야 한다.
내륙 탐사는 보기 좋게 실패.
두 번째 탐색 장소는 바닷가다.
“바다에 들어가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영이가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시커먼 바다를 흘겨보았다.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야.
꼭 들어가야만 바다를 관찰할 수 있나?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악마의 눈의 흔적이 거울에 비쳐집니다.]
[혼에 기록된 상태로 변합니다.]
[지속 시간은 60분입니다.]
드드드득!
누가 머리를 양옆으로 쭉 잡아당기는 것 같다.
수배로 팽창하는 머리.
팀원들의 눈빛에서 경악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있어 봐.”
나라고 해서 이런 형태를 유지하고 싶진 않단 말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악마의 눈의 능력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
[공허의 거울의 효과로 마안의 능력이 강화됩니다.]
[천안(千眼) → 천리안(千里眼)]
[더 먼 곳도 내다볼 수 있게 됩니다.]
깊은 물 속도 꿰뚫어 볼 수 있는 마안으로 업그레이드!
난 어둠으로 물든 바다 속을 관찰했다.
“안에는 없어.”
“그럼 저 흉물들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이더냐?”
“저 바다가 아닐 뿐이지.”
나는 고개를 위로 추켜세웠다.
어둠으로 물든 바다 너머에 아른거리는 짙은 안개.
천리안으로 회색 장막을 꿰뚫고 내부를 살펴보니, 섬 하나가 보였다.
괴이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어림잡아 수천이나 되는 심해인들이 도시에 머무르는 장면이 천리안에 포착되었다.
“찾았다.”
나는 [공허의 거울]을 해제했다.
목적지를 발견했으니.
이젠 넘어갈 방법만 찾아내면 된다.
“저 바다를 넘어서 심해인들의 거처를 공략해야 한다니. 정말 쉽네요.”
“그렇지?”
“이건 반어법이잖아요, 스승님!”
“걱정하지 마. 넘어갈 방법은 있으니까.”
나는 흐뭇한 눈빛으로 지영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