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유감이군.”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 손을 더럽히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았다.
멸망의 시대 땐 이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단지……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있다는 사실에 입맛이 쓸 뿐.
“팀장님, 아직 말씀드릴 게 남아있습니다.”
핑 레이는 여전히 안색을 굳힌 채 또박또박 말했다.
전에 없던 진지한 모습에 절로 기울여지는 귀.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룡방에서는 절 훈련시킨다고 1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한화로는 1천억을 조금 넘는 돈.
유망주 하나 육성하는 것치곤 과한 금액이다.
중국에서 제일가는 길드라고 하더니. 스케일도 남다르네.
“나도 너한테 그 정도 금액은 줘야 이쪽으로 오겠다는 건가?”
“아니요. 제가 팀장님이 세우실 길드로 이적하려면 구룡방에 그만한 돈을 토해 내야 한다는 것이죠.”
“오호, 나한테 역으로 딜을 걸 줄이야.”
“그리고 장 우페이의 타깃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장 우페이.
구룡방의 대형이자, 멸망의 시대에는 공동전선을 꾸리기도 했던 군주급 플레이어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을 아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야 마지못해 동맹을 맺었던 인물.
내가 회귀한 시점에서도 이미 거물로 자리 잡은 자이기에, 영수 형님처럼 운명에 개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잘됐네.”
“예?”
“너를 영입하려면 돈도 내야 하고 구룡방이랑 척을 져야 한다, 그 말이잖아.”
“그렇습니다.”
“너도 각오를 나름대로 다진 모양이고.”
“대형께서는 배신자에게 관대하지 않으시니까요.”
핑 레이의 입가가 쓴웃음으로 물들었다.
나한테 이적 조건을 말했다는 것 자체가 반쯤 구룡방을 배신한 셈.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핑 레이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에 들어.”
“저는 아주 거지 같은데요.”
말만 놓지 않았을 뿐, 핑 레이의 목소리가 상당히 거칠어졌다.
새빨개진 얼굴.
격앙된 감정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런데도 나한테 딜을 걸었잖아?”
“빌어먹게도 팀장님이랑 같이 있으면 더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씩씩대는 핑 레이.
나는 묵묵히 말을 들으며 녀석이 감정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후- 뜨거운 한숨을 토해 내며 진정한 녀석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결정은 팀장님이 하시죠.”
“네놈의 각오, 잘 들었다.”
이제까지 내뱉은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난 여전히 핑 레이를 100%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 우페이라면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수단을 쓰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중화의 자존심 운운하는 녀석이 고작 나 하나 섭외하려고 이렇게까지 복잡한 수를 쓰진 않을 거라.
단지, 이 거래가 핑 레이의 계략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닫지 않았다.
“1억 달러, 그리고 미후왕과 맺어 주는 것. 이게 계약 조건인가?”
“그렇습니다.”
몸값 한번 엄청나군.
성좌와의 계약과 1억 달러.
거기에 구룡방과 척을 지는 것까지.
핑 레이 하나를 끌어들이는 것 치고는 엄청난 대가다.
하지만.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때까지는 계속 생각해 봐.”
“생각이요?”
“네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
“큭큭. 이 핑 레이, 팀장님한테 이미 뱉은 말이 있는데 생각을 바꾸겠습니까?”
녀석은 가슴을 탕탕 쳤다.
그래. 네 생각이 진심이고, 또한 바뀌지 않기를 바라마.
* * *
다음 날.
플레이어 협회에 연락해서 게이트 관련 정보를 물었지만, 특이점은 없었다.
오늘은 탑을 오르는 데 매진해야겠군.
[바벨탑 접속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가 머무는 공간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속됩니다.]
[25층 미션을 매칭 중입니다.]
[매칭 범위 - 한국 서버]
[1/5]
[혼자 진행 가능한 미션입니다. 매칭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Y/N]
내가 Y를 누르려는 찰나.
“팀원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더냐?”
닉스가 의문을 표했다.
“혼자 해야 보상도 크니까.”
팀으로 진행하면 미션 기여도가 나누어진다.
모든 팀 미션이 그렇진 않지만, 25층은 기여도로 최고기록이 결정되거든.
나 홀로 해 먹는 게 팀원들에게도 도움 된다는 것!
-이기적인지, 아니면 팀원들을 아끼는지를 모르겠구나.
닉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팀 구성이 끝났습니다.]
[경쟁 팀을 매칭합니다.]
[매칭 범위 - 글로벌 서버]
[12/20]
[15/20]
[20/20]
[매칭이 완료되었습니다. 60초 후에 25층 미션을 시작합니다.]
먼저 국내에서 팀을 구축, 전 세계의 팀들과 경쟁하는 미션.
시간이 다 되자 늘 그랬듯이 환한 빛이 망막을 강타했다.
[바벨탑 - 25층]
[오로솔 산맥 지하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유적 탐사]
오로솔 산맥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험지입니다.
여러 탐험가들은 산맥 안에 잠들어있는 고대 유적을 발견하려고 다방면으로 조사하던 중, 이 지하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지하 통로 끝에 존재하는 고대 유적에 도달하십시오.
▶ 목표: 고대 유적 발견.
빛 한 점 없는 터널.
나는 초음파로 주변의 지형을 읽어 냈다.
시너지 효과 덕에 청각에서 시각으로 전환하지 않고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이니 좋네.
[밤의 여신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회복력이 50% 늘어납니다.]
충만한 어둠이 힘을 채워 준다.
대지모신의 가호보다 더 강력한 회복 효과.
빛이 없을 때 한정이긴 해도, 꽤 든든한 가호란 말이지.
“여신님은 영체로 있어 줘.”
“과연. 속도를 올리겠다는 말이로구나.”
영체로 변한 닉스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탔다.
-가라, 여의 종마여!
“누구를 주머니 괴물로 아나.”
전력 질주를 사용해서 터널을 내달렸다.
이번 미션의 테마는 경쟁.
1차로 국내 플레이어들끼리 팀을 구축, 2차로 매칭이 된 다른 나라의 플레이어들과 겨루는 시스템이다.
유적을 누가 먼저 빨리 발견하느냐?
상위 5팀만 보상을 받을 수 있기에, 통로에서 상대 팀을 마주치면 유혈 사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쭉 뻗은 통로를 주파하던 중.
초음파가 다른 생물체를 감지했다.
“뀌리릭?”
아이언 슬러그.
4미터 크기의 달팽이로, 특이점이 있다면 ‘철’이라는 이름답게 달팽이집이 쇠로 되어 있다.
내 존재를 인식한 아이언 슬러그가 두 눈을 껌벅이면서 고개를 돌린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린 움직임.
-움직임이 저리 둔해서야.
“그래도 꽤 위협적인 녀석이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언 슬러그가 입을 벌렸다.
둥근 입에서 폭포수처럼 솟구치는 노란색 액체.
[육감이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난 운류보의 보법을 밟으면서 타액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치이이익!
노란 액체에 닿은 바위가 눈 녹듯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강산성 액체. 저기에 닿으면 금속도 녹아.”
25층 공략 난이도를 올리는 주범, 아이언 슬러그.
노란 액체를 뒤집어쓰면 장비의 내구도가 미친 듯이 깎여 나간다.
장비의 내구도 소모 때문에 간격을 유지하면서 사냥하는 게 일반적인 공략 방법이지만.
-달팽이가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곤란하겠구나.
“그래서 통로를 주파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맞춤형 대책을 준비했구나.
“그런 거 없는데?”
정면 돌파.
난 운류보를 최대로 운용,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뀌리릭!”
아이언 슬러그가 고개를 홱 돌리자, 노란 타액이 곡선으로 날아들면서 정면을 가득 메웠다.
-위험하도다.
“밀도가 낮아져서 괜찮아.”
가시 갑피로 전신을 감싼 채, 타액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15% 감소했습니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분사 형태로 뿌린 건데도 내구도가 이렇게 깎여 나가다니.
지독하구먼.
“뀌리릭?”
“누가 더럽게 침 뱉으랬냐.”
쭉 뻗은 손가락으로 아이언 슬러그의 머리를 강타.
백수제왕무 5초식, 광서지는 아무 저항감 없이 놈의 머리를 관통했다.
[포식을 사용합니다.]
쭈그러드는 아이언 슬러그의 몸뚱이.
이 녀석의 정수도 유용하지.
정수 포식을 마친 후, 다시 통로를 주파했다.
-무턱대고 달리다가는 길을 잃을 수도 있지 않느냐?
“대충 가도 맞으니까 괜찮아.”
여기는 8층처럼 복잡한 구조로 된 미궁이 아니다.
고대 유적의 위치는 북쪽.
방향만 잘 맞춰서 달리다 보면 얼추 맞거든.
[초음파]의 효과로 방향을 틀릴 일도 없으니, 안심하고 달리면 된다.
유적까지는 거리가 꽤 되기에, 이동할 때는 내공을 아낄 겸 전력 질주만 사용했다.
“뀌리리릭!”
“뀌리릭!”
통로에 진을 친 아이언 슬러그의 숫자도 늘어났다.
고대 유적에 가까워질수록 놈들의 출현 빈도가 늘어나니 정답인 셈인가.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극야의 힘을 방벽처럼 넓은 형태로 전개.
노란 타액을 막아 냈다.
의외로 극야로 만들어 낸 벽은 산성 액체에도 녹아내리지 않고 잘 유지가 되었다.
“이런 장점이 또 있었네.”
타액을 막아 내느라 소모된 힘은 금세 충전되었다.
빛이 들지 않는 장소라서 극야의 회복 속도가 훨씬 빠르거든.
운류보를 극성까지 운용해서 지그재그로 달릴 필요가 없었네.
[백수제왕무 - 5초식]
[광서지를 사용합니다.]
일격에 한 마리씩.
손가락이 아이언 슬러그의 머리를 헤집어 놓으면 전신이 축 늘어졌다.
강철로 된 집으로 들어가면 모를까, 놈의 육체는 강하지 않았다.
[아이언 슬러그의 정수를 포식했습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희귀]
[체력 + 5]
[맷집 + 5]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금속 섭취가 추가됩니다.]
[금속 섭취]
등급: ★★
분류: 패시브
금속을 섭취해서 육체에 흡수시킨다.
흡수시킨 금속의 종류에 따라 여러 부가 효과를 얻는다.
*흡수 가능 금속: 100kg.
-금속을 먹는다니?
“얘네 주식이 원래 금속이야.”
강철마저도 녹여 버리는 강산성 액체.
아이언 슬러그는 저 타액으로 지하에 묻혀 있는 광물들을 액화시키고 흡수한다.
“등에 달고 다니는 집도 흡수한 강철로 만든 거고.”
-신기한 종이로구나.
금속 흡수 능력.
정수의 효용성 자체만 놓고 봐도 괜찮은데, 후에 [킹 슬라임]의 정수를 얻으면 능력의 한계가 아예 사라진다.
즉, 스텟을 추가로 늘리는 게 가능하다는 뜻!
고유 능력인 포식에 비해 떨어지긴 해도, 능력치 증가는 언제나 환영이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사이보그 좀비의 정수가 아이언 슬러그의 정수에 공명합니다.]
[두 정수를 융합하여 새로운 스킬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럽쇼?
생각지도 못한 공명 현상이 일어났다.
회귀 전에는 얻지 못했던 사이보그 좀비의 정수.
아이언 슬러그의 정수에 공명할 줄이야.
잠깐. 이거…… 바로 융합할 게 아니라 더 섞어 볼까?
“여신님, 잠시만 나 좀 보호해 줘.”
닉스에게 호위를 맡긴 후, 내부를 관조했다.
무수히 빛나는 정수들.
그중, [철갑 아르마딜로]와 [가시멧돼지], 그리고 [사이보그 좀비]의 정수를 손에 쥐었다.
사이보그 좀비의 정수가 아이언 슬러그에 반응하면, 둘이 아니라 넷을 융합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네 정수를 한데 엮었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시도하는 융합.
몸이 들썩거린다.
자의로 융합을 시도할 경우, 정수끼리 성질이 맞지 않으면 반발을 일으킨다.
실패 후유증은 당연히 내 몸으로 오기에, 신중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오거든?
[네 정수의 융합이 성공했습니다.]
[메탈 반사 장갑이 추가됩니다.]
순식간에 반발력이 사그라지고, 네 정수가 엮여서 만들어 낸 빛이 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