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아직 창설하지도 않은 길드 가입 제안.
신준석은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때 나랑 한 내기, 진심이었습니까?”
대답을 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진지해진 홍윤수의 표정.
“무슨 내기를 했나?”
신준석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1년 안에 30층을 돌파하면 내가 진호 플레이어의 길드에 들어가기로 했지.”
“기억해 주셔서 다행이군요.”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1년이라는 게…… 정확히 언제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
홍윤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작년 12월이니 3개월 정도 됐네.”
“1년 안에 실버 등급이라. 전례가 없는 일이군.”
신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후배님이라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나는 어깨를 살짝 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홍윤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떼었다.
“약속한 시간까지는 9개월이나 남았는데,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뭐, 원래 다음 달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정이 생겨서요.”
바알과의 내기.
아르스 게티아를 건 일생일대의 내기 때문에 실버 승급전을 부랴부랴 준비하는 중이다.
홍윤수에게 제안한 건 덤이 된 셈.
나는 신준석의 눈을 직시했다.
“그래서. 선배님의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후배님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 그 정도쯤이야.”
신준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양반인 건 알았지만…… 너무 시원시원하니까 제안한 쪽이 민망해지는걸?
“단, 조건이 있네.”
“뭐든지 맞춰 드려야죠. 랭커를 영입하는 건데.”
“알다시피 나도 팀을 꾸리고 있는 중이라.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해 주었으면 하는군.”
“에이, 그냥 선배님 이름만 빌리는 거라고 생각해 주십쇼.”
팀, 그리고 길드.
내가 조직을 만든 건 파멸의 시대를 대비해서다.
미래에 큰 전력이 될 이들을 섭외, 한 울타리에 묶어 두는 것.
“선배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정도라면 나도 큰 부담은 안 되는군. 잘 부탁하지, 길드장.”
회귀 전에는 든든한 동료였던 권성.
이제는 길드장과 길드원이라는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도 조만간 같은 신세가 될 것 같은데.”
홍윤수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참,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선배님.”
“말해 보게.”
“심법 하나를 구하고 싶어서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준석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심법이라고? 누구인가!”
“아, 플레이어는 아닙니다.”
“그렇군.”
신준석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저 무공광.
하여간 무공에는 진심인 사람이다.
“저랑 계약을 맺은 존재에게 무공을 배우게 하고 싶어서요.”
-혹, 그 존재가 여를 가리키는 것이더냐?
가만히 있던 닉스가 화들짝 놀랐다.
“응.”
“심법이라. 잠시만 기다려 보게.”
보유 목록을 확인한 신준석이 무공 이름들을 쭉 읊어 주었다.
-삼양진기.
-단적비공.
-주전공.
…….
모두 이류에서 삼류 사이.
“좀 아쉽네요.”
“아무래도 중국에서 비급을 꽤 구하다 보니, 일류 이상은 확보하기가 어렵더군.”
국내 물량은 신준석이 대부분 확보했다지만, 전 세계로 놓고 보면 중국의 돈지랄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저것도 한 2년 하다가 말 텐데.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무공 사용자들은 ‘깨달음’의 벽에 막혀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오르기가 힘들거든.
체술에 비해 엄청 뛰어나다고 보기도 어렵고.
“이 무공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고민 끝에 무공 하나를 언급했다.
“괜찮겠는가? 그 무공은 이류로 분류되긴 하나, 익히기가 매우 어려울 터인데.”
“아마도요.”
내 생각이 맞다면, 닉스한테는 이보다 더 어울리는 무공이 없을 거니까.
“값은 치르겠습니다.”
“뭘, 대련을 해 준 대가라고 생각하게.”
“그거는 길드 가입으로 퉁 친 거 아닙니까?”
“아니지. 내 영입의 대가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 거잖나.”
어휴.
저 무공광의 생각은 나도 쉽게 읽을 수가 없군.
* * *
팀 건물로 돌아온 후, 나는 팀원들을 물리고는 닉스만 대동한 채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피로하지는 않느냐?
“나도 이번 대련에서 얻은 게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해야지.”
-호오, 그대가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하구나.
“우선은 플래티넘급까지는 해볼 만하다는 점?”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플레이어와 대등하게 겨루었다.
결정적인 한 수가 모자라서 항복하긴 했지만.
[공허의 거울]을 좀 더 연구하면, 랭커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
-그 흉악한 괴물로 변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겠구나.
원시종의 정수.
티라노사우루스로 변하면 근접전과 관련된 능력치가 500% 상승한다.
지난 미션 때도 백택군림각을 펼치는 순간, 상급 마법인 [어스퀘이크]에 버금가는 위력이 났으니.
“그 형태에서는 무공 대부분을 쓸 수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백수제왕무의 초식은 대부분 팔로 펼치는 방식이다.
비익봉황각처럼 각법도 있다만 인간과 구조가 다른 원시종의 육체로 펼치는 건 불가능하다.
백택군림각.
혹은 티라노사우르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입을 사용하면 모를까.
원시종의 정수를 비장의 수단으로 쓰기에는 연구가 부족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오크의 힘을 사용했지.”
-무모해 보이면서도 신중하구나.
“다 계산한 거야.”
공허의 거울 빼고는 모두 예상범위 안이다.
역시, 제대로 활용하려면 더 연구할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거지.”
[초화지공(草花之功) 비급]
등급: ★★
분류: 패시브
자연지기를 변화 없이 몸에 담아두는 심법입니다.
*습득 시 내공 스텟 추가.
허름한 책자.
신준석이 대련을 해 준 답례랍시고 그냥 준 비급이다.
-진심이더냐?
“응. 이 내공심법이 전투에서 모자랐던 부분을 보완해 줄 거야.”
-믿기지가 않는군. 여는 모자람을 느끼지 못하였다만.
“암영추혼검을 펼칠 내공만 더 있었어도 우리가 이겼을걸?”
극야의 힘을 더한 암영추혼검.
현 수준에서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이다.
쯔쯧.
닉스가 혀를 찼다.
-여의 계약자여,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구나.
“뭘?”
-그대와 계약을 맺은 존재가 지고한 존재, 밤의 여신이라는 것을 말이니라!
턱을 치켜올리는 닉스.
저렇게 있어도 위압감보다는 귀여움이 느껴지는 게 함정이지만.
본인한테는 말 안 해 줘야겠다.
-한데, 여가 고작 필멸자의 기예를 익힐 것 같으냐?
“이해해. 무공을 익히는 게 어려우니까.”
닉스가 두 눈을 껌벅였다.
뭔 소린가 싶지?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네. 못 들은 걸로 해 줘.”
-그대여. 방금 한 말, 다시 한번 말해 보라.
“수준 낮으면서도 어려운 필멸자의 기예를 여신님에게 권한 내가 잘못이지.”
하아, 나는 짧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대는 여가 무공을 익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딱히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어.”
-아니기는 무엇이 아니더냐! 아무리 어려워도 고작해야 필멸자의 기예 따위거늘!
화아악!
호문쿨루스의 육체로 현현한 닉스가 내 손에서 비급을 낚아챘다.
실체화하는 와중에도 극야로 옷을 만들어서 몸을 감싸는 건 잊지 않았다.
“어, 어어어.”
“밤의 여신의 위대함을 그 모자란 눈으로 잘 새겨 두어라.”
닉스는 초화지공의 내용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린 비급.
좋아. 계획대로야.
나는 웃음을 꾹 삼켰다.
여신님을 다루는 것쯤, 식은 죽 먹기지.
“과연. 필멸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연의 기를 다루는구나.”
음- 하고는 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에 아른거리는 기.
초화지공을 익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내공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이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잖아?
“괄목하라, 밤의 여신의 위대함을!”
“역시 여신님은 대단해.”
“표현력이 참으로 빈약하구나.”
“닉스 여신의 위대함은 저 바다를 뒤덮은 밤과도 같으니, 끝을 재단할 수가 없어.”
“후후훗, 더 말해 보아라.”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닉스의 위대함을 칭송한 후에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불민한 모습을 보이지 말거라.”
“예예. 잘 모시겠습니다.”
“흥, 이제야 여를 배알할 자세를 갖추었구나.”
닉스의 자존심을 긁어서 무공을 익히게 한 건 좋은데, 부작용(?)이 만만치가 않군.
다음에는 참고해야겠어.
“그럼 초화지공의 구결대로 운기행공을 해 볼래?”
닉스는 군말 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꾸준하게 비위를 맞춰 준 보람이 있구먼.
“참, 이거 물고.”
욕망의 주머니에서 푸른 돌을 꺼냈다.
튜토리얼에서 얻은 달맞이 돌.
2주에 한 번 섭취가 가능하기에, 꾸준히 내공으로 녹여 냈는데도 절반 넘게 남았다.
“이걸 권하는 이가 그대라서 받아 주는 것이니라. 명심하라.”
“아무렴요.”
닉스는 달맞이 돌을 꿀꺽 삼킨 후에 심법을 운용했다.
근처에서 호법을 선 지 얼마쯤 지났을까.
후우- 짧은 탄성과 함께 닉스가 감았던 눈을 떴다.
“내공이라. 이런 식으로 운용해보니, 깊이가 느껴지는 도다.”
“그렇지?”
“이 내공이 극야의 운용을 돕는구나.”
스스스슷!
닉스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검은 기운.
“출력이 더 올라갔네?”
10% 정도 늘어난 극야의 출력.
닉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하니라. 내공을 섞으니 운용하기가 한결 편해졌구나.”
“예상보다 효과가 더 좋군.”
초화지공은 자연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단전에 녹여 내는 심법이다.
등급은 이류에 불과하지만, 무공에 담긴 묘리만큼은 심오해서 일류 무공만큼이나 익히기 어려웠다.
근데 습득 난이도가 높은 만큼 심법의 성능이 뛰어나느냐 하면 또 아니라서.
이 무공을 달라고 했을 때, 신준석이 괜히 재고해 보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자연 중 하나인 ‘밤’을 주관하는 여신한테는 이렇게나 궁합이 잘 맞는 무공도 없을 거다.
“신기하구나. 한낱 필멸자가 자연의 힘을 그대로 담아 내다니.”
무공을 사용하는 여신이라.
극야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닉스이지만, 무공들을 습득하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똑똑똑-.
“팀장님, 안에 계십니까?”
핑 레이가 훈련장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무슨 일이지.”
“저번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답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호오. 내 예상보다 빠르게 승부수를 던지는군.
“들어와라.”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핑 레이.
흐트러진 호흡, 그리고 손끝이 떨리는 것으로 보건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내 제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나?”
“예.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생각했었죠.”
“내가 말 돌리는 걸 싫어하니 본론으로 넘어가지. 결정했나?”
“예. 제가 생각한 답은…….”
뜸 들이기는.
핑 레이가 말끝을 흐리자, 덩달아 나도 긴장이 되었다.
바뀌어 가기 시작한 미래.
과연.
이 녀석도 회귀 전과 다른 운명을 선택할 수 있을까?
“구룡방을 벗어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그러냐.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