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쿵! 쿵!
발을 한 번 뗄 때마다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스, 스승님, 너무 빨라요!”
지영이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근력·민첩·체력·맷집이 500% 늘어납니다.]
[신체의 구조가 변형되었으므로 일부 스킬이 사용 불가능해집니다.]
원시종의 육체로 변하면서 보폭도 길어졌다.
거기에 [운류보]와 [전력 질주]를 동시에 운용하고 있으니.
안 떨어지고 등에서 버티고 있는 게 용했다.
“…….”
영수 형님은 아예 말할 힘도 없는지, 인형들로 몸을 붙들었다.
-더 달려 보아라!
신난 사람은 닉스 한 명뿐.
“야! 여기서 더 속도를 내면…… 우욱.”
헛구역질을 하는 지영이.
그러다가 내 등에 실례되는 짓을 하진 않겠지?
주전장인 협곡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자.
“티, 티라노사우루스?”
“괴물이다!”
“승급전에서 공룡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일본 측 플레이어 무리가 사색이 된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나마 감이 살아 있는 일부 플레이어들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공격에 나섰지만.
태앵!
원시종의 피부가 원체 두꺼운 탓에 갑피를 쓰지 않아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 육체, 의외로 불편하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짧아진 손.
다리 골격도 바뀌면서 장, 각, 권법 등 무공이나 체술을 사용하기가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백수제왕무 - 10초식]
[백택군림각(白澤君臨脚)을 사용합니다.]
대진각.
발로 지면을 세게 구르는 초식이다.
원래는 내공으로 땅을 강타, 지축을 흔들어서 상대의 균형 감각을 무너트리는 기예이지만.
티라노의 육체로 펼치는 진각은 용도가 달랐다.
쿠르르르릉-!
있는 힘껏 발을 구르자, 지축이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스퀘이크]에 버금가는 파괴력.
나를 공격하려고 달려들었던 플레이 무리는 진각의 충격에 휘말려서 가루로 변했고.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일본 플레이어들조차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렸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마법사들은 바닥에 나뒹굴었으니.
“……와.”
지영이의 감탄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쓸 만하군.”
나는 짧게 감상평을 한 뒤 전진했다.
근접한 일본 플레이어들이 발악적으로 무기를 휘둘렀지만.
발을 위로 올렸다가 쿵, 하고 세게 짓누르면 모두 가루로 변해 버렸다.
“카이쥬다, 카이쥬!”
“저 괴물을 어떻게 막아?”
“도망치자!”
100명이 넘던 인원 중 1/3이 몰살당하니 저항할 의지를 잃고 후퇴했다.
“어딜 도망가?”
쿵! 쿵!
전력 질주로 일본 플레이어 집단이 뭉쳐 있는 곳에 도달.
다시 한번 백택군림각으로 대지를 뒤흔들었다.
“끄에엑!”
“하늘의 심판이다.”
“나, 너, 너무 무서워!”
전의를 상실한 일본 측 플레이어들.
시시하구먼.
[공허의 거울] 지속 시간이 끝날 때 즈음에는 두 다리로 선 일본 플레이어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아니, 도망치는 놈들을 잡느라 시간이 더 걸린 거지.
5분이 지나는 순간.
[더 이상 혼을 공허의 거울에 비추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라는 경고 메시지가 아른거렸다.
음. 지속 시간이 넘어가도 내 의지로 연장시킬 수 있다는 말이군.
일본 측 플레이어들도 전멸시켰겠다.
더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좋은 정보를 얻었어.
난 ‘공허의 거울’을 해제했다.
순식간에 낮아지는 시선.
육체가 쪼그라들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커흑!”
팽창했던 육신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순간, 복부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액체.
입을 벌리자마자 피가 한 바가지 쏟아졌다.
“계약자여, 괜찮으냐!”
“스승님!!”
“이럴 게 아니지. 포션이라도 어서 드려야 합니다.”
당황하는 팀원들.
그나마 영수 형님이 낫네.
내가 피를 뿜어내는 걸 보면서 냉정하게 판단하다니.
“아, 괜찮아요.”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피를 게워 놓고 무슨 말이더냐?”
“내샨처럼 감당 못 할 힘을 다루어 낸 후유증이야.”
지속 시간이 끝난 뒤에도 [공허의 거울]을 유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겠군.
스킬 보정을 받았는데도 내상을 입을 정도이니.
[재생]과 [대지모신의 가호]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는 내상.
나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1차 요새를 바라보았다.
협곡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
공허의 보석과 여러 괴물들의 정수, 그리고 전생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각성한 내샨의 정수까지.
“승급전 끝내러 가죠.”
그로부터 2시간 후.
[필리핀 측의 지배 수정이 파괴되었습니다.]
[한국 진형이 최후의 승자로 선출됩니다.]
[한국 - 100% 승급]
[필리핀 - 66% 승급]
[일본 - 33% 승급]
승급전은 한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한국, 브론즈 승급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다.』
『승리의 주역인 유진호, 이번에는 변신 스킬까지? 일본 전장을 휩쓸어버린 티라노사우르스!』
『일본 선수들. 유진호를 카이쥬라고 부르며 두려워해…….』
『전문가가 분석한 유진호의 수준. 이미 실버 등급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아…….』
20층 클리어 직후.
한국 언론은 이번 승급전 결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이언 승급전처럼 주목을 받은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이걸 보아라. 그대의 모습이 너튜브에 올라와 있구나.”
닉스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1차 대침식 이후 실시간으로 중계가 가능해졌기에, 내 활약상도 인터넷에 업로드 가능했다.
나는 태블릿을 반대로 밀었다.
“귀찮아.”
“후훗, 모두 그대를 칭송하는 말뿐이니라.”
“지금이야 그래도 미끄러지는 순간 다 욕으로 바뀔걸?”
매스컴의 주목은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끝.
대중에게는 여러 번의 성공보다 한 번의 실패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닉스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참으로 시시한 이야기로구나.”
“그렇게까지 들뜰 필요는 없다는 거야.”
“한데, 그대는 언론에 노출되는 상황을 유도하지 않았더냐?”
1차 대침식 이후, 여러 게이트를 공략했다.
[낙원의 밤]부터 플레이어 팀이 몇이나 몰살당한 게이트까지.
팀원 등급이 모두 아이언이라서 고난이도 게이트를 출입하지는 못했지만.
위험을 가리지 않고 공략한 덕분에 여러 언론에서 우리를 취재했다.
“그야 유용하니까.”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게 매스컴이다.
하지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내 편이 되어 주고, 또 대변인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미지 메이킹의 중요성이지.
한창 닉스와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김영수가 붉어진 눈으로 앞에 섰다.
이 형님은 어디서 울고 오기라도 했나. 왜 이래?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예. 말씀하시죠.”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김영수.
훤히 드러난 어깨와 등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팀장님 덕분에 재능을 개화하고 평생의 숙원까지도 해결했습니다.”
“숙원까지야.”
“아닙니다. 만년 아이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팀장님이 힘써 주신 덕입니다.”
뚝- 뚝-.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다 형님의 능력이니 이러지 마세요.”
나는 못 본 척, 김영수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수년 동안 아이언에서 머무른 플레이어.
자신의 재능이 모자라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
그렇기에.
장소가 달랐을 뿐, 회귀 전에도 대성을 이루었겠지.
“오늘 하루는 반차 쓰고 집에 다녀오세요.”
“언제부터 반차도 있었습니까?”
“팀장 마음이죠.”
김영수의 입에서 큭, 하고는 짧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깨의 잔 떨림도 잦아들고.
이젠 마음의 응어리를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했다.
숙였던 허리를 펴는 김영수.
“참, 고향 가는 길이 조금 부산할 겁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영수 형님의 지휘 능력도 이슈거든요.”
내 활약에 조금 빛이 바랬을 뿐.
김영수의 능력 활용도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태 천대받았던 지휘 능력.
통솔하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추가되는 강화 옵션.
거기에 시야 공유 스킬도 있다.
“허허, 제가 잘한 것도 아닌걸요.”
“중계로 본 사람들은 형님의 지휘 능력을 확인했을 건데요.”
승급전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이야, 지휘의 주체가 영수 형님이라는 걸 알 수가 없지만.
중계 화면으로 본 사람들은 달랐다.
“귀향길에 엉뚱한 놈한테 영업 당하지나 마세요.”
“제가 평생 은인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김영수는 습기가 아른거리는 눈빛 그대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울다가 웃으면…….
커흠.
여기까지 하자.
“스승님, 그러면 저도 고향 좀 다녀올게요!”
“어. 고생했으니까 좀 쉬고 와.”
팀을 꾸린 후.
오래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혼자라니. 여는 장식이라도 되느냐?”
“태블릿에서 손이나 떼고 그런 말을 하지 그래.”
저 니트 여신.
현대 문명에 너무 빨리 익숙해지는 것도 고민해 볼 문제다.
텅 비어 버린 훈련장을 걷던 중.
[공허의 거울의 재사용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또 공허의 거울이라는 스킬을 사용할 셈이더냐?”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그대의 표정을 보면 다 아느니라.”
난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공허의 거울.
회귀 전에는 얻지 못한 새로운 힘이다.
[도플갱어]의 정수로 형상을 바꿔본 적은 있지만.
외형만이 아닌, 내면 자체를 바꾸는 스킬은 처음이었다.
연구할 가치가 있지.
후-.
닉스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그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만.”
라고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스킬의 운용 범위를 파악하는 게 목적이니.
굳이 원시종의 정수처럼 강력한 것을 비출 필요는 없다.
난 튜토리얼에서 얻은 정수, ‘뿔 토끼’의 힘을 공허의 거울에 비추었다.
[뿔 토끼의 흔적이 거울에 비쳐집니다.]
[혼에 기록된 형태로 변환됩니다.]
[사용자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지속 시간이 3시간으로 설정됩니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허벅지.
50% 정도 부풀어 오른 뒤에야 변화가 멈추었다.
가볍게 도약하자, 순식간에 훈련장 천장까지 뛰어올랐다.
“헐.”
높이 뛴 건 놀랍지 않았다.
내 능력치라면 전력으로 뛰었을 때 훈련장 천장이 아니라 3층 건물까지도 넘을 수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건 스킬의 효과로 변한 육체지.
“이런 거였나.”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공허의 거울]은 모든 정수에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비춘 정수의 강·약에 따라 지속 시간도, 변화되는 형태도 제각각이다.
활용도가 무궁무진하겠어.
나는 [공허의 거울]을 해제했다.
부풀었던 근육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원시종의 정수를 비추었을 때처럼 내상을 입진 않았다.
증폭 수준이 적고, 오래 유지하지 않았으니 페널티도 크지 않았다.
“괜찮으냐?”
“응. 보다시피.”
나는 한층 밝아진 닉스를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공허의 거울이라.
이후에도 활용 방법을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