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35화 (135/300)

135화

촤아아!

하얀 크루즈가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제공한 배.

선체가 파도와 부딪쳐도 큰 충격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건 완전 놀러 온 기분이네.”

난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 여기 완전 좋아요! 난 이거 TV에서만 본 건데!”

프로선베드에 누운 지영이는 인도양의 태양빛에 피부를 태우며 호들갑을 떨었고.

“여기. 술 한 잔만 더 주시겠습니까?”

핑 레이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면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 여긴 돈 많이 벌면 가족들이랑 꼭 와야겠습니다.”

김영수도 서비스로 제공되는 와인을 홀짝이며 기분에 취해 있었으니.

“…….”

카를라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래. 정상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카를라야, 이리 와서 같이 태닝하자~!”

“어, 나는.”

“에이, 매일 훈련하느라 햇볕도 잘 못 받잖아. 이럴 때 빛이라도 쐬어 줘야 비타민D가 생겨!”

“그, 그게.”

지영이가 카를라의 팔을 붙들더니 크루즈 안으로 연행했다.

못난 제자를 둬서 미안하다.

속으로 카를라에게 사과하고는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그대 빼곤 다들 들떴구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쿨럭.”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기침.

평소에 입던 옷과 달리, 이번에는 검은 래시가드를 입었다.

아니.

이건 좀…….

“그대여, 혹 멀미라도 하는 것이더냐?”

닉스가 걱정하는 기색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여신님.

“잠깐 놀라서 그런 것뿐이야. 괜찮아.”

곧바로 평온한 척했다.

닉스 때문에 놀랐다는 걸 들키면 얼마나 약 올릴지 짐작도 안 갔다.

“그런데 들뜬 건 여신님도 마찬가지 아니야?”

“참 아름답지 않느냐. 세상 온갖 더러움을 포용하는 바다의 웅장함이란.”

“아름다운 건 둘째 치고. 스타일이 좀 변했네.”

“그대의 제자의 수작이니라.”

아, 그러면 납득이지.

감사, 아니 쓸데없는 짓을 했군.

“난 조금 생각이 다른데.”

“호오, 그대가 바다를 보고 느낀 감상도 궁금하구나.”

“세상의 더러움을 포용하는 건 바다보다 밤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내 말을 들은 닉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그, 그건 바다를 말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허물을 가려 주고 포용한다는 표현은 밤에 더 어울리지 않나.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데, 닉스가 격하게 반응했다.

“난 생각이 다르다고 했어.”

“그대는 참…….”

눈을 흘기는 닉스.

여신님의 표현을 지적한 것뿐인데, 괜히 진노를 사 버렸군.

“바람 좀 쐬고 있어.”

“어디를 가려느냐?”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난 휴대전화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런 곳에 와서도 탑을 등반하려느냐.”

“목적지까지는 시간도 걸리는데 쉬고 있을 순 없지.”

게이트 공략 전.

팀원들이야 게이트 공략전에 컨디션이라도 관리하랍시고 풀어놨지만, 나까지 마음을 놓을 순 없다.

“바알하고 한 내기에서 이기긴 해야지.”

“그게 아니어도 늘 바쁘게 보내는 것 같다만.”

“이 정도면 충분히 쉬었어.”

차량처럼 좁은 공간에서는 접속 불가능한 바벨탑 어플.

널찍한 크루즈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럴 줄 알고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임시 자격증도 발급받았으니.

“부루섬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아, 미스터 유. 2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25층이나 한 번 돌고 와야겠네.

아이언 슬러그랑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리면서 경험치라도 얻어야지.

시간 맞춰서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오자, 인도네시아 정부 소속 요원이 나를 맞이했다.

“저, 미스터 유. 목적지에 곧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가는 여기까지. 다들 준비합시다.”

“벌써 끝이에요? 아직 섬에 다가가려면 좀 남았잖아요.”

“게이트가 있는 쪽으로는 배를 댈 수 없어. 보트 타고 갈 거니까 준비해라.”

“네에.”

지영이가 아쉬운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반면 옆에 있던 카를라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데, 피곤한 기색이 살짝 아른거렸다.

카를라가 감정을 표출하다니.

얼마 못 본 진귀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투명한 바다처럼 아름다운 그대의 눈동자를 보니 제 마음도…….”

빠악!

“커흑. 어떤 놈, 아. 팀장님.”

“뒈지기 싫으면 준비해.”

내가 없는 사이에 수작질이나 부리고 있을 줄이야.

핑 레이 녀석을 게이트의 밥으로 던져 주고 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 * *

부루섬 북부 지역에 생성된 게이트.

인근에 항구가 있지만, 말이 좋아서 항구지 작은 어선을 댈 수 있는 규모라서 크루즈가 정박할 수 없었다.

작은 보트에 타서 이동.

육지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돼서 게이트를 마주했다.

“호우, 여기가 그 한국인들?”

인도네시아 출신 플레이어가 과장된 제스처를 취했다.

상당히 강한 마력을 품고 있군.

홍윤수나 신준석보다는 한 수 뒤처지지만, 그래도 실력자인 건 확실했다.

“인도네시아의 랭커인가?”

“한국인이 날 알아봐 주다니 영광이야. 라또르라고 한다.”

갈색 피부의 사내는 리듬이라도 타는 듯, 흥이 가득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음, 기억에 없는 이름인 걸 보면 멸망의 시대에서 얼마 못 버티고 사망했거나 성좌에게 귀순한 모양이다.

“반겨 주니 고맙군.”

막 들은 이름을 흘려들으며, 녀석이 그랬듯 편하게 대꾸했다.

“게이트를 잘 부탁해. 부디 살아서 돌아오기를 빌지.”

“근데 당신 같은 랭커가 왜 여기에 있지?”

“브레이크가 터지면 막으려고.”

“임계에 도달하기까진 조금 남았는데 꽤 일찍 대기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여긴 내 고향. 사고가 일어나도 빨리 수습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군.

멸망의 시대까지 갈 것도 없네.

부루섬에서 발생한 게이트 브레이크는 ‘향신료 제도의 비극’으로 불릴 만큼 큰 사태로 번진다.

이 녀석, 그걸 막아 보겠다고 고생하다가 죽었겠군.

사람 한 명 살리네.

“이번은 운 좋은 줄 알아라.”

“뭐?”

나는 인도네시아 플레이어에게 웃어 준 후, 게이트 앞에 섰다.

“알다시피 게이트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 이번에는 각자의 판단을 믿지.”

폐쇄형 게이트.

한번 입장하면 클리어 때까지 나올 수 없다.

게이트가 열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부 정보가 전무한 이유.

나야 대충은 알고 있지만.

[부루섬 - 심해인의 거처]

[조건 - 브론즈 이하(100인)]

게이트 브레이크까지 남은 시간 - 85:42:19

출입 조건 보소.

말이 좋아서 100인이지.

폐쇄형 게이트는 한 명이라도 출입하면 붉게 물들면서 20초 이후에 자동으로 닫힌다.

저 조건은 일종의 함정인 셈.

“늦게 오지 마라.”

난 일행을 둘러보고는 먼저 게이트에 발을 디뎠다.

[심해인의 거처에 입장했습니다.]

[분류 - 폐쇄형 게이트]

[게이트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외부로 나갈 수 없습니다.]

[게이트 안에서의 사망은 곧 현실입니다.]

이 경고문구도 슬슬 지겹구먼.

게이트를 넘어서자, 넓게 펼쳐진 바다와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시커멓게 물든 바다.

크고 작은 기포가 바닷물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뒤따라 출입한 일행.

“전투 준비.”

“심해인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인어들이었어요?”

“그건 봐야 알겠지.”

인어나 어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나는 뒷말을 삼킨 채, 아르스 게티아를 펼쳤다.

[아르스 게티아 - 내장 스킬: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사용합니다.]

검은 철퇴가 해변 인근 바다를 타격하는 순간.

이계의 언어로 구축된 방어막이 바르바토스의 철퇴를 받아 냈다.

출렁이는 푸른 방어막.

철퇴에 실린 힘에 짓눌려서 으깨졌지만,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쿠웅! 위력이 반감된 철퇴가 바다를 후려치자, 초록색 피부의 괴물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딥 원?”

“심해인이라는 건 저 괴물들을 가리키는 모양이군요.”

“이, 인어가 아니었어요?!”

평균 신장은 4미터.

물고기처럼 도드라진 눈과 양서류를 닮은 피부, 그리고 등에 난 지느러미.

팔과 다리가 있지만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이형(異形)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약자여, 이 냄새는……!?”

“이계의 신을 섬기는 족속들인 것 같아.”

“불결한지고!”

화를 터트리는 닉스.

여기서 말하는 ‘이계’란 외우주를 가리킨다.

저 물고기 괴물들은 ‘공허’에 속한 포악한 성좌 중 하나, 다곤을 따르는 족속들이다.

“분명 영락해 버린 아이들이 탑을 만들었다고 하였겠다?”

“그렇지.”

“하면, 그 아이들은 외우주와도 손을 잡았다는 말이로구나.”

닉스의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분노가 느껴졌다.

뭐, 사실관계를 따지고 보면 여신님이 헛다리를 짚은 거지만.

바벨탑을 건설한 주체는 고신족들이 맞다.

문제는 별빛과 힘, 그리고 이름마저 잃어버린 고신족들만으로는 바벨탑을 만들 수 없다는 것.

모자라는 힘은 현세대의 성좌들에게 빌리거나 닉스처럼 잠든 개념신들의 힘을 훔치는 등, 여기저기에서 충당했다.

탑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흘러들어온 외우주의 힘.

[심해인의 거처] 같은 게이트는 탑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그 오해를 풀어 줄 이유는 없잖아?

“킥, 키키키킥.”

“킥킥.”

딥 원들은 비웃는 것 같은 숨소리를 내면서 해변 위로 올라왔다.

바르바토스의 철퇴에 휩쓸린 게 수십인데도.

해변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심해인들은 훨씬 더 많았다.

“결계 성능은 확실하네.”

쯧, 나는 혀를 찼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족속들. 여가 심판을 내려 주마.”

앞장서는 닉스.

그녀의 발밑에서 솟구친 극야가 달려오던 딥 원들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키킥, 키키킥.”

목을 관통당한 심해인이 두 눈을 부라린다.

치명상을 입어도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괴물.

외신(外神)을 숭배하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이다.

“참으로 천박한 모습이로다.”

닉스는 그 모습에도 미간을 찌푸릴 뿐, 두려운 기색을 전혀 비치지 않았다.

콰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심해인의 육체가 반대 방향으로 뒤틀렸다.

“닉스, 너무 앞서나가면 위험하다고!”

[진동 결계 x 3]

닉스의 극야로는 몰려드는 심해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지영이는 선두의 심해인들을 쓰러트리는 동안 훤히 드러난 틈을 결계로 보완했다.

“너희, 안 좋은 냄새 나.”

“그 몸뚱이에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새겨 주겠다.”

진동 결계 양옆으로 나서는 카를라와 핑 레이.

닉스의 공격을 버텨 낸 것을 보았는지, 심해인들의 팔과 다리를 우선적으로 잘라 냈다.

여러 게이트를 공략한 덕에 척척 맞는 호흡.

나도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솔라 익스플로전을 사용합니다.]

[해당 마법이 과충전 상태입니다.]

[더 이상 마나를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한계까지 밀어 넣은 마력.

손 위에 떠 있는 작은 태양을 해변 근처로 던졌다.

일행과의 거리가 100미터 이상 떨어졌을 때.

나는 손을 말아 쥐었다.

쿠아아아앙-!!!

응축된 열에너지를 해방하자, 일순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강렬한 빛이 해변과 바다를 뒤덮었다.

잠시 후.

“스, 스승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거에요?!”

지영이의 비명 소리가 고막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